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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위장한 범죄, 데이트폭력
신용경제 2018-05-02 13:35:19

김경옥 범죄심리학 박사 前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범죄분석요원

 

정말 사랑이었을까
최근 남자친구와 헤어져 괴로워하던 미숙 씨(가명)에게 어느덧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는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헤어진 전 남자친구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가끔 술자리에서 어울리기도 했던 그였기에 미숙 씨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를 볼 때마다 지난날이 떠올라 더 마음이 괴로웠다.
영철 씨(가명)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며 기다려주었다. 자신의 아픔까지도 이해하며 바라봐주는 그를 보며 미숙 씨는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친구까지 버리고 자신의 고통을 받아주는 모습에 더 믿음이 갔다. 영철 씨는 항상 미숙 씨를 챙겼다.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오늘은 누구를 만났는지, 하루가 어땠는지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고 그런 그의 모습이 듬직하고 섬세하게 느껴졌다.
만남을 이어가던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회사 회식으로 미숙 씨는 영철 씨에게 연락을 못 했고, 시끄러운 분위기에 전화가 계속 울려대는 것도 몰랐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야 비로소 통화가 된 영철 씨는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연락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미숙 씨는 계속 사과했지만, 영철 씨의 화는 풀릴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택시에서 내린 미숙 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 앞에 영철 씨가 와있던 것이다. 우악스럽게 미숙 씨의 손목을 잡아 골목 어귀로 끌고 간 영철 씨는 대뜸 미숙 씨의 휴대전화부터 찾았다. 핸드폰 검열이 시작됐다.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자 영철 씨는 미숙 씨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영철 씨의 모습이 미숙 씨는 무서웠다. 일단 상황을 모면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계속 잘못했다며 사과했다. 간신히 그를 달랜 미숙 씨는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미숙 씨는 혼란스러웠다.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한없이 자상하고 세심했던 그 모습이 사실은 집착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뒤로 미숙 씨는 영철 씨의 연락을 피했지만,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었다. 혹시 집 앞에 와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집 밖에도 나가지 않고 출·퇴근길은 가족과 동행했다. 하지만 어느 곳에 있어도 불안했다. 거리를 걷다가 바로 뒤에서 발걸음 소리라도 나면 온몸이 굳어지며 식은땀이 났다. 밤이나 낮이나 수시로 메시지가 왔다. 그는 잘못했다고 빌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달라고 애처롭게 사정했다. 음성을 남기고 울며 하소연했다.
미숙 씨는 점점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 그때는 너무 화가 났었겠지. 연락하지 못한 나도 잘못했잖아. 처음인데 내가 너무한 건가…’ 그날의 공포는 점점 잊혀지고 또다시 자상한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한 번 기회를 주자. 헤어지더라도 만나서 얘기는 해야 하니까’
미숙 씨는 그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둘의 만남은 싸움으로 이어졌고 영철 씨는 미숙 씨를 폭행했다. 경찰에 검거된 그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었다.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며 오히려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 그녀를 원망했다.
영철 씨의 마음은 그가 말하는 대로 사랑이었을까. 그것은 사랑이기보다는 사랑을 가장한 집착에 더 가깝다. 무엇인가에 집착하면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보다는 집착하는 대상을 소유하고 통제하고 싶다는 욕심만 남는다. 집착의 끈은 끊어내기 어렵다. 집착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폭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관계단절이 어려운 이유
최근 부산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데이트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데이트폭력은 힘을 가진 존재가 그렇지 않은 존재에게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언론에 보도된 엘리베이터 CCTV 영상에는 옷이 찢겨 속옷이 드러난 채 기절해 누워있는 여성의 한쪽 팔을 남성이 잡아끌고 나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는 가혹한 영상이었다.
사건은 여성이 전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하면서 시작되었다. 남성은 여성을 집 밖으로 유인하여 폭행하였다. 남성은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해왔는데 처음에는 물건을 부수는 정도로 시작하여 그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고 한다.
왜 폭력이 지속되는데도 그 관계를 단절하지 못하는 것일까. 피해자들은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보다 더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인연만큼 질긴 것은 없다.
필자가 접한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 사건의 공통적인 특성은 상당기간 폭력이 발생하지만, 피해자가 가해자에게서 벗어나거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혹은 가정적인 문제로 치부되어 타인이 개입하기 어렵다는 점, 가해자는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를 지속해왔기 때문에 피해자의 개인정보, 지인, 직장 등 사회관계를 모두 알고 있어 공권력을 피해 얼마든지 피해자에게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상대방이 폭력적임에도 언젠가는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피해자의 비합리적인 믿음 등이 그 이유가 된다. 이를 이타적 망상이라고 하는데, 피해자가 자신이 더 노력하고 희생하면 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과는 반대로 폭력은 반드시 그 수위가 점점 더 심해지게 마련이고 심한 경우 살인으로 이어진다. 상대방을 제 뜻대로 통제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통제가 안 될수록 폭력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인을 살해하거나 심각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이별 통보 후에 많이 발생한다고 하여 이별범죄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수치스럽고 창피한 마음에 가족이나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혼자 해결하려 하다가 더 큰 화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하고 살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까지 의심해야 한다면 전쟁 같은 하루하루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허용될 수 없는 말과 행동이 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문제가 아니라, 이해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상대방이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피해자들 중에는 혼자서 아픔을 감내하며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폭력은 범죄이다. 그리고 범죄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 본문의 사례는 실제 사건을 토대로 각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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