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이 본 뉴스
등록된 기사가 없습니다.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우리도 콜럼버스 때문에 울고 웃었다?
신용경제 2017-02-02 13:17:27

지난 2015년 10월, 미국에서 콜럼버스 동상의 머리에 도끼가 꽂힌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들은 동상이 문화, 예술,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일종의 반달리즘의 대상이 되었다고 보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전후해 미국 내에서는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콜럼버스와 신대륙 발견’에 대한 역사 논쟁이 뜨거웠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신대륙이 아니라는 평가와 신대륙을 점령한 과정에서 벌어진 악행들의 이야기는 새삼스럽지 않지만, 우리 역시 지나간 그 역사 때문에 울고 웃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좀 새삼스럽지 않을까? 자, 그럼 새삼스럽지 않은 그 비극과 희극을 한번 살펴보자.

 

35.jpg

‘신대륙’과 ‘발견’이란 말은 다분히 유럽사적인 해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와 신대륙 발견에 대한 옹호의 주장이 아직까지 힘을 얻는 이유는 그의 항해로 유럽의 근대 문화가 아메리카 대륙에 꽃을 피울 수 있었다는 평가 때문이다. 물론 이 평가에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행한 수많은 약탈과 만행에 대한 인정과 사과가 필요하긴 하다. 그런데 이런 논란을 야기한 콜럼버스는 인도라고 믿었던 땅이 전혀 다른 대륙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점에서 ‘신대륙 발견’이라는 문제에서만큼은 억울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감안한다 해도 그의 항해를 시작으로 인류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극과 희극을 오락가락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가 야기한 불행은 역사 논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1492년, 콜럼버스는 식민지 건설에 혈안이 된 스페인의 여왕을 찾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 제국에 가는 항로를 개척하는 대가로 여왕으로부터 약속받은 것은 대양의 제독이라는 칭호와 문장이 박힌 덧옷 그리고 식민지 산업 이익의 10퍼센트였다. 스페인의 제안이 나름 만족스러웠던 콜럼버스는 의기양양하게 그들에게 금과 노예, 바다 건너 새로운 식민지를 약속하며 항해를 떠났다.

 

콜럼버스의 대항해는 스페인 제국의 화려한 개막을 알림과 동시에 유럽열강의 식민지 산업의 르네상스(Renaissance)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질병의 세계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에는 엄청난 수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하늘에서 총알이 쏟아져 내려오지 않는 이상 그 많은 원주민을 제거하기란 불가능했다. 제거는 고사하고 지배하는 것도 버거웠다. 정작 발견을 하긴 했는데 그림의 떡이었다.

 

36.jpg

 

총과 칼보다 더 무서운 콜럼버스의 무기?


해결의 실마리는 이상한 곳에서 풀렸다. 콜럼버스 일행에게는 총과 대포보다 더 쉽고 간단하게 신대륙을 정벌할 수 있는 무기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질병이었다. 탐험가와 군인들은 원주민들에게 생소한질병들을 가지고 신대륙에 입성했다. 그들과 함께 신대륙에 입성한 간염, 장티푸스, 홍역, 볼거리, 천연두는 원주민들을 초토화했다. 천연두는 군대가 총부리를 겨누기도 전에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프랑스와 영국이 북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는 천연두가 이들보다 먼저 도착해 원주민을 몰살시켰다. 아마도 천연두라는 병이 없었다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그렇게 쉽게 점령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에 도착하기 3년 전, 천연두가 원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을 학살해버렸기 때문에 이들은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쉽게 땅을 얻을 수 있었다. 총에 맞아 죽는 원주민보다 병에 걸려 죽는 원주민이 훨씬 많았다. 오죽하면 영국의 왕 조지 3세(George III)는 천연두를 일컬어 축복의 천연두라 했겠는가! 천연두는 인간보다 빨리 개척자보다 빨리 서부를 개척했다

 

콜럼버스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후 그 땅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던 원주민의 문화는 시들시들 사라져버렸다. 잉카 제국의 경우 너무 많은 사람이 천연두로 죽어가 미경작지로 남은 들판들이 넘쳐났고 더불어 굶주린 사람들이 병에 걸린 사람들보다 더 빨리 죽는 지경에 다다랐다. 이렇게 16세기 후반에 이르자 잉카의 인구는 콜럼버스 방문(?)을 기점으로 4분의 3이 줄어들기까지 했다

 

처음엔 개척자들도 이 같은 일들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이것을 기회로 삼았다. 영국 군대의 제프리 암허스트(Jeffrey Amhurst) 장군은 원주민에게 질병을 퍼트리기 위해 천연두에 오염된 담요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는 손도 대지 않고 대단한 전쟁을 벌이지 않고도 식민지를 개척하는 비열한 방법을 알았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시각으로 해석하려 해도 유럽을 제외한 비유럽 세력에게 콜럼버스의 항해는 좋게 해석할 수 없다. 과정에 어떠한 의도를 배제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가져온 결과가 너무 참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상륙작전이 인류에게 비극만 가져온 것일까?

 

37.jpg

 

밉다가도 먹다 보면 용서되는 콜럼버스?


다행스럽게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상륙작전은 인류에게 뜻하지 않은 기쁜 선물을 안겨주기도 했다. 아마도 수많은 미식가는 콜럼버스에게 얼마간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할지 모른다. 콜럼버스로 인해 사람들은 화려한 만찬을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바하마 군도에 들어선 순간천상의 맛을 경험했다. 콜럼버스는 신세계의 다양한 맛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는 이 경험을 “1,000 여종의 나무가 있고, 그 나무들에는 각각 열매가 달려있다. 그 열매들을 잘 모르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일지에 기록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진 못했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식탁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장이 아니라 뉴욕 타임스의 한 레스토랑 비평가의 말처럼 콜럼버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초콜릿을 먹지도 못했을 것이고 토마토소스가 없는 스파게티와 칠레 고추가 없는 인도 카레를 먹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감자와 바나나 토마토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콜럼버스는 신세계의 다양한 동식물을 가득 싣고 유럽으로 당당히 돌아왔다. 유럽은 이전에 맛보지 못한 새로운 맛의 세계를 경험하고 환호했다. 그리고 동서양 음식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주선하며 갖가지 퓨전 음식들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현상은 유럽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아메리카 대륙도 이 전에 맛보지 못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콜럼버스는 다양한 식재료를 가지고 스페인으로 돌아왔지만, 콜럼버스를 기다린 사람들은 아마도 꽤 당황했을 것이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당연히 인도에서 풍부한 향신료를 싸들고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백 여 년 동안 향신료는 온갖 분쟁의 원인이 됐다. 방부제와 식재료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에 향신료는 음식의 맛을 내는데 필요한 재료였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음식이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중세의 한 귀퉁이를 제외하고 오랜 세월 향신료만큼 절실한 음식 부자재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콜럼버스의 항해는 성공적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지금 콜럼버스 덕택에 세계의 음식이 만나 퓨전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만찬을 즐기고 있지 않나?

 

콜럼버스의 신대륙을 향한 가열 찬 발걸음은 질병이 지구의 모든 땅에 자유롭게 넘나드는 계기를 만들었지만,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식탁의 즐거움도 안겨주었다. 물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의모든 원주민을 살해한 것도 음식의 퓨전화에 앞장선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세계가 엄청난 변화를 겪은 것만은 사실이다. 어느 날 호기심 많고 도전 정신 강한 탐험가의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가면 낙원 같은 대륙이 나올 것이라는 믿음 하나가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든 것이다.

 

38.jpg

 

<월간 신용경제 2017년 2월 호>

디지털여기에 news@yeogie.com <저작권자 @ 여기에. 무단전재 -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