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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 바티칸 시티와의 만남
신용경제 2017-03-02 16:43:54

11.jpg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드디어 로마로 향했다. 로마에서 먼저 들른 곳은 바티칸 시티다. 이곳에 있는박 물관은 조금만 늦어도 대기시간이 1시간을 훌쩍 넘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이른 아침 한 시간 남짓 달려 바티칸 시티에 도착하니 관람객들이 입장하려고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일행은 사전 예약을 하고 일찍 도착하여 정문 바로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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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급 규모의 바티칸 박물관


정문 왼쪽으로는 미켈란젤로, 오른쪽에서는 라파엘로 상이 일행을 반겼다.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에 티켓을 받아 보이면서 보안 검색대를 지나니 박물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에 티켓만 보이면 되는데, 유럽은 테러의 위험 때문인지 입장할 때 비행기를 타듯 경계가 삼엄했다.


바티칸 박물관은 18세기 후반 역대 교황이 바티칸 궁정을 개조해 일반에 공개한 것으로, 런던의 대영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교황의 권력이 극에 달했던 16세기 초,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바티칸을 세계적인 권위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예술가를 로마로 불러들여 그들에게 궁전의 건축과 장식을 맡겨 오늘날 바티칸의 기초를 다졌다. 그 후 600년에 걸쳐 전 세계의 명작을 수집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곳은 한자리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이집트의 예술품에서부터 현대미술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박물관이라고 한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건물 너머로 성 베드로성당의 빛바랜 돔이 빠끔히 일행을 지켜보고 있다. 회화관 앞 솔방울 정원의 설명이 적혀 있는 안내판 앞에서 가이드로부터 30여 분간 대략적인 설명을 듣는 동안, 가까이 다른 가이드가 많아 주변이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설명을 듣고 바로 앞 건물 피나코테카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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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미술관의 최고봉 피나코테카와 시스티나 성당


피나코테카는 비오 6세 시대부터 수집한 미술품을 전시하기 위해 1931년에 건축한 미술관이다. 16개의 전시실에 중세부터 19세기까지 연대순으로 전시되어 있어 종교미술의 변천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의 모든 미술관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 방대한 미술품을 소장하다 보니 복도까지도 오래돼 보이는 조각들이 손에 닿는 곳에 널려 있다. 이 전시실에 대표작으로는 라파엘로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은 그의 사후에 발견되어 장례식장을 장식하였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변모>다. 이 작품은 다른 화가의 작품이나 모방하며 자신의 화풍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던 라파엘로 자신의 신앙고백이라고 여겨지는 작품이다. 이 그림 양옆에 전시된 <성모 대관>, <폴나뇨의 성모>도 라파엘로의 작품이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완성 <성 재롤라모>와 카라비조의 <십자가에서 내리심> 등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여러 전시실을 지나 발길을 멈춘 곳은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그려져 있는 시스티나 성당이었다. 너무도 유명한 작품이라 어딘가에는 존재하려니 생각만 했지 바티칸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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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들어서자 발 디딜 틈 없이 빽빽이 들어찬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유명한 작품의 인기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고 있어 나도 모르게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천지창조>하면 비스듬히 앉아 있는 아담에게 손을 뻗고 있는 하나님 그림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 중 일부일 뿐이다. 미켈란젤로가 4년 동안
이나 그렸다는 작품은 길이 40.93m, 폭13.41m, 그리고 높이가 20.7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성당의 천장을 계속해서 보기에는 어려워 책을 찾아보았다. 거대한 그림에는 여러부분으로 나누어 성서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었다. 작품에는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홉 장면이 이어진다. 이 장면들은 또다시 세 점씩 묶음으로 나뉜다. 첫째 그룹은 천지창조 (빛과 어둠의 분리, 해와 달의 창조, 바다와 육지의 분리), 둘째는 아담과 이브가 창조된 뒤 그들이 타락하여 낙원에서 추방되는 장면, 마지막 세 장면은 노아의 이야기(노아의 제사, 홍수와 노아의 방주, 술 취한 노아)를 다루었다.


마켈란젤로는 <천지 창조>를 완성하고 20년 후인 1553년, 당시 교황 클레멘데 7세의 부름을 받고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되었다. 중앙에 그리스도와 마리아가 있고, 그들을 중심으로 위쪽은 천당, 아래쪽은 지옥으로 표현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림에서 인간적인 고뇌, 천재의 외로움, 예술가로서 깊은 고뇌에 빠진 자신의 초상을 작품 속에 그려 넣었다. 자신을 껍질이 벗겨진 인간으로 표현하여 철저한 자기반성을 내보였다고 한다.


최후의 심판은 마리아를 제외한 모든 인간을 완전한 나체로 그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기도를 위한 경건한 성당 벽이 나체 그림으로 가득했으니 성직자들만 놀랐겠는가. 당시 정서로 볼 때 성화를 나체로 표현한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교황 파우스 4세는 그림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비속한 것은 가려야 한다’는 칙령을 반포하여 등장인물의 나체에 덧칠을 시켰는데, 이 작업은 미켈란젤로의 제자였던 볼테라가 극히 적은 부분만 수정했다. 그는 이 일로 기저귀 화가라는 놀림을 받다가 스승의 작품을 망쳤다는 자책감과 사람들의 놀림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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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터널처럼 긴 복도를 지나 라파엘로의 방에 들어갔다. 이 중에서도 율리우스 2세가 서재로 쓰던 ‘서명의 방’에는 철학, 신학, 법, 예술을 주제로 한 4개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1511년에 완성된 <아테네 학당>은 철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그리스와 로마를 찬미하였던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화가 라파엘로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 라파엘로가 이 벽화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남기지 않아 논란이 되는 인물도 있지만, 대체로 각자의 철학적 특징이 나타나도록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인지 한 명 한 명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림 중앙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나오는 두 인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의 왼손에는 자기의 철학 사상을 대표하는 ‘티마이오스’를 들고 집게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정신적인 이데아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주 저서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대지를 가리키며 자연과 생물의 관찰에 대한 중요성을 암시한다.


플라톤 옆에는 무언가를 열심히 설파하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보이며, 두 철학자 앞의 계단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반라 노인이 유명한 철학자 디오게네스이다. 필자가 10여년 전 그리스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보았던 옛 선인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보니 옛 친구를 만나듯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박물관에서 산 피에트로 성당으로


박물관에서는 바티칸의 역사와 유적들을 시스티나 성당에서는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아테네학당을 보았다.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성당에 들어가기 전 바티칸 시티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로마 교황청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중심으로 세속적인 주권국가로서는 바티칸 시티라 불린다. UN에는 가입되어 있지 않지만, 독립주권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로 면적은 0.44㎢며, 인구는 1,000여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중세 이후 이탈리아 중·북부에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던 교황청은 1870년 통일 이탈리아의 국왕인 비토리오 임마누엘 2세가 로마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수도를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김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로마 교황은 바티칸 궁에 칩거하면서 이탈리아 왕과 반목을 거듭했다. 1929년 교황 비오 11세는 이탈리아 정부를 대표하는 무솔리니와 라테란 조약을 맺음으로써, 60여 년간 이어오던 교황청과 이탈리아정부 간의 분쟁을 마무리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유명한 성당 가운데 하나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포한 이후 사도 베드로의 무덤이 있던 언덕 위에 세운 성당을 천 년이 지난 1506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의 명에 따라 증·개축하기 시작해 1626년에 완공하였다.


브라만테의 주도로 시작한 성당의 건축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를 거쳐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내부의 주요 작품들은 최고의 건축가 베르니니가 담당했다. 건축 당시에는 성당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발급하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켰고 이 일은 결국 종교개혁을 부르는 신호탄이 되었다고 한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 내부로 들어섰다. 이전에 많은 성당을 가봤지만 규모면에서 화려함과 웅장함이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그곳에 들어서자 오른편 유리 벽 너머에 <피에타>가 있다.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24세 때에 만든 조각상으로 그를 세상에 널리 알린 작품이다. 죽은 예수를 품에 안은 어머니 마리아의 처연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살짝 오른쪽으로 기운 성모 마리아의 자세, 힘이 빠져 축 늘어진 예수, 돌을 깨고 갈아서 만든 것이라 믿기 어려운 사실적인 표정과 근육, 세세히 뜯어볼수록 감탄하는 미켈란젤로의 이 조각품은 베드로 성당의 백미(白眉)로 꼽히고 있다.

성당 한쪽 구석에 있는데도 사람들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는 동상이 성베드로 상이다. 성당을 방문하는 신자들이 이 동상의 발을 만지면서 기도하기 때문에 발이 반질거린다. 성 베드로 이름은 반석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를 만지면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자의 발을 문지르면 행운이 온다는 말로 번져 그 누구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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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


아침 일찍부터 박물관, 시스티나 성당, 대성당을 둘러보고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따가운 햇살과 광활한 광장이 두 팔을 벌리고 반기고 있었다.


바르크 시대 거장 조각가인 베르니니가 1656년부터 12년에 걸쳐 만든 광장이다. 광장은 길이 340m, 너비 240m 타원형과 사다리꼴이 이어져 있으며 베드로가 예수께서 받았다는 천국의 열쇠 형상을 하고있다. 혹자는 이것을 팔을 벌려 사람들을 감싸 안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형상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타원형 광장 중앙에 서 있는 높이 25.5m 오벨리스크는 37년 칼리굴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실어와 경기장을 장식했다가 185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널따란 광장에 우뚝 서 있는 오벨리스크의 자태는 웅장하지만, 그 역사를 되새겨 보면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전쟁 포로처럼 끌려와 광장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 약탈당한 우리나라 문화재 역시 이역만리 타국에서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겠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유럽의 박물관은 그들의 문화유산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희생이 뒤따른 권력자들의 수탈 흔적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을 여행하면 거대한 문화유산에 강력하지만 씁쓸한 아름다움의 잔상이 오래 남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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