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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이야기
신용경제 2017-04-03 15:04:40

 

유럽의 도시 가운데 개성이 뚜렷한 세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영국의 런던과 프랑스의 파리 그리고 이탈리아의 로마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세 도시는 전통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각각의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로마는 유구한 역사에서 알 수 있듯 아주 오랜 기간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음악, 예술, 문학의 무대로 등장하여 강렬한 이미지를 심었다.
로마에 들어가기 전 역사를 먼저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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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와 함께 시작된 이탈리아
이탈리아는 로마의 건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753년에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되었고, 기원전 510년부터는 왕정을 폐지하고 귀족이 주도하는 공화제를 시행하여 그 세력을 키워갔다. 그 뒤에는 공화정이 쇠퇴하고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잡으면서 로마는 기원전 27년부터 황제의 시대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력한 황제의 통치하에 번영을 누리며 유럽과 북아프리카까지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점차 쇠퇴하면서 330년에 로마는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나뉘게 되고 서로마 제국은 476년 멸망하였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이탈리아반도는 중세 시대를 거쳐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유해진 베네치아, 피렌체와 같은 도시 국가들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도시 국가들은 14~15세기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어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자 그동안 무역을 독점하여 세력을 키워온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에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사상이 전파되어 이탈리아에서도 외세로부터 독립된 국가를 세우자는 자각이 일어났다. 1861년에는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왕국을 세우고 가리발디에 의해 1870년에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나라는 통일을 이루었지만 안타깝게도 각 지방의 이탈리아인들은 통합되지 못하여 경제침체까지 심해지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 시기에 무솔리니가 등장해 파시즘과 제국주의를 내세우면서 히틀러와 손을 잡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가 패하였다.
무솔리니가 체포되고 파시스트당이 붕괴하면서 1946년에 이탈리아는 국민 투표를 통해 정치 체계를 공화국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1948년에 현재의 체제인 이탈리아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도시 전체가 열린 박물관
도시 전체가 역사의 현장이라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돌덩어리 하나까지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진귀한 유물이 될수 있다. 미술사에 등장하는 대예술가들의 작품들이 미술관뿐 아니라 로마 거리곳곳에 숨 쉬고 있으니 말이다. 제한된 일정으로 인해 로마를 효율적으로 보고자 널리 알려진 명소에 초점을 맞추어 탐방을 이어나갔다. 테베라 강
너머에 있는 베드로 대성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내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서 많은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첫 목적지는 바로 ‘진실의 입’이었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의 입구에 있는 ‘진실의 입’은 강의 신인 ‘홀르비오’의 얼굴을 조각한 것이다.
원래는 로마 시대 하수로를 덮는 뚜껑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곳은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출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을 통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찾아가 보니 역시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이 둥근 대리석판의 지름은 사람의 키와 맞먹는 약 175cm이고, 두께는 약 20cm이다. 언뜻 보기에 괴물의 조각은 사자처럼 생긴 얼굴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기나긴 세월의 흐름 속에 닳고 닳아서 반들거리는 표면에 두 개의 뿔이 있었던 것 같은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 입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은 족히 100여 명은 되는 듯했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진실의 입에 손을 넣을 순서가 됐다. 진실의 입은 중세 때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심문을 받는 사람의 손을 입 안에 넣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손이 잘릴 것을 서약하게 한 데서 ‘진실의 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차가운 입에 손을 넣으면서 순간적으로 진실이 입이 닫히면 어떻게 될까 상상을 해보았다.
로마의 7대 언덕 중 하나인 카피톨리니 언덕에 있는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향했다.
고대 로마 시대의 로마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던 주피터 신전이 있는 곳이다. 폐허와 다름없던 이곳이 르네상스 시대부터 복구되면서 미켈란젤로가 건축을 맡아 황량하던 광장을 지금처럼 활기차게 바꾸어놓았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난 곳으로도 손꼽히고 있으며, 광장에서 이어지는 계단 역시 그가 직접 디자인했다고 한다. 광장을 바라볼 때 정면에 있는 건물이 시청인데, 시청사를 중심으로 정확한 대칭을 이루며 콘세르바토리궁전과 누오보 궁전이 있다. 이 두 궁전은 현재 카피톨리니 박물관으로 사용되면서, 고대 로마의 조각품 다수와 회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 있는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은 현대적으로 복제되어 서 있는데 원본은 이 박물
관 내에 있다.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 시대의 민주 정치와 상업, 법률의 중심지로 여러 황제를 거쳐 오면서 발전했지만, 5세기경 로마가 분열되면서 이곳 대부분의 건물이 훼손되었다. 얼핏 보면 폐허와 같은 모습이지만, 여러 시대를 거쳐 온 다양한 시대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어서 천천히 걸으며 감상해보았다. 포로로마노는 지금도 발굴 작업과 복원 작업이 계속되고 있어 예전의 번성했던 로마의 모습들을 엿볼 수 있는 장소로서는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크 양식의 트레비 분수와 로마에서 가장 낭만적인 스페인 광장
다음은 세 갈래 길이 합류한다는 뜻을 지닌 트레비 분수를 찾았다. 광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분수는 후기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써 로마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로마에는 크고 작은 분수대가 많은데, 르네상스 시대에 교황들이 고대 로마 제국의 상수도 시설을 보수하고 추가로 건설하여 물 공급이 원활해지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많은 분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분수대의 중앙에는 바다의 신 ‘넵튠’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주변으로 반인반어의 해신 ‘트리톤’이 있다. 한 트리톤은 해마를 길들이고, 다른 한 트리톤은 동물을 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었지만, 바로크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이 살아 있어 로마의 분수 중 가장아름다운 분수로 손꼽히고 있다.
예전 로마 제국에서는 전쟁터로 간 애인의 무사귀환을 기도하며 이곳에 동전을 던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어져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로마 여행 중에 꼭 들러 동전을 던져보는 이벤트를 갖는다. 분수를 등지고 동전을 하나 던져 들어가면 로마에 다시 돌아오고, 두 개가 들어가면 운명의 사랑을 만난다는 속설이 있는데 던져진 동전은 각종 국제빈민 구호 단체 등에 보내는 기부금으로 사용된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몸을 뒤로 돌려 동전을 휙 던지니 ‘퐁’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동전 속에 묻혔다. 뭐가 이뤄지지 않는데도 선한 일을 한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17세기 교황청 스페인 대사가 이곳에 본부를 두면서 스페인 광장으로 불리게 된 이곳은 영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이 광장의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이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없다. 유적의 보존을 위해 주요 관광지에서의 음식물 섭취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스페인 광장과 성당, 유명한 스페인 계단은 오래전부터 외국인이나 이탈리아인 모두에게 중요한 만남의 장소이다.
또한, 계단을 마주 봤을 때 오른쪽에 붙은 집이 하나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영국의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1795~1821)가 생애의 마지막 석 달을 보냈다는 집이다.

 

키츠와 셀리의 기념관을 찾아가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는 바이런, 셀리와 함께 영국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3대 시인으로 꼽힌다. 키츠는 시적인감성이 아주 풍부하고 뛰어난 시인이었음에도 1821년, 안타깝게도 불과 25세의 나이에 이곳에서 폐결핵을 앓다 죽었다.
‘키츠와 셀리의 기념관’은 키츠와 셀리와 관련된 기념품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희한한 점은 이곳에서 또 다른 영국의 천재 시인 퍼시 비취 셀리 (1792~1822)는 살았던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절친한 친구로서 그와 같은 공동묘지에 묻혀있다는 점을 이유로 이곳을 ‘키츠와 셀리의 기념관’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키츠는 대표 시인답게 그의 묘비명에 관한 독특한 일화가 남아 회자되고 있다. 키츠는 죽기 직전, 함께 로마에 왔던 절친한 친구 셰번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내 묘비에 이름을 적지 말아줘”라며 자신의 묘비에 이름 대신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사람이 누워 있노라’라고 써달라고 부탁한다. 물 위에 쓴 글씨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었던 것일까?
셰번은 그의 유언대로 키츠의 묘비에 그의 이름은 적지 않고 그가 부탁했던 글만 새겨 준다. 그러나 스스로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사람’이라고 했던 키츠의 이름은 물 위에 글씨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백 년 가까이 되고 있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시인 키츠를 기억하며, 그가 남긴 시들을 사랑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 콜로세움
콜로세움에 앞에 도착하니 피를 부르는 함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거대하다는 의미가 있는 이름처럼 다 허물어진 원형 경기장이지만 그 웅대한 자태만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타원 모양의 4층짜리 고대 로마의 경기장으로써, 우리나라 숭례문처럼 도로 한가운데 있지만 엄청난 크기 때문인지 훨씬 더 주변을 압도했다. 아치와 콘크리트를 이용한 고대 로마의 건축기술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약 2000년 전 세 개의 언덕이 서로 마주치는 곳에 세워진 콜로세움은 이제 원래 모습이 3분의 1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지금도 로마 시가지의 구심점을 이루며 과거 로마 제국의 위엄을 생생히 대변하고 있다. 콜로세움은 10년 전 새롭게 선정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콜로세움 주변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번잡했다. 마치 거대한 물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줄을 서서 콜로세움으로 입장하는데,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웅장한 규모에 묻혀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원형 경기장에 들어서니 벤허(1959), 글래디에이터(2000) 등의 영화를 통해 본 장면이 떠올랐다. 그 경기장에서 많은 맹수들과 검투사들이 맹렬하게 싸워 삶과 죽음의 극적인 장면들이 오버랩되었다. 그곳에서 희극과 비극을 즐기면서 관객들이 손뼉을 치고 환호하는 모습이 교차하면서 씁쓸함도 함께 밀려왔다. 지금의 모습은 관람석은 다 무너지고 다만 맹수들이 살던 우리만이 아래에 그대로 남아 찬바람만 휑하니 불었다.
이탈리아 로마를 둘러보니 유럽 전체 역사를 한눈에 보는 것만 같았다.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들이 마법에 걸려 살아있는 듯 자랑을 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비행기로 하늘을 가르며 날아와 유럽이라는 대륙의 조우, 옛 문화들이 그대로 숨 쉬고 있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하는 느낌이 드는 건 비단 나뿐일까. 지금도 가슴 속엔 로마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순간순간 행복한 추억으로 삶에 활력소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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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 김정일
DBS 동아방송(주) 상임고문,
중앙대학교 총동창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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