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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좌절 금지! 금지도 금지?
신용경제 2018-06-04 18:03:24

계절의 여왕이자 가정의 달이었던 러블리한 5월이 지나고 찾아온 6월은 다이내믹한 혁명의 달이다.
‘혁명’이란 단어만 들어도 흠칫 놀라는 이들이 많겠지만 사실 혁명이란 단어는 다분히 과학적인 용어였다. 원래 혁명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천체회전설’에서 회전과 순환, 주기, 공전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그런데 심오한 우주의 질서를 설명하던 단어가 어쩌다가 이렇게 과격해진 것일까?

 

황수정 작가
「물음표로 보는 세계사」, 「느낌표 세계사」 저자

 

우주의 오묘한 진리가 혁명이다?
혁명이란 단어가 정치적으로 쓰이게 된 건 종교 분쟁 때문이었다. 17세기, 독실한 가톨릭신자이자 전제 왕권의 부활을 꿈꾸던 제임스 2세는 왕의 상비군을 늘려 스코틀랜드의 반란을 무차별 진압했으며 정부 주요 관직을 가톨릭 신자로 교체하는가하면 다른 관료들도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다. 신교 자유령을 공표하려던 종교인들을 탄압하는 건 예사였다. 위기에 몰린 의회는 큰딸 메리와 그녀의 남편 오렌지 공과 함께 “자유로운 의회와 자유로운 신교 보호”란 구호를 내걸며 왕에게 저항했고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해 루이14세의 지원을 받으며 왕위 탈환을 노렸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영국에서 일어난 정권 교체는 단순히 제임스 2세의 몰락으로 끝나지 않았다. 의회와 절대군주 사이의 힘의 균형이 깨졌고 국가의 주권이 왕이 아닌 의회에 돌아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엄청난 사건들이 더욱 놀라운 건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성공했다는 것이다. 명예혁명이라고 알려진 이 사건을 통해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순환 운동과 복고의개념으로 혁명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됐다. 명예혁명은 우주가 지구를,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만큼 충격적인사건이었다.

프랑스 파리 경찰 박물관이 공개한 1968년 혁명 당시의 사진

 

이렇게 우주의 진리처럼 부정하고 싶어도 저항할 수 없는 순환의 움직임은 바스티유 감옥습격 사건으로 다시 증명됐다. 이날 루이 16세는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되는 것을 보고 “저들이 반란(révolte)을 일으켰다”라고 분노했다. 그러자 그의 곁에 있던 라로슈푸코 리앙쿠르 공작이 “아닙니다. 이것은 혁명(révolution)입니다”라며 왕의 말을 정정했다고 한다. 왕에게 는 반란이었으나 누가 봐도 이 사건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역사적 변화였던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거창한 정의로 포장해도 혁명의 암울한 그림자를 거둬내는 것은 매우 힘든일이었다.

 

패션 테러리스트들의 스타일리시한 혁명?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상상력에 권력을!”, “국경을 철거하라!”라는 과격한 구호로 시작된 68혁명은 과거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혁명들과 조금 달랐다. 모든 혁명의 시작이 소소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68혁명은 시작과 구호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혁명을 시작한 이들이 원한 것은 그저 사랑할 수 있는 자유였다.
1968년 3월 파리 낭테르대학(현재 파리 10대학) 학생들은 남학생의 여자 기숙사 출입을 위해 “여자 기숙사를 개방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사랑스러운(?)집회를 시작했다. 여학생들은 남자 기숙사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데 남학생의 여자 기숙사 출입 금지는 불평등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다지 예사롭지 않은 학생들의 요구는 예상외로 오래 지속됐다. 게다가 집회의 성격도 비현실적 교육 환경과 경직된 분위기 개선을 위한 학내 민주화운동으로 바뀌었다. 이들의 학장과의 면담이 불발되자 기숙사 개방 문제로 시작된 대학개혁의 이슈는 곧다른 대학으로 퍼져 나갔고 곧 전국 대학생 연합이 주체가 되어 수업 거부가 시작됐다.
이런 뒤숭숭했던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베트남 침공을 항의하는 학생들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은행 습격과 학생 운동단체와 우익 청년들의 무장 충돌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학내 공권력 행사를 결정했고 순식간에 낭테르 분교, 소르본 본교가 폐쇄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학생들이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서 불거지고 있었다. 정부의 강경 진압을 지켜본 프랑스 시민들이 학생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른바 5월 10일 바리케이드의 밤이 지나자 프랑스 노동자 연맹, 민주노조 연맹, 교원 노조가학생들과 정부의 무력 진압에 대항하며 동조 파업을 시행했고 13일엔 수십만 명의 대학생, 고등학생노동자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켰다.

68혁명 당시 전설적인 학생 리더로 손꼽혔던 다니엘 콘벤디(daniel cohnbendi)
부모가 나치를 피해 프랑스로 건너왔기 때문에 독일 국적자였던 그는 68혁명 당시 극우성향 주간지로부터 독일 출신의 유대인이카를 마르크스를 흉내 내려고 한다는 비난을 받고 추방 위기에까지 몰렸다.


1968년 5월 15일,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는 대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대화를 하겠다고 나선 수상은 이들을 사회 파괴를 목적으로 무질서를 확산, 부추기는 미친 극단주의자로 몰아세웠다. 돌아온 건 “그렇다 우리는 미쳐 간다”라는 슬로건이었다.
기왕 미친 극단주의자가 된 이상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 미쳐보자고 결심한 이들의 행동은실로 과감했다. 버스와 지하철, 철도와 항공편이 중단되었고 영화제작사들까지 칸 영화제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노동자들의 잇따른 파업은 프랑스를 일시 정지 시켰고 전례 없는 반체제, 반정부 움직임은 내각의 전면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돌아온 답변은 물론 “NO!”였다. 천박한 폭력성과 일제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드골의 입장이었다. 드골의 답변에 학생들은 “폭력적 천박성 바로 그것이다”라는 슬로건으로 대항했다.
천만여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고 주식 시장이 붕괴했다. 거리는 시위대와 구경꾼을가리지 않는 경찰의 무장 탄압으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제시된 임금 협상안은 불발로 끝났다.
그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어떤 것도 얻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주장하기 위한 혁명이다”이라는 슬로건은 그들이 단지 오늘 먹을 빵을 위해 거리로 나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변했다. 임금 인상은 학생과 노동자를 분리하지 못했다.

 

좌절 금지! 혁명은 실패했지만 실패하지 않았다?
사태의 진정은커녕 협상이 계속될수록 상황이 악화되자 정부는 소르본의 재개와 체포 학생들의 석방, 재판의 재심 등을 약속하고 경찰을 철수시킨 뒤 최저 임금 35%, 통상임금10% 인상과 더불어 노령 수당 연금 등 노동자의 복지 확대, 노동조합의 권리를 신장하는그르넬 협약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것도 통하지 않자 정부는 40일 내의 총선거를 약속하며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시위대는 선거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갈등은 계속될 것이라고 외쳤지만 그들이 틀렸다. 드골이 던진 승부수는 신의 한 수임이 분명했다. 드골은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불순한 자들에게 돌리며 학생들의 공부를 방해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조종하여 프랑스 국민들의 정상생활을 방해한다면 더욱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고엄포를 놓았다. 그리고는 파업 노동자들을 해산하고 모든 시위를 금지했다.
대학의 문이 다시 열리던 즈음 총선거가 시행됐다. 드골을 중심으로 한 여당은 485석 가운데 358석을 차지하며 대승을 거뒀고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끝났다. 그러나 그 이듬해 1969년 혁명을 잠재우며 여당의 승리를 거머쥔 드골은 국민투표에 패하면서 정치권을 떠나게되었다.
역사적으로 68혁명은 명백히 실패한 혁명이다. 드골이 하야했지만, 그의 뒤를 이어 퐁피두 수상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1981년까지 우파적 성향이 강한 정권이 집권했다. 68혁명이 실패한 원인으로 시위대의 뚜렷한 개혁 청사진 부족, 산발적인 가치 구호, 비조직화 등이 거론됐다. 물론 이 모든 이유가 조금씩 실패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럼 그들의구호와 청사진이 좀 더 조직적이고 과감하고 뚜렷했다면 혁명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 옛날 7월 혁명과 2월 혁명을 이뤄내고도 제2의 나폴레옹을 꿈꾸는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던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68혁명의 결과도 1848년의 결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68혁명이 남긴 슬로건들은살아남아 세상을 변화시켰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경제 호황기에 태어나 물질적 풍요를 누린 세대들이 그에 안주하지 않고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권위를 비판하며 체제에 도전했던 68혁명의 정신은 프랑스의 교육제도를 바꾸었고 노동자의 권리 신장을 이루어냈다. 그들은 자본주의 물질적 풍요 속에인간의 소외를 생각하게 했고 반전, 반핵, 여성, 환경, 공동체 운동으로 발전했다.
비록 가장 뜨거웠던 자들이 더 빨리 식었고, 혁명에 지지를 보냈던 손이 드골에게 표를 던져주었으며, 세월이 흘러 변화를 외치던 이들이 오히려 혁명에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해도실천하고 투쟁하는 그들로 인해 역사는 진보했다.
68혁명 세대이며 급진적인 사상가로 활발한 정치적 의견을 제시하는 알랭 바디우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혁명의 실패와 성공을 논하면서 잊고 있었던 것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진정한 인간의 자유란 무엇인가? 진정한 자유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에만 그치지 않는다.
인간에게 주어진 진짜 자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실현하는 데 있다. 개인적인 수준이든 집단적이든 우리의 욕구와 능력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이것이 결국에는 평등에관한 질문을 던진다. 무한한 재산을 가진 사람과 아무것도 못 가진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 역시 철학이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평등한 기회를 부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것이 정치의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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