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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애매(?)한 그녀들의 드라마틱한 일생
신용경제 2017-10-10 11:06:36

엘리자베스의 삶에는 세계에서 자기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한 국민의 에너지가 구현되어 나타나 있다. 반면에 메리 스튜어트의 파국에는 화려하고 영웅적으로 죽어가는 기사도가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 싸움에서 각자 자신의 의미를 완성했다. 현실주의자인 엘리자베스는 역사에서 승리했고, 낭만주의자인 메리 스튜어트는 문학과 전설로 승리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메리스튜어트> 中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1553~1603년)

 

패배를 승리로 전환하는 타고난 위기관리 능력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발판을 마련하고 섬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대륙을 호령했던 여왕, 엘리자베스 1세.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태어나 강제 폐위라는 수모를 견디며 20여 년의 감금 생활 후 마지막에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던 비운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
빛과 그림자처럼 상반된 인생을 살다간 그녀들은 서로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운명을 안고 태어났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혈육 지간이기도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메리 스튜어트가 여왕으로 태어난 반면 엘리자베스는 왕가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공주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왕비의 시중을 들던 여관(女官) 앤에게서 태어났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인 헨리 8세는 왕비와 이혼하기 위해 바티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스스로 수장이 되어 영국 국교회를 세웠다. 헨리 8세의 과감한 연애질로 수많은 영국인이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파문당하고 헨리 8세와 앤과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로마 가톨릭의 방침으로 엘리자베스는 사생아가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탄생은 단지 왕의 불륜과 사생아의 출생이라는 가십으로 넘기기에는 너무 무겁고 복잡한 사건이었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엘리자베스의 존재는 모두에게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었다. 로마 가톨릭을 위시한 모두가 그녀를 사생아라고 주장해도 엘리자베스는 최후의 순간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사실 조차는 부인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녀는 이복형제인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에게 무시할 수 없는 정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끝까지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어린 엘리자베스는 그녀에게 닥친 위기 상황들을 담담하고 침착하게 잘 버텨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가 열여섯의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복언니인 메리 1세는 엘리자베스의 존재를 상당히 껄끄러워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는 구교와 신교의 전쟁이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앤때문에 일어난 일이며 엘리자베스 역시 앤처럼 왕국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헨리 8세와 자신 어머니의 결혼을 합법화시켜 엘리자베스를 공식적인 사생아로 만들었다.
아무도 엘리자베스의 생존을 장담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녀는 런던탑에서 우드스톡으로 옮겨져 가택연금 됐다. 그러나 이 바람 앞의 등잔불 같은 위태로운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메리 1세가 예상치 않게 일찍 세상을 뜬 것이다. 5년이란 짧은 임기 동안 메리 1세는 엘리자베스와 신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승리의 여신은 엘리자베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메리 1세 (Mary I, 1516~1558년)

 

싸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화기애매(?)한 혈육 전쟁 2라운드
자, 이 정도면 엘리자베스가 우여곡절은 있으나 천운을 타고났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듯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엘리자베스는 꽃길만 걷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녀 인생에꽃길이 그리 쉽게 나타날 리 없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혈육으로부터 생존을 위협당했던 엘리자베스는 또다시 가족 간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비포장도로에서 치러지는 혈육전쟁 2라운드에 등장한 이는 다름 아닌 그녀의 사촌이자 스코틀랜드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였다.
메리 스튜어트는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여왕의 지위까지 올랐으나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이 죽는 바람에 청상과 부가 되었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메리 스튜어트는 그녀의 사촌이자 신하였던 단리 백작과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남편이 의문스러운 암살로 세상을 뜨면서 다시 미망인이 되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남편의 장례식 날에도 골프를 치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여 구설에 오르다 단리 백작 암살의 유력한 용의자인 보스웰 백작과 세 번째 식을 올려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메리 스튜어트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귀족들의 반란을 피해 영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으로 도망간 메리는 반란 중 감금됐을 당시 엘리자베스가 보내준 따뜻한 서신을 잊지 않았다. 당연히 메리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메리 스튜어트가 엘리자베스의 영토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불화가 시작되었다.

 

메리 스튜어트 (Mary Stuart, 1542~1587년)

 

날로 세력을 확장해 가는 개신교도들, 프로테스탄트들이 불만스러웠던 가톨릭 교도들이 메리를 영국 왕에 앉히기 위해 반란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메리가 엘리자베스에게 존재만으로 위협적인 정적이 되었다. 결국, 영국의회는 메리 스튜어트의 감금으로는 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 그녀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명한 엘리자베스는 이 일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살아남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던 메리 스튜어트는 감금 생활 13년 만에 반전을 도모했다. 아들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추대해 왕권을 나누어 가지면 프랑스가 영국에 갇혀있는 자신을 도울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반전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음모가 발각되고만 것이다. 연이어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스를 제거하고 왕권을 노린 음모까지 발각되면서 메리 스튜어트를 숱한 반란의 주모자로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졌다.
하지만 메리 스튜어트가 반란의 주모자라고 하지만 엄연히 스코틀랜드 제임스 왕의 친모이며 한때 프랑스 여왕임과 동시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그녀를 처형한다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때 엘리자베스가 그랬던 것처럼 존재만으로 여러 사람의 골치를 아프게 하는 뜨거운 감자, 메리 스튜어트의 문제를 놓고 엘리자베스의 고민은 날로 깊어졌다.
오랜 고민 끝에 엘리자베스는 칼자루를 스코틀랜드의 왕인 메리의 아들에게 넘겼다. 그에게 메리의 처형을 받아들이면 후계자로 인정해 영국의 왕으로 삼겠다는 거래를 제안한 것이다. 메리의 운명을 아들의 손에 맡긴 것이다. 왕자라는 거대한 미끼를 던지면서. 이 거래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훌륭히 성사되었고 메리는 단두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말았다.
엘리자베스는 메리 1세의 위협에서 살아남았고 생각지도 않았던 사촌 메리 스튜어트의 암살 음모에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영원히 숙적으로 남을 뻔했던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관계를 메리 스튜어트의 죽음이라는 기회로 통합시켰다.
자매와 사촌이 서로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 피의 전쟁의 승자는 당연 엘리자베스 1세였다. 엘리자베스에게 지나치게 행운이 뒤따랐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무시무시한 혈육지간의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드리워진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를 기다림의 자세로 버티고 절대 위기 상황에서 결단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운명을 이길 수 있는 건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황수정 작가
「물음표로 보는 세계사」, 「느낌표 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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