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이 본 뉴스
등록된 기사가 없습니다.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밀라노에서 피사 그리고 로마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있었다
신용경제 2017-02-03 14:43:42

아침 식사는 프랑스의 파리에서, 점심은 스위스 빌더스빌에서 저녁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참으로 다채로운 유럽의 하루였다. 이른 새벽부터 세 나라의 도시가 아닌, 한 도시의 개성이 다른 세 마을을 돌아본 기분이다. 우리나라는 북으로는 북한으로 막혀 있고, 삼면이 바다에 둘려져 있어, 다른 나라로 나가는 일이 평생에 몇 번 오지 않는 기회인데, 유럽은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라도 여러 나라를 돌아볼 수 있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98.jpg

 

세계 최초 건설된 이탈리아 A1고속도로


밀라노는 이탈리아 제2의 도시이자 경제,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는 세계 패션산업의 본고장이다. 패션의 도시인만큼 이탈리아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신사 숙녀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밀라노 패션은 파리보다 앞서 있으며, 색채에 대한 감각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손꼽힌다. 이는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미쳐 의상 디자인을 포함한 자동차와 신발, 가구 등의 디자인에서도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른 아침 산책에 나서니 깔끔한 수영장과 넓은 뒤뜰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어 말라버린 고목마저도 운치가 있어 보였다. 호텔 주변의 옛 마차들도 분위기를 더해 더욱 멋스러워 보였다. 호텔을 벗어나자 전날 밀라노의 복잡함과 달리 시원스럽게 곧게 뻗은 길과 곱게 높이 자란 가로수들에 눈길이 갔다. 밀라노 중심지가 아닌 변두리 주택가를 거닐어 보는 것도 한순간의 추억이 되었다.

 

99.jpg

 

일행을 태운 차량이 호텔에서 나와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가이드는 세계 최초로 건설된 고속도로는 이탈리아 A1이고, 우리나라 고속도로는 이탈리아 고속도로를 벤치마킹한 것이라 설명하였다

 

아마도 필자의 시야에 보이는 고속도로의 모든 것(경계선, 추월선, 도시명 표지석 안내판 등)들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던 것은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마치 KTX의 원조인 프랑스의 TGV를 탈 때 느꼈던 편안함이 있었다.

 

A1고속도로는 무솔리니 때 건설된 것이다. 무솔리니는 쿠데타로 집권한지 2년 뒤, 1924년에 고속도로를 건설하여 1935년까지 500km를 개통시켰다. 나폴리에서 밀라노까지 남북으로 달리는데, 1933년 히틀러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그는 A1고속도로를 주행하고서 ‘태양의 도로’ 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영감을 받은 히틀러는 독일에 돌아가 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하여 프랑크푸르트에서 다름슈타트까지 구간을 1935년에 개통했다. 이것이 속도 무제한으로 유명한 독일의 ‘아우토반’ 최초 구간이다

 

100.jpg

 

히틀러는 총연장 1만4천km를 목포로 하여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건설이 중단될 때까지 약 3,860km를 완성했다. 히틀러는 1930년 경제 대공황을 염두에 두고 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했다. 그 결과 실업이 줄어들었고 히틀러의 인기는 치솟았다

 

역사를 더듬다 보니 버스는 추월함이 없이 주행선으로 편안하게 남쪽을 향하며 달려가고 있다. 차창 밖으로 아름다운 주택들이 그림처럼 줄지어 우리는 반기는 듯하다. 이탈리아 주택은 대부분 사각형 모양으로 우리나라의 조그마한 연립주택 같은 모습이다. 집들의 색깔도 거의 비슷하게 연한 베이지색 물감으로 칠한 듯 단정했다. 그래서 그런지 별로 낯설지 않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중간에 휴게소는 우리의 휴게소와 좀 다른 모습이었다. 꼭 시내에 있는 대형마트처럼 꾸며져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종종 도시가 산 정상에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도시국가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고대의 전통과 적들의 침입을 피하기 위하여 지내다가 현재까지 그대로 그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산 아래의 밭에는 올리브나무, 포도, 감자, 밀, 호밀이 지천에 널려 있어 풍요롭게 느껴졌다

 

특히 고속도로 주변에는 올리브나무가 많이 보여 멀리서 보니 사시나무처럼 희끔하게 보이는 잔잔한 잎들이 우리에게 이별의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3시간 30분을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이 그 유명한 피사다.

 

101.jpg

 

한때 해상강국이었던 피사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도시인 피사는 북쪽으로 세르키오 강, 남쪽으로는 아르노강 사이에 있어서 토지가 비옥하고 물자가 풍부하다. 현재는 인구 8만 명 남짓한 작은 관광도시지만 10세기 무렵에는 막강한 해군함대와 상선을 가진 해상강국으로 명성을 떨쳤다.

 

피사의 대성당은 1063년 시칠리아 북쪽팔레르오에서 벌어진 해상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지은 것이다. 이때는 제국이 용맹을 떨치던 시기였으니 피사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북서쪽에 자리한 제노바 공화국의 전투에 패하면서 종말이 시작되었다. 결국, 1406년 피렌체공화국에 정복당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게다가 오랜 세월 아르노 강 상류에서 내려온 퇴적물이 쌓여 거대한 삼각주가 생기자 큰배들은 이르노 강을 따라 피사로 올라올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항구로서의 수명도 다하였으니, 강력한 해상강 피사는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102.jpg

 

전 세계 여행자들은 호기심을 가득 안고 아르노 강가에 자리 잡은 피사로 몰려온다. 그 이유는 건축의 걸작이자 기운 모양으로 유명한 ‘피사의 사탑’ 때문이다

 

일행도 중앙역 버스터미널에 내려 구시가지 방향으로 20여 분 걸어가 아르노 강을 건너는 다리를 만났다. 다리를 건너자 가리발디 동상이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썰렁한 광장이 나왔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를 부지런히 앞서가는 사람들과 약속이나 한 듯이 한 방향으로 곧장 걷는다. 지도를 볼 필요도 없이 그렇게 그들을 뒤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비현실적으로 기운 피사의 사탑이 고개를 쑥 내밀고 멀뚱히 쳐다본다.

 

식사 후 바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대성당, 세례당과 함께 이 광장 안에 있는 사탑을 보기 위해서이다. 물밀듯 구경 온 사람들의 틈에 끼어 아치형으로 뚫린 조그만 성문을 지나니 미라콜리 광장이 나왔다. 눈부신 연둣빛 잔디밭 위로 원기둥, 사각기둥, 구와 같은 입체도형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례당과 대성당 뒤로 보이는 사탑은 건물이 아니라 돌로 만든 입체도형 표면에 조각을 한 작품 같았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인지 너무도 깔끔해서 천 년 가까이가 된 건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잔디밭과 널찍한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103.jpg

 

피사의 탑과 두오모 성당


가장 먼저 간 곳은 피사의 탑이었다. 광장이 좁다 보니 어디를 가나 탑이 보이고 그쪽으로만 눈길이 간다. 탑이 기울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바로 옆 성당이 기운 건 아닌지, 내가 삐딱하게 보는 건 아닌지 순간순간 의심이 들었다.

 

‘여기에서 꼭 기념사진을 남겨야지’라며 다짐하는 순간 왁자지껄하는 소높이에 이르렀을 때, 지반이 내려앉아 공사를 중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탑을 건축했던 곳이 모래로 된 약한 지반이었고, 토대를 3m밖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단된 공사는 재개되어 1350년 완공되었다. 하지만 완공된 뒤 1년마다 1mm 정도씩 기울어지기 시작한 피사의 사탑은 지금은 5.5도 기울어진 석탑이 되었다. 이렇게 기울고 무너지지 않는 신기함 때문에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될 정도였지만, 이대로 계속 기울어지면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 때문에 1990년 마침내 붕괴 위험에 직면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즉시 관광객 출입을 금지하고 10년에 걸쳐 2천400만 달러라는 예산을 들여 보수공사를 했다. 이후 2001년부터 다시 일반인에 공개하였다. 사탑은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지만 여전히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사탑에는 한 번에 40명씩만 입장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사탑에 들어가려면 예약해야 한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1068년 건축을 시작해 약 50년에 걸쳐 완공된 두오모(성당)다. 두오모는 피사 로마네스크 양식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특히 4개의 기둥과 조각으로 장식된 정면의 모습과, 입구로 사용되고 있는 보난노 피사노의 문은 이탈리아 로마네스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4개의 기둥과 조각으로 장식된 정면의 모습과 입구로 사용되고 있는 보난도 피사노의 문은 이탈리아 로마네스크의 대표작이다. 내부에 있는 조반나 피사노의 설교단은 여섯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설교단 앞에는 갈릴레이가 19세에 진자의 원리를 발견한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갈릴레이의 램프’ 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19세 되던 해보다 몇 년 뒤에야 램프가 설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피사의 사탑과 두오모 세례당은 두오모 광장 한 곳에 모여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세례당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12~15세기 때 지어진 것으로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내부에 있는 세례반은 세례를 받을 때 몸을 물에 담그기 위해, 예수의 생애와 최후의 심판이 묘사되어 있다. 세례당근처에 있는 납골당은 1278년 시모네에 의해 만들어진 대리석 건물로 건축을 위해서 팔 프레스코화가 있으며, 특히 작자 미상의 ‘죽음의 개선’이 눈길을 끈다.

 

104.jpg

 

로마로 향하다


로마로 가기 위해 다시 A1고속도로를 탔다. 아침에는 밀라노에서 피사까지 오후에는 피사에서 로마로 간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도로와 함께 뻗어 나간 로마제국은 기원전 312년부터 약 700년 동안 영국, 북아프리카, 중동까지 총 85,000km의 고속도로망을 건설했다. 오는날 유럽의 주요 도로는 이 시절에 만들어진 로마 도로를 따라 만들었고,그중 일부는 여전히 사용 중이라고 한다. 로마인들은 도로가 제국의 유지 와 확장에 핵심이라고 여기고 도로를 4년에 걸쳐 닦았다고 한다. 대략 1,600km, 1년에 400km를 건설했다. 매년 서울에서 부산 거리의 도로를 건설한 셈이다. 경부고속도로가 2년 5개월 만에 완공된 것과 과거임을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속도이다.

 

고속도로 주변의 산과 밭은 우리나라와 너무 흡사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우리와 달리 북쪽은 평야이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산악지대라 한다. 피사에서 로마까지 평야지대를 달려온 셈이었다. 무려 4시간을 운행 끝에 로마 근처에 왔는지 인근 도시의 야경이 아름다웠다.

 

로마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조용한 피지(Fiuggi)의 호텔을 숙소로 잡고 화려했던 과거 로마의 영광을 만날 기대를 하며 잠자리를 청했다

 

105.jpg

<월간 신용경제 2017년 2월 호>

디지털여기에 news@yeogie.com <저작권자 @ 여기에. 무단전재 -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