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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나 한번 붙여볼까
신용경제 2018-03-05 10:00:34

김경옥 범죄심리학 박사
前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범죄분석요원

 

매년 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춥고 길고 지루했던 겨울이 끝나고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지난겨울은 유난히도 우리를 힘들게 했다. 매서운 한파도 힘들었지만, 곳곳에서 발생한 화재로 수십 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이어지기도 했다. 연이은 화재와 사망 소식, 그리고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을 보고 들으며 왜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는지 무거운 한숨을 쉬기도 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어렸을 때 화재 예방 포스터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문구이다. 하지만 나의 조심만으로 세상의 모든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불도 그런 위험 중 하나이다.

 

필자는 평소 화재 예방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편이다. 나의 노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까지는 운명에 맡길 뿐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노력할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려고 한다. 이런 습관은 아마도 사건을 분석하며 많은 화재 현장을 접했던 경험 때문인 것 같다. 일단 불이 나면 그 불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다. 사람의 힘으로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불이 난 집 안에서 가족이 살려달라며 울부짖어도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장을 본 적이 있다. 일단 불이 나면 그 결과는 상상 이상으로 참혹하다. 일전에 미국의 한 방화범죄 전문 수사관이 불의 심각성에 대해 쓴 글을 인상 깊게 읽었던 적이 있다.

 

내가 총으로 누군가를 살해하고자 한다면, 무고한 사람까지도 죽일 위험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만 총알이 있을 때 까지만 위험을 초래할 뿐이다. 불은 탈 수 있는 연료와 산소가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라도 계속 꺼지지 않고 탈 수 있다. 언제까지라도 계속 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10년 전,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직접 보고 겪은 적이 있다. 온 국민이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 앞에 망연자실하였고 수많은 장비와 인력으로도 불길을 잡지 못해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 무너져 내렸다. 바로 숭례문 방화 사건이다. 지난 2월 10일은 숭례문 방화 사건이 발생한 지 꼭 10년째 되는 날이었다. 벌써 10년이 지났던가. TV 앞에서 안타깝고 허망한 심정으로 화재가 진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켜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수십 대가 넘는 소방차와 백여 명의 소방관이 화재 진압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5시간 만인 2월 11일 새벽 숭례문은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이를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일단 불이 나면 장비와 인력 투입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참사로 언제든 이어질 수있다. 2003년 자신의 신변을 비관한 한 남성이 지하철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인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으로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2007년에서 2008년 사이 서울 일대에서 50여 차례에 걸쳐 방화를 저지른 연쇄 방화범으로 인해 3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22억 상당의 물적 피해가 발생했다. 이들의 범행 동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이다. 숭례문 방화 당시 70세였던 방화범은 자신이소유한 토지가 도로 건설 부지로 확정되며 받게 된 보상금에 불만을 품고 사회의 이목을끌어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자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대부분의 방화범은 개인적인 불만과 분노를 이유로 불을 저지른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불을 낸 행위 자체에 대한 죄책감이 비교적 낮다는 것이다. 자기는 적어도 사람을 직접 다치게 하거나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버려진 쓰레기, 다시 만들어내면 그만인 물건들, 사람이 없는 빈 가게에 라이터로 불만 붙였을 뿐, 그렇게 불이 커질지 몰랐고 내 책임도 아니라는 식이다. 불로 인한 결과는 자신의 행위와는 별개로 여긴다. 지독한 합리화이다.

 

20대 초반 한 청년이 있었다.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하던 그는 술에 취한 손님들의 반말과 욕설, 자신이 잘못하지도 않은일로 혼을 내는 사장 탓에 스트레스가 점점 심해졌다. 어느 날 담배를 피우던 그의 눈에 쓰레기 더미가 보였다. ‘불이나 붙여볼까’ 아무 생각 없이쓰레기 더미에 라이터를 대는 순간 작은 불꽃이 일었다. 순간 놀란 청년은 후다닥 불을 끄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새 본 사람은 없는지, 불은 잘꺼졌는지 심장이 쿵쾅거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청년은 일부러 그곳을 지나쳤지만, 새벽에 쓰레기를 치워갔는지 불을 냈던 자리는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날부터 그만의 비밀스러운 놀이가 시작되었다. 스트레스가 심한 날이면 이리저리 골목을 헤매며 더 많은 쓰레기에 불을 붙였다.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은은한 가로등 불빛 속을 헤매며 불을 붙이면 마치 현실이 아니라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그만의 비밀스러운 장난은 인근 주민의 신고로 잠복 수사를 하던 형사에 의해 끝이 났다. 그 청년은 ‘잡힌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불이나 내볼까’라는 생각이 들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큰불로 번지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그는 안도했지만,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위험했는지에 대한 자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화풀이, 분풀이가 방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불을 저지르고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회를, 남을 탓한다. 문제의 근원이 해결되지 않으니 잘못된 화풀이는 계속된다. 악순환이다.
방화 말고도 다양한 원인으로 화재는 발생한다. 기계적 결함에서 부주의, 그 원인을 밝혀낼 수 없는 미상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우리는 생각보다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화재의 위험에 놓여있는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화재의 결과는 참혹하다는 것, 그리고 누구에게나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화가 나도 ‘불이나 한번 붙여볼까’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불이 무섭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10년 전 숭례문 방화사건까지 상기하지 않아도 우린 지난겨울 이미 충분히 비극을 경험했다.
다가오는 봄에도 건조한 날씨는 계속될 것이다. 이유 불문, 작은 불씨도 위협적이다. 마음에 새기고 올봄에도 꺼진 불 다시보는 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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