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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중독의 역사?!
신용경제 2017-07-10 15:48:59

 

마약은 의심할 바 없이 근절해야만 하는 사회의 악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선량한(?) 사람들은 자신과 마약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역사에서 마약이 차지하는 분량 역시 극히 일부분일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역사를 살펴보면 마약은 의외로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약의 변천사를 보면 우리 중 그 누구도 마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중독자다!

 

 

차라리 즐기기로 한 마약! 그래서 우리는 중독자?
“마약으로 취급되었던 물건들, 즉 다른 존재감을 맛보려고 마시거나 피우거나 코로 들이마셨던 것들은 역사적으로 교환과 소비에서 언제나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변한것은 이런 물건들의 상업적, 사회적인 가치가 아니라 ‘마약’의 정의였다”
케네스 포메란츠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中

 

그리 멀지 않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마약이라고 했던 것들이 너무 소프트해서 악의 축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것이 많았다. 반대로 지금 당연히 마약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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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금지해달라는 청원서 성 마이클의 골목 (Cornhill)에 1652 년에 문을 연 커피 하우스는 커피 하우스에 장시간 머무는 남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아내들의 표적이 되었다.>

 

원주민의 야만적인 연기라며 담배를 경계했던 유럽 사람들이 지사제로 쓰던 것이 바로 양귀비였다. 담배뿐 아니라 신대륙에서 가져온 많은 물품은 중독성이 강했다. 처음에는 수입을 금지하는 강경책을 썼던 유럽 각국도 눈에 띄게 불어나는 수요와 점점 어려워지는 단속을 감당하지 못하고 즐기는 쪽을 선택할 정도였다. 그중 가장 강력한 중독성을 가지고 유럽을 강타한 품목은 바로 커피와 차였다.
커피와 차는 원래 중동이나 중국에서 종교 수양을 하던 이들이 잠을 자지 않기 위해 마시던 음료였다. 하지만 유럽에 건너가서는 상류층이 즐기는 고상한 문화로 변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대중화되어 서민들의 음료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이 음료들의 강력한 매력에 중독된 사람들은 더 많은 커피와 차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됐다. 커피와 차가 재배되는 신대륙을 찾기 위해 용감하게 배를 집어타고 바다로 나간 이들은 원산지를 식민지로 만들고 서로 전쟁을 벌였다. 급기야 이것들을 더 쉽게 얻기 위해 중국의 아편전쟁처럼 원산지에 강력한 마약을 공급하기도 했다.

이들은 커피와 차는 물론이고 초콜릿, 담배를 얻기 위해 세상 끝까지 돌격 앞으로 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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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커피 하우스 풍경 _ 1663년까지 런던에 83개가 넘는 커피 하우스가 오픈할 정도로 남성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

 

잠이 아니라 가정을 깨는 마약?
커피에 대한 수요는 예나 지금이나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커피가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사랑받는 음료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가 배척받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역시 많지 않다.
커피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꽤 굴곡 있는 역사를 걸어왔다. 커피가 아라비아 반도에 도착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을 때도 지금과 같은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오랜 시간 명상하기 위해 각성 상태를 유지해야 했던 이슬람 사제들은 커피를 축복의 음료라고 찬양했지만, 강력한 중독성이 늘 못마땅했던 보수 세력들은 근절해야 할 악마의 음료로 보았다. 보수적인 지배층들은 커피가 인접 국가로 퍼질수록 탄압의 강도를 높였다. 아라비아 반도에선 커피 자루를 불태우는가 하면 터키에서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던져버리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탄압과 제재에도 불구하고 아라비아 반도 메카에서는 세계최초로 커피 하우스가 오픈했다.
커피를 열렬히 지지하는 층과 안티 층과의 각축전은 유럽대륙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베네치아 상인을 통해 유럽에 전해진 커피는 곧바로 유럽 남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영국 런던에선 남자들이 모여 커피 한잔을 마시며 정치, 경제,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커피하우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문제는 이 커피 하우스에 날마다 출근 도장을 찍어대던 ‘커피 하우스 죽돌이’들이도통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편들이 집보다 커피 하우스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내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커피 하우스 죽돌이’의 아내들은 커피가 천하고 검고 쓰고 냄새 고약한 시궁창 음료라고 주장했다. 아내들에게 커피는 악의 축이며 커피 하우스는 악의 소굴과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자들만큼 커피 하우스를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들이 또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여론이 형성되는 법이다. 커피하우스에서 곧 잘 벌어지는 정치적 논쟁이 늘 거슬렸던 영국 정부는 커피 하우스를 폐쇄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커피하우스 죽돌이’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아마도 프랑스 정부가 영국 정부만큼 커피 하우스에 민감했더라면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바스티유 습격 사건이 바로 이 커피 하우스에서 논의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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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에서는 카카오를 자양 강장제로, 아스텍에서는 신들의 음식이라고 여기며 제물로 바칠 만큼 신성한 열매였다>

 

원주민의 흥분제 카카오 vs 백인들의 달콤한 카카오?
커피만큼 마약의 잣대를 들이대기 민망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콜럼버스가 진짜 최음제라고 믿고 들고 온 이 열매가 아닌가 싶다. 죽을 때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라 믿었던 콜럼버스는 어느 날 신대륙에서 신기한 열매와 마주쳤다. 마야인들은 그 열매를 ‘카카와’라고 불렀고 아즈테카 인들은 ‘카카오’로 불렀다. 이 열매를 먹은 원주민들은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졌는데 주로 종교의식에 사용하거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이 사용했다. 이 독특한 열매는 원산지인 아메리카 대륙(남아메리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카카오는 매우 귀한 열매였다. 그 때문에 이곳에서 카카오는 화폐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원산지 중 하나인 아스텍의 왕조차 최음제로 사용했던 이 카카오가 유럽에 전해지자마자 금욕적인 음료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카카오는 효과만큼 맛도 좋았는데 옥수숫가루에 주로 넣어 먹던 카카오가 꿀을 만나면서 달콤한 카카오가 됐다. 이 달콤한 카카오는 중동에서 건너온 커피에 비해 덜 이교도적이었다. 곧바로 카카오는 가톨릭 사제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상류층의 음료로 자리 잡았다. 스페인의 좀 산다는 집에서는 카카오를 설탕과 계피, 뜨거운 우유에 타 마시면서 핫초콜릿을 즐기기도 했다.
이 달콤한 맛에 빠진 유럽인들은 급기야 이 나무를 전 세계에 심어 대대손손 풍족하게 즐기고 싶은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이 카카오나무를 아프리카 대륙까지 가져가서 심었다. 이제 카카오는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것이 아니었다. 대량 생산된 카카오에서 코코아라는 상품이 탄생하고 밀크 초콜릿이 등장하면서 카카오는 이제는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간식거리가 되고 말았다.
카카오의 역사가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좋다고 해야 할지 좀 더 건전한 방식으로 변한 것이 좋다고 해야 할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카카오의 대중화엔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역사와 동아시아, 아프리카의 식민지 역사가 맞물려 있다.
유럽의 폭발적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들 식민지에서 이루어진 플랜테이션 농업 때문에 수많은 원주민이 피와 땀을 흘려야 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누군가의 중독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지는 잠깐의 즐거움이라는 사실이 씁쓸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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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정
<물음표로 보는 세계사>,
<느낌표 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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