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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서 희망이 시작 된다
신용경제 2017-01-03 10: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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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진 신부
광명성당

 

정의로운 사회에 근거해서 희망을 두는 일은 무엇보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희망이 되고 이 과정이 바로 하늘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희망은 여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다 갖추어진 상황에서 희망을 꿈꾸는 것은 어쩌면 비현실적입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런 사회는 형성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망가지고 흐트러진 이 사회에서 나름의 정의를 만드는 과정에 서 있는 것이 희망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의를 만드는 작업은 불의한 사회의 한편에서 어느 때는 호롱불로, 어느 때는 LED로 불을 밝히는 것과 같습니다.


“최순실과 그의 일당들에게 욕을 수없이 퍼부었습니다.” 요즘 고백소에서 제일 많이 듣는 고백 내용입니다. 주로 70세 이상 노인들의 고백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그들을 욕 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착하고 순진하신 노인들은 욕을 한 것 자체를 죄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사제생활 28년 만에 처음 듣는 고백의 내용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집단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손주들 자라는 모습이나 구경하고 노후를 보내야 할 노인들이 심한 화병을 앓고 있습니다. 노인들도 장년들도 청년들도 심지어 청소년들도 요즘 최순실 게이트를 보고 이구동성으로 느끼는 공통 감정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망감 입니다.


절망감에 빠진 우리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이런 고백을 기대하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백을 듣지 않아도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고백을 기대하지 맙시다. 그 대신 고백을 대체 할 수 있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즉, 우리 사회를 우리 스스로 벌거벗기고 보는 작업입니다.


이번 게이트로 사법부와 검찰과 언론 그리고 재벌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들이 거짓말을 하고 솔직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더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솔직해지도록 기회 있는 대로 그들에게 말해야 하고, 선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다행히 SNS라는 도구로 서민도 소통할 수 있는 미디어를 갖게 되었습니다. 국민이 자기 스스로 희망을 위해 스스로 행동해야 합니다. 희망은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희망이 거짓 정의와 거짓 미래라는 현실 속에서 세워지면 그 결과는 절망이 됩니다. 희망은 정확히 정의로운 사회의 바탕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정의로운 현실을 만들도록 쉽게 열어 주지는 않습니다. 인간 안에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욕망은 늘 유혹 받고 그 유혹에 넘어가고 유혹에 넘어간 자들끼리는 연대하고 연대한 힘은 자기들만의 기득권으로 누리고 그 외 사람들은 혹사하는 상황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 세력이 항상 우위를 차지하고 가끔 정의로운 쪽이 잠깐 우세했다가 다시 불의한 쪽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희망이란 도대체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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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이런 정의로운 현실을 만들도록 쉽게 열어 주지는 않습니다. 인간 안에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욕망은 늘 유혹을 받고 그 유혹에 넘어가고 유혹에 넘어간 자들끼리는 연대하고 연대한 힘은 자기들만의 기득권으로 누리고 그 외 사람들은 혹사하는 상황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가 살았던 시대상도 지금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는 로마제국 식민지의 국민이었습니다. 자유는 억압되었고, 식민지 치하에서 로마인들에게 굴욕적인 삶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때 예수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었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놀랍게도 ‘하늘나라’였습니다. 그는 독립군을 결성하여 불의의 세력을 물리치지 않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 방법이 궁극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그저 알아듣기 힘든 하늘나라를 가르쳤습니다.


그가 주장한 하늘나라는 하나의 정신세계입니다. 이 세상의 나라는 움직이는 원동력은 권력과 돈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하늘나라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하늘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 세상나라 안에만 속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우며 권리를 차지하고 빼앗거나 하지만 두 번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통해서 세상나라를 통제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최순실 게이트를 맞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국민은 촛불을 들고 직접 정치에 나섰습니다. 대의 민주주의의 형태로 정치인들에게 맡겨 놓았던 국정을 촛불로서 직접 챙기고 나섰습니다. 정치인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민의를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행동이 너무 지나쳐서 국민의 정치에 대한 직접 참여는 한동안 더 이어질 것입니다. 기나긴 긴장의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생업과 학업으로 지친 국민은 정의가 바로 설 때까지 이중고를 겪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가 가르친 ‘하늘나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정의를 사는 것입니다. 즉, 정의를 택하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자기에게 허락된 범위 내에서 정의에 뜻을 두고 행동하는 과정 모두가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현실이 또 다른 욕심쟁이들에 의해 외면되더라도 정의를 택하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하늘나라를 살지 않는 사람들은 시시비비를 따지고 이기면 만족하고 지면 슬퍼하고 괴로워하겠지만, 세상에 살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늘나라의 삶을 동시에 사는 사람들은 정의를 지향하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지금 현실이 당장 변화하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행동합니다. 자기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후대에서도 계속 지속하기를 바라고 후대에 자신의 삶을 전수 합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도 하늘나라에 사는 삶을 예수에게 배워야 합니다. 총이나 칼로 세상을 이겨 정의를 세워도 세상 사람들 안에 꿈틀거리는 욕망은 쉬지 않고 재현될 것을 예수는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비폭력, 즉 사랑으로 정의를 세우는 과정이 곧 궁극적 목표 달성이라고 강조합니다. 악의 연대를 굴복시키고 정의의 깃발을 세우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 욕망이 들끓고 있는 현상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정의의 깃발이 영원히 펄럭이는 날은 없습니다. 영원한 정의의 깃발보다 오늘 나는 정의를 위한 한 과정을 실천하는 것이 곧 정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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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처절하게 절망 속에서 꽃을 피웁니다. 절망의 끝은 희망의 시작입니다.>

 

정의는 마치 모자이크 그림과 같습니다. 정의의 정신으로 오늘 내가 이룬 작은 점들이 모여 이 세상에 그만큼의 정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림 전체의 50% 이상이 정의라면 비교적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영원한 정의의 깃발을 꽂겠다는 목표를 가지면 우리는 실망하고 지치고 결국은 정의를 포기할 지도 모릅니다. 정의로운 세상은 과정이지 목표가 아닙니다. 이 엄연한 진리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희망이 생깁니다.


지인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유학 시절에 타던 차를 친구에게 팔면서 잔금 1,000달러를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친한 사이라서 알아서 주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계속 주지 않고 딴청만 피웠답니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는데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신경이 쓰이고 화가 나고 이상야릇한 감정 때문에 괴로웠답니다. 이런 고민을 후배에게 털어놓으니까 10년이나 나이가 어린 후배가 이렇게 이야기해주었답니다. “언니, 1,000달러에 언니의 평화를 사버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찜찜한 감정이 일시에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역시 그 사람은 그 이후로도 1,000달러를 주지 않았고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불의한 상황에 그것을 받겠다고 인간관계를 깨치고 마음의 상처를 받는 선택보다 그는 하늘나라를 택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평화를 사는 일이 가능한 세계를 말합니다. 국정농단의 시국에서 정의를 사듯이 우리 일상에서 평화도 사고, 나눔도 사고, 용서도 사는 세계가 바로 하늘나라의 세계입니다. 1,000달러, 정의를 향한 촛불집회, 나눔을 위한 돈, 용서한다는 말 등은 물질 내지는 인간의 오감으로 감지되지만, 평화, 정의, 용서 등은 정신세계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통해 정신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데 이런 삶을 하늘나라라고 할 것입니다.


정의로운 사회에 근거해서 희망을 두는 일은 무엇보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희망이 되고 이 과정이 바로 하늘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희망은 여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다 갖추어진 상황에서 희망을 꿈꾸는 것은 어쩌면 비현실적입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런 사회는 형성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망가지고 흐트러진 이 사회에서 나름의 정의를 만드는 과정에 서 있는 것이 희망을만드는 것입니다. 정의를 만드는 작업은 불의한 사회의 한편에서 어느 때는 호롱불로, 어느 때는 LED로 불을 밝히는 것과 같습니다.


희망은 처절하게 절망 속에서 꽃을 피웁니다. 절망의 끝은 희망의 시작입니다. 모든 국민이 상처받은 현실 속에서 절망의 끝을 체험했습니다. 아무리 우리나라 현실이 절망적이어도 내가 지금 여기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을 시작하면 희망이 생깁니다. 비록 그 사랑이 하찮은 것이라도 그것이 세상의 권력과 재력을 초월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희망을 만듭니다.


욕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오늘도 세상을 달려갑니다. 이 전차에 우리는 모두 선택의 여지 없이 타고 갑니다. 그러나 그 열차 안에서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한 우리는 희망 할 수 있습니다.

 
필자약력 _ 율전동성당 주임신부, 인계동성당 주임신부, 별양동성당 주임신부, 6·15 남북공동성명 준비위원회 공동대표 및 대변인,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음화 국장, 점동성당 주임 역임, 現 광명성당 주임신부, 장애우 어린이합창단 에반젤리 공동대표
주요 저서 : 《신들의 수다I》, 《홍창진신부의 유쾌한 인생탐구》


<월간 신용경제 2017년 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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