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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남는 존재의 기록이다? ①
신용경제 2017-11-01 14:25:36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50여 년이 훌쩍 흘렀지만, 인류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과학계와 종교계의 갈등은 여전하다. 진화론이 신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부정한 적은 없으나 생명의 진화가 신의 의지와는 무관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사실은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은 의학공부를 포기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독실한 종교인이었다는 점이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
영국의 생물학자로, 해군 측량선 비글호의 박물관학자 자격으로 승선한 탐사 기록을 <비글호 항해기>로 출판해 진화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

 

다윈이 20년 동안 진화론을 발표하지 못한 이유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다윈은 집안의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자연스럽게 의대에 진학했지만 혐오스러운 해부학수업과 수술과정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환자들을 보면서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그러나 이미 진보적인 사상에 깊이 빠졌던 다윈은 신학에도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해군 측량선에 박물학자로 승선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자연이 신의 섭리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믿었던 다윈은 5년간의 탐사 여행 기간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며 진화론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무신론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창조론이 대세였던 시기에 모든 생명체는 공통된 조상이 있으며 무의식, 무계획적인 자연 선택을 통해 새로운 종이 탄생하고 진화한다는 주장은 일대 파란을 몰고 올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 논란의 중심에 서고 싶지 않았던 다윈은 진화론을 밝히는 것이 마치 살인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고통이라며 “신에 대한 사랑이 단지 두뇌 작용의 산물일지 모른다”라는 고백만을 남긴 채 20여 년 동안 진화론을 발표하지 않았다.
다윈은 인간은 처음부터 신의 뜻대로 완벽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지구상의 어떤 생물도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용기가 부족해 망설이기만 했던 다윈을 세상에 나오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 젊은 학자가 그에게 한 통의 편지와 함께 논문을 보내온 것이다.
다윈에게 편지를 보낸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Wallace)라는 젊은 학자는 진화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려고 하고 있었다. 동시대에 같은 생각으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두 천재가 편지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다윈은 서둘러 자료를 정리해 1858년 영국 린넨 학회에 진화론을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 해 학회에 발표한 내용을 정리해 <종의 기원 - 원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즉 생존 경쟁에 있어서 유리한 종의 존속에 관하여>를 출간하였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출판과 동시에 당일 초판 1천 250북 판매되면서 6판까지 출판되었다. 만약 월리스가 다윈에게 편지를 보내 논문을 보내지 않고 단독으로 발표했더라면 진화론의 창시자는 다윈이 아니라 월리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월리스는 자신의 기회를 다윈이 훔쳤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젊고 혁신적인 이 젊은 학자는 다윈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고 진화론의 창시자로 다윈을 인정하는 아량까지 보였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
영국의 자연주의자이자 인류학자, 생물학자였던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생물지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동물의 경고색과 종의 분리를 설명하는 월리스 효과로 진화론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신의 조상은 원숭이입니까?”
발표와 함께 논란의 중심에 선 진화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진화론에 의하면 생물은 다양성을 원칙으로 한정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생존경쟁을 한다.그 과정에서 환경에 적응한 변이를 갖게 된 개체는 자손을 남기면서 그 변이를 후대로 전하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 자연 선택설이다. 따라서 다윈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지구상에 현존하는 생물체들은 강하거나 똑똑해서 혹은 신의은총과 보살핌, 설계에 의해 생존한 것이 아니라 환경에 스스로 적응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무한한 신의사랑으로 이 세계에서 자연을 통솔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가 되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진화론은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모든 생명체가 거대한 나뭇가지들처럼 연결되어 있어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인간이 신이 아닌 아메바 같은 존재에서 파생되어 진화한 존재라 는 주장은 타협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반발은 1860년 6월 30일, 품위 있는 옥스퍼드대학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펼쳐진 영국 과학 진흥 협회 회의에서 매우 품위 없게 폭발하고 말았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한 찬반 토론이 예정되어있던 날 회의장에는 묘한 긴장감마저 돌았다.
진화론에 대한 찬반 토론이 시작되고 얼마 후, 진화론에 대한 맹공격을 가하기 위해 출격한 옥스퍼드 주교, 새무얼 월버포스는 진화론 옹호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댁들의 주장에 따르면 댁들의 조상 중에는 원숭이가 있다는 거군요.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봅시다.그 원숭이는 댁들의 할아버지 쪽 조상입니까? 아니면 할머니 쪽입니까?” 원래 언변이 좋아 ‘매끈거리는 쌤’이라는 별명을 지닌 주교 월버포스의 질문에 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원숭이가 조상이라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주교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과 혈연관계라는 것이 더욱 부끄럽다고 답했다. 그야말로 우문현답이 아닐 수 없었다. 거침없는 사이다 발언으로 매끈거리는 주교의 입을 막을 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이 날 이후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종의 기원
시간이 지날수록 폭발하는 인구와 만성 식량 부족 현상에서 자연적인 요소가 허약한 인구 집단을 절멸시킨다는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같은종에서 차이가 발생한다고 믿었던 다윈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종의기원’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생명체가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하는 이론을 바탕으로 한 진화론은 인류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발견이자 이론으로 인정받고 있다.

 

1871년 찰스 다윈을 원숭이에 빗대어 풍자한 영국 신문 만평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기에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였다는 다윈의 주장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보수 언론들은 다윈을원숭이에 빗대는 풍자만화를 그려 다윈을 비판하곤 했다.

 

상황역전! 진화론의 맹공격?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계에서 점점 정설로 받아들여지면서 힘을 얻기 시작했다. 동식물의 진화는 애써 증명할 필요도 없이 기정사실이 되어갔다. 그러나 창조론의 맹공격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생애에 진화를 목격한 적이 없으며 어떤 사람도자연 선택 과정에 의해 새로운 종을 생산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나름대로 일리 있고 합리적인 반박이라고 생각했을 이 주장의 가장 큰 허점은 진화론의 핵심을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화론자들은 진화가 발생하고 진행되는 과정은 하나의 사건이며 인간의 관찰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창조론의 직접체험(?)식의 주장은 계속됐다.
이런 수많은 논쟁과 창조론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1959년 <종의 기원>은 100주년 출판 기념식을 가졌고 이를 계기로 다윈과 그의 저서에 관한 논문과 출판물들은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다윈의 불독’이라고 불린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이자 20세기 대표적인 진화론학자인 줄리언 헉슬리는 진화적 사고 패턴에는 초자연적인 필요성도 그럴 여지도 없다고 주장했다. 지구는 창조되지 않았고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은 뇌와 육체, 마음과 영혼이 진화했으며 종교도 예외가 아니라고 주장해 창조론이 반박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창조론에 대한 진화론의 맹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예상보다 강도 높은 진화론의 역공격을 맞은 창조론은 천지창조가 과학으로 입증이 가능하며 구약성서 족장 설화에 나오는 족장 족보를 바탕으로 지구의 나이를 6천~ 6만년으로추정하는 창조과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창조과학은 정식 논문 심사 과정을 거쳐 발표되는 과학계 학술지에 논문이 실리는 경우가 희박했고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하는 강연이나저술 활동에 국한될 수밖에 없어 과학적으로나 학문적인 가치를 인정받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창조론의 주장이 수그러진 것은 아니었다. 성경에 의한 신의 계획된 의지로 생명의 탄생을 주장하는 근본적인 창조론자들과 기독교의 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생명 탄생에 설계자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지적 설계자들은 진화론이 현재 설명 불가능한 부분을 집중 공략했다.
지적 설계론은 창조론이 확대된 것으로 현재까지 진화론의 가장 강력한 반대이론이다. 진화론을 부정하는 이들은 진화론이 완벽한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공교육에서 진화론과 함께 지적 설계론도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협의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불꽃 튀는 대결은 급기야 제2의 원숭이 논쟁이라고 불리는 토론에서 진검 승부를 펼치게 되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이 두 세력은 제2라운드에서 어떤 주장을 펼쳤을까? 그 흥미진진한 대결은 다음 편에서 계속 살펴보자.
제2의 원숭이 재판은 다음 편에….

 

 

황수정 작가
「물음표로 보는 세계사」, 「느낌표 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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