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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침략 속에서 아름다움을 지키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신용경제 2017-10-10 11:05:15

헝가리는 우리나라와 같이 1000년의 역사 속에 숱한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당하는 고난을 겪었지만, 여전히 그들만의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잘 지켜가고 있는 나라다. 동유럽에서도 특히 헝가리는 가장 발전되고 개방되어 있으며 여느 서유럽 국가와 같이 편리하게 여행할 수 있는 곳이다.

 

 

도나우 강을 사이에 둔 부다와 페스트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는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 강을 사이에 두고 언덕을 뜻하는 ‘부다’와 평지라는 의미의 ‘페스트’로 구분된다. 서울이 한강을 중심에 두고 강남과 강북으로 구분된 것처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언덕 위에 형성된 부다 지구에는 13세기부터 헝가리 왕들이 거주했던 부다 왕궁이 있어 귀족의 지역이라고 한다면, 페스트는 번화한 상업지로 서민들의 지역이라 할 수 있다. 1873년 이슈트반 세체니 백작에 의해 부다페스트로 통합됐고, 1849년 세체니 다리가 완성됨에 따라 도나우 강으로 나뉘어 있던 두 도시가 연결됐다.
두 지역을 각각 하루씩 둘러보았다. 첫째 날은 페스트 지역의 국회의사당, 성 이슈트반 대성당, 국립오페라 극장 그리고 영웅광장, 안드라시 거리를 거닐었다. 둘째 날은 부다 왕궁 주변과 어부의 요새 그리고 전망대로 유명한 겔레르트 언덕으로 계획을 잡았다. 페스트에 세체니 다리를 건너면 부다 지역이므로 그 다리는 직접 걸어서 건너갔다.
서울 한강의 다리와 같이 두 지역을 연결한 다리지만, 한강처럼 다리가 아주 길지 않아 충분히 걸을 만했다. 부다페스트의 랜드마크 세체니 다리와 언덕 위의 거대한 부다 왕궁세체니 다리는 1839년부터 10년 동안 지어진 다리다. 도나우 강에 있는 8개의 다리 중 가장 처음으로 만들어진 다리이자 가장 아름다운 다리다. 부다와 페스트 지역을 이어주면서 지금의 부다페스트로 통합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리의 양쪽 초입에는 네 마리의 사자 조각상이 있기 때문에 ‘사자의 다리’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사자 상이 한 덩어리가 아닌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돼 다시 이어 붙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세체니 다리의 아픔을 나타내고 있었다.
또, 사자상은 혀가 없다. 이는 왕족과 귀족들이 살던 부다 지구와 주로 시민들이 살았던 페스트 지역이 세체니 다리의 개통으로 왕래가 시작됐지만, 계층과 수준이 다르다 보니 불화와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서로 말을 조심하여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뜻으로 사자의 혀 없이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남북을 가르는 공동경비구역 서쪽에 흐르는 사천이 있다. 그 강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원래 이름은 널문다리)’가 있는데, 이들처럼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상징적인 ‘혀 없는 사자상’을 세운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세체니 다리를 건너자 어느새 부다지역에 도착했다. 부다 왕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길을 따라 언덕으로 걸어 올라가는 방법, 그리고 부다바리 시클로라고 불리는 일종의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부다 왕궁까지 멀지 않은 거리라 계속해서 걸어 올라갔다.
부다 지구 남쪽 167m 고도의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왕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마차시 교회, 어부의 요새, 왼쪽에는 겔레르트 언덕에 솟은 시타델라 요새가 펼쳐져 가장 부다페스트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먼저 찾은 곳은 부다 언덕의 남쪽 끝에 있는 왕궁이다. 벨러 4세 왕에 의해 13세기 후반 처음으로 지어졌다. 그 뒤 왕궁은 몽골군에 의해 파괴되어 15세기에 재건됐지만,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다시 파괴됐다. 이후에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왕궁은 막대한 피해를 당한 뒤 1950년대에 다시 세워져 현재의 모습을 유지한 상태로 헝가리 역사와 운명을 간직하고 있다. 굴곡의 역사를 겪으면서도 우아함을 간직한 부다 왕궁은 현재 국립 현대미술관과 국립 세체니도서관, 그리고 부다페스트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왕궁 내부는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지만, 역사박물관과 형가리 노동운동박물관, 국립 미술관은 관람할 수 있다. 역사박물관에는 파괴된 것을 복구하면서 발굴된 수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노동운동박물관에서는 헝가리투쟁 운동과 사회주의 아래의 헝가리 모습을 담은 역사적인 자료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헝가리의 역사를 모두 볼 수 있는 곳이 부다 왕궁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1956년 미완의 헝가리 혁명을 더듬어 보았다.

 

 

슬픈 미완의 헝가리 혁명 이야기
1956년 10월 공산 폭정에 대항한 헝가리 의거 소식은 당시 한국에도 전해졌다. 시인 김춘수는 ‘부다페스트에서의 어느 소녀의 죽음’이란 시에서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리며 투쟁한 헝가리 여대생들에 대해 ‘인간의 양심’이 이데올로기 앞에서 사라져버리는 세계사의 모순을 지적했다. 시는헝가리의 민주 항쟁을 찬양하고 그 실패를 어떤 소녀의 죽음에 비유함으로써 자신의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시의 배경이 됐던 당시를 보자. 1956년 10월 23일, 소련에 저항하며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치탄압의 종식을 요구하는 헝가리 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으로 수상에 취임한 너지 임레(Nogy Imre, 1896~1958)는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를 선언하고 脫소련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소련의 붉은 군대는 헝가리를 침공하여 수상을 처형하고 반공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 후 1980년대 후반에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재건, 재편의 러시아어)가 시작되면서 1991년에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함에 따라 헝가리는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왕궁 내 정원 입구에는 한쪽 발에 왕의 칼을 움켜쥐고 비상 직전의 청동 독수리상인 투룰(Turul)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이 투룰은 마자르족을 상징한다. 헝가리의 시조인 알모시의 어머니는 그를 잉태하고 하늘에서 날아온 투룰이 그녀에게로 들어가서 큰 샘이 솟아나 서쪽으로 흘러가면서 점점 물이 늘어나더니 물이 멈추고 물속에서 아름다운 나무가 자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헝가리의 최초의 왕조인 아르파트의 선조가 된 알모시를 낳았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이름에 ‘알’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서일까? 새와 연관이 있어서일까?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설화가 생각났다. 주몽은 알로 태어나 버려졌더니 개, 돼지, 소, 말은 피해 가고, 새들이 모여 날개로 덮어줬다. 나라를 세우려면 인간이 아닌자연의 힘이 보태져야 가능한가 보다.
유럽 속 아시아 마자르인 후손들이 영원히 빛나기를 기원하며 마차시 성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헝가리 국왕들의 대관식이 열렸던 마차시 성당
왕족과 귀족들이 많이 살았던 부다 지구는 페스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다. 그중 다른 성당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외관과 모자이크타일로 시선을 끄는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성당이 서 있다. 이곳은 헝가리 왕의 대관식과 결혼식이 거행된 곳으로, 성당의 원래 이름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었는데 1470년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비견되는 마차시왕의 명령으로 88m의 첨탑을 증축하면서 왕의 이름을 따서 마차시 성당(Matyas Tempolom)이라 붙였다고 한다.
아름다운 외관과는 다르게 마차시 성당도 수많은 역경과 아픔을 겪은 곳이다.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점령당했던 16세기에는 마치 터키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처럼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면서 성당 내벽에 프레스코화가 그려지는 종교적인 치욕을 겪었다. 하지만 17세기에 가톨릭 성당으로 환원되면서 모스코를 비롯한 이슬람의 장식과 그림들을 모두 철거하고 당시 유행했던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했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조선의 왕들이 사는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어 동물들을 사육시키고, 구경꾼들이 동물원을 구경하게 하면서 왕과 왕궁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치욕스러운 역사로 기록된 그곳은 모두 복원되어 다시 옛날의 창경궁의 모습을 되찾았다. 어느나라든 전쟁에서 승리하여 지배하는 쪽은 상대국의 역사를 짓밟기를 서슴지 않았다. 지배당하는 쪽은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지금도 세계는 강대국의 주도권 아래 역사가 움직이고 있다.

 

 

도나우 강을 지키는 어부의 요새
우리는 다시 왕궁이 있는 부다 언덕으로 향했다. 도나우 강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네오 고딕 양식과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되어 독특한 모양의 뾰족탑을 만나게 된다. 어부의 요새다. 마차시 성당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성곽이다.
처음 나라가 세워질 때 연합한 일곱 개 마자르 부족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고깔 모양의 탑이 있다. 유명한 어부의 요새는 부다페스트 시민의 휴식처이자 문화공간이다. 어부의 요새라고 부르게 된 이야기에는 두 가지가 전해져 온다. 하나는 중세 어부들이 길드를 조직하고, 이곳에 거주하면서 운영했던 생선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음은 부다페스트가 적의 침입을 받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도나우강가에 살던 어부들이이들을 방어하고, 도시를 자발적으로 지킨 것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다.
둘 가운데 좀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두 번째 이야기다. 어부의 요새는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된 건축물이다. 마차시 성당을 설계한 슬레크에 의해 1896년에 착공해 1902년에 완공됐으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위로 올라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내려다보는 도나우 강과 어우러진 페스트 지구의 전경은 매우 아름다워 그만한 값을 했다. 부다페스트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으로 손꼽히기도 하는 이곳은 특히 아름다운 야경을 보기에 최적의 장소로 알려졌다.
어부의 요새 뒤편, 정확하게는 마차시 성당 앞 광장의 한 가운데엔 왕관을 쓰고 십자가를 들고 있는 헝가리 초대 국왕인 성이슈트반 1세의 청동 기마상이 대리석으로 만든 단위에 자리 잡고 있어 위용을 과시한다.
치욕이라는 역사적 교훈, 시타델라 요새 파란만장의 역사를 가진 나라일수록 ‘치욕스러운 역사’,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무조건 부수고 없애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헝가리는 그것을 감추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있다.
시타델라 요새는 1850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립을 열망하는 헝가리인들을 감시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더구나 시타델라 요새의 동쪽 끝에는 야자잎을 치켜든 14m 여신상이 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물리친 소련군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공산정권이 무너진 후 치욕스러운 역사를 상징하는 두 건물을 철거하려 했으나 교훈으로 삼고자 그대로 남게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오랜 역사가 진행되어 왔다. 알게 모르게 외세의 침략으로 남은 흔적들이 많다. 일부는 정치적인 이유나 여론에 의해 해체하기도 했고, 일부는 현재 우리 문화와 어우러져 누구 것인지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삶에 스며든 것이 있다.
과거에는 침략이라는 피 흘리는 전쟁으로 이러한 문화의 융합이 발생했다면, 이제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더 빠르게 문화와 사상이 접목을 이루고 있다. 누구의 것이라고 할 것이 없게 된 것이다.
긴 역사를 짧은 며칠 동안의 방문만으로 통찰할 수는 없겠지만, 헝가리를 돌아보며 외침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생각하며 부다페스트를 떠났다.

 

 

 

글·사진 : 김정일
4.19 혁명정신 선양회 회장
사호선문학회(四護旋文學會) 고문
중앙대학교 총동창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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