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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의 선물
신용경제 2018-05-02 13:39:27

이진신 한의학박사, 경희푸른한의원 원장 hanisa.co.kr

 

일상에서의 지친 마음과 좁아진 시야를 풀기에 산책만한 것이 없다.
동네 한 바퀴 걷다 보면, 개나리와 민들레가 유치원생들과 커플룩 차림으로 방긋 웃고, 인상파 화가를 사로잡은 빛과 나무의 조화는 미술관에 걸려있는 작품 속 현장을 걷고 있는 듯 착각을 하게 된다. 유명 미술관에 들어갈 때의 입장료 없이도, 자연은 그렇게 우리와 조화를 이루며 쉼을 준다. 빛과 나무, 꽃과 아이들 웃음소리가 나를 관통하면 굳은 얼굴을 펴게 하는 치료효과가 있다. 질병을 검진하기 위한 MRI는 질병을 찾아내는데 사용되지만, 광합성이 굳이 필요 없는 인간에게 자연의 빛은 피곤한 부위를 콕 찍어서 진단하는 대신, 나른한 쉼과 약간의 졸림을 틈타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그 짧은 시간에 마취과, 외과, 내과, 정신과 그리고 한의사 선생님들이 다 다녀가셨나 보다. 몸과 마음이 치유된 듯 상쾌한 것 보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산책길이 있다.
이 길은 장식용 나무 몇 그루와 꽃 모양의 인테리어가 있을 뿐, 살랑이는 나뭇잎과 꽃향기는 없다. 활자에 새겨놓은 작가의 생각들이 숨 쉬고 있는 곳, 그 숨결이 바람도 불지 않는 실내 공간을 청정하게 하며, 작가가 토해 놓은 호흡이 읽는 이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이상한 공간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기계 안에 모든 활자를 구겨 넣을 수 있고, 핸드폰으로도 책을 다 읽을 수 있으며 클릭 몇 번으로 책을 구매할 수 있는 시대이다. 하지만 책의 질감을 직접 느끼면서 활자의 모판을 넘기며 책을 읽는 독자에게 이 장소는, 꽃향기를 다 빨아들일 듯 코로 숨쉬고, 나뭇가지에 하이파이브 하는 즐거움을 아는 산책 마니아처럼, 책 표지와의 터치와 갓 구워진 책 내음의 후각까지 자극하는 유쾌한 길이다. 민들레에서 출발한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번식하듯이 이 길에서 숨 쉬는 한 권의 책에 있는 문장과 단어는 어느새 눈으로 날아들어 와 뇌 신경세포와 조우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멋진 글로 안내하는 가이드가 있다.
영어를 오래 배웠지만, 꼬부랑글씨 알러지가 있고, 긴장성 두통에 시달리는 나는 다른 언어로 쓴 책을 번역한 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늘 가지고 있다. 두꺼운 책을 쓰는 작가도 대단하지만, 그 작가의 생각과 마음속을 이해하여, 모국어로 읽을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글을 풀어내는 그들의 노고는 넓은 지식세계의 여행자에게 좋은 길잡이가 된다. 때론 같은 작품을 여러 번역가를 통해 번역되기도 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되기도 하는 것으로 봐서는 재창조의 멋진 영역이란 생각도 들지만, 작가가 그 작품의 주인인 듯 보이는 것에 비해서, 그분들의 노고는 조금 가려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들 때도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번역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인체를 해석해서 치료를 하는 의료인들도, 법전을 잘 이해하여 정의가 사회에 흐르게 하는 법조인들도 자신의 전문분야를 잘 이해하고 해석하여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생명력을 주는 직업일 것이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과 미숙한 시절에 겪었던 갈등을 잘 해석하여, 받은 사랑은 자녀에게 더욱 잘 흐르게 하고, 내가 자녀일 때 경험했던 부모님과의 갈등과 답답함은 이해의 필터링을 통해 더욱 성숙해져서, 자녀와의 갈등 상황일 때에 서로 상처가 되지 않게 잘 이끌어주는 것이 좋은 부모의 모습이다. 우리 모두 처음 사는 삶이지만, 직업과 인생을 해석하여 멋지게 삶으로 표현하려는 분들은 모두 훌륭한 번역가이다.
의사가 인체를 설계하지 않았고, 그분들이 법을 다 만들지 않았기에, 또한 완벽한 부모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겸손히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사회가 갈등과 불안을 조금 줄여낼 수 있도록, 가정이 더욱 사랑이 넘쳐날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해내야 한다.

 

산책은 늘 선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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