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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의 막장 사극
신용경제 2018-07-02 16:44:03

일명 ‘자기애’로 설명되는 나르시시즘은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에서 비롯되었다. 내용을 간추려 보면 남의 가슴에 못질 좀 하시는 성격 나쁜 꽃미남의 인과응보 이야기쯤 되겠고, 교훈적으로 해석하자면 왕자병, 도끼병 주의, 교만 방지용 훈계 스토리라고 할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교훈도 요즘엔 약발이 통하지 않는다. 외모 지상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여론이 들끓어도 실상 인물값(?)이 경쟁력이 된 지 오래다.
옛말에도 ‘기왕이면 다홍치마’라 했건만 이 다홍치마 법칙이 그다지 통하지 않는 분야가 있다. 바로 역사다.

 

황수정 작가
「물음표로 보는 세계사」, 「느낌표 세계사」 저자

 

너무 잘난 당신! 있어도 못 살겠고 없어도 못 살겠다!
명문가의 자손이자 빼어난 용모로 당대 꽤 유명했던 알키비아데스는 요즘 드라마의 꽃미남 주인공들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일단 스펙부터 두둑하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와 아테네, 테베군이 그리스의 패권을두고 벌인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전사한 영웅이었으며 그의 후견인인 페리클레스는 당대아테네의 정권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인이었다. 명성 자자한 집안에 재력까지 겸비한 그는경주용 전차를 여러 대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올림픽 경기에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를 7대나 끌고 참가해 1위와 2위, 4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외모는 ‘꽃보다 남자’의 F4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성장을 계절마다 피는 꽃에 비유했고 그의 주위에는 항상 그의미모(?)를 찬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니 그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함이 안타까울 정도다.
하지만 우리의 꽃미남 알키비아데스는 그의 미모만큼 무례하고 교만하고 오만하기로도 유명했다. 심지어 겉멋이 단단히 들어 피리 연주가 우습게 보인다는 이유로 아예 배우지도 않았으며 그리스의 대중 스포츠 레슬링을 자주 폄하했다고 한다.
당연히 그의 이런 오만하고 무례한 행동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이런 안티에 대응하는 그의 대처법이 상당히 인상적이고 독창이다. 한번은 그가 귀한 개의 꼬리를 잘라 세간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비난 강도가 꽤 거세지자 주변의 동료들이 걱정스럽게 이번 일은 너무 과했노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독보적인 안하무인 꽃미남께서는 그 비난을 비난으로 듣지 않았다. 알키비아데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들이 그 사건을 이야기하느라 자기에 대해 더 심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며 좋아했다는 것이다. 모난 성격이면 성격, 외모면 외모, 집안, 재력 뭐하나 남에게뒤지기 싫어했던 그는 모두의 사랑과 미움을 한몸에 받는 핫한 인물이었다.

 

꽃미남 알키비아데스 감독, 주연 막장 사극 드라마
그렇다면 이처럼 독창적인 캐릭터가 연출하고 스스로 주인공으로 출연한 사극은 얼마나스펙터클할까? 그의 사극은 기대만큼 염문과 스캔들, 배신과 반전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흥미진진한 대하드라마다. 그럼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하고 흥행 요소가 배치된 알키비아데스의 사극을 본격적으로 감상해보자.
뛰어난 외모만큼 웅변에도 소질이 있었던 그는 아테네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방법을잘 알고 있는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질투의 화신인 알키비아데스가 정치에만 욕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온건파인 니키아스가 스파르타와의 평화협정을 체결해 인기가 높아지자 그 꼴을 보기 싫은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의 보급지인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를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선봉에 나섰다.
알키비아데스의 달콤한 말에 혹해 이탈리아의 곡창지대인 시라쿠사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 아테네는 도시국가치고 꽤 큰 규모인 5천여 명의 군사를 모집해 시칠리아 원정을 떠났다. 그런데 갑자기 뜻하지 않는 사건이 터졌다. 어느 날 헤르메스 흉상을 바치고 있는 사각 주석인 헤르메스 기둥, 헤르마이가 심하게 훼손된 것이었다. 당시 신성모독은사형에 처할 만큼 중죄였고 전쟁을 앞둔 시점이라 민심이 심하게 요동쳤다.
더 문제는 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자가 알키비아데스였다는 것이다.
그를 지목한 이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종종 친구들과 이교도의 의식을 치렀다고 주장하며이와 같은 불경스러운 행동은 체제전복으로 이어질 만큼 위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의 신성모독 사건은 음모일 가능성이 높았다. 밀고자들의 진술은 일관되지 않았고 확실하지도 않았다. 증인에게 범인 대조 심문을 하면 달이 뜨지 않는 날 밤 달빛이 비치어 알아보았다는 어처구니없는 답만 반복했다. 그러나 불안에 떠는 민심은 언제나 그렇듯 희생자를 요구하는 법이다. 여기에 모함은 정치적 스캔들을 마무리하는 훌륭한양념과 같은 역할을 한다.
결국 전쟁터에서 소환명령을 받은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고판단, 망명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가 없이 치러진 시칠리아 원정은 불행 중 다행(?)인지 대참패로 끝났다. 물론 장군 한 명의 빈자리가 전쟁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크다고 볼 수는 없다. 심지어 그 장군이 알키비아데스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 장군이 변절자가 되어 내부의 적이 되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알키비아데스가 몸을 담은 스파르타 지원군은 지피기지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의 전략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스파르타로 망명한 꽃미남 트러블 메이커 알키비아데스는 웬일인지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찬 역경을 맛본 영웅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아 개과천선 한 듯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인보다 더 스파르타인답게 행동해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샜던 바가지는 스파르타에서도 구멍이 메꾸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전공분야인 여자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 상대가 스파르타의 왕비 티마이아였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에서 지진이 나던 날 왕비의 침실에서 살겠다는 강한 의지로 달음박질하던 알키비아데스를 봤다는 증언들이 속출했다. 설상가상으로 지진 후 왕비의 임신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알키비아데스의 스캔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딜가나 눈에 띄는 외모와 달변으로 정적을 만드는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목숨을 부지하고자 제3국행을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제3국은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아닌 그리스 공동의 적인 페르시아였다.
페르시아로 망명한 달변가 꽃미남 청년 알키비아데스는 재치와 융통성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여 페르시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페르시아의 태수 탓사페르네스는 그의 정원중 가장 아름다운 공원을 알키비아데스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태수의 마음을 사로잡은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 원조를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충고하며 아테네와 스파르타를모두 지치게하여 정복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알키비아데스 막장 사극의 결말
알키비아데스의 대활약으로 궁지에 몰린 아테네는 망명자들에 대한 사면조치를 내리면서본국 소환명령을 내렸다. 때마침 아테네에서는 시칠리아 원정의 패배가 알키비아데스의공백때문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알키비아데스의 귀국은 생각보다 쉽게 진행됐다.
알키비아데스는 군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금의환향했다. 사람들은 알키비아데스를따라다니며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었다. 군중 앞에선 알키비아데스는 연설을 통해 자신의 슬픈운명에 대해 애통해하며 자신을 믿지 않았던 아테네 시민에게는 너그럽게 아주 작은 책임만을 물었다. 그야말로 적반하장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회는 그의 연설이 끝나기 무섭게 그에게 금관을 내리고 육지와 해상을 장악할 독점권을 주 며 장군으로 추대했고 재산을 다시 돌려주었으며 그에게 내렸던 모든 저주를 거두었다.
그럼 이제 그의 인생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인가? 불행히도 행운의 여신은 그의편이 아니었다. 육지와 해상권을 모두 장악한 알키비아데스는 뜻밖에 스파르타와의 해전에서 대패를 맛보게 되었다. 물론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해전이었지만 지휘관인 그가 책임을 면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탄핵당하고 다시 페르시아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망명지에서 스파르타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한때 소크라테스가 플라톤과 함께 아꼈던 애제자였고 보장된 미래가 예견된 촉망받는 젊은이였던 알키비아데스는 후에 그의 후견인 페리클레스에게 모든 것을 물려받았으나 정직함은 물려받지 못했고 소크라테스로부터 모든 것은 배웠지만, 도덕성만은 배우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역사에 희대의 배신자로 기록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영웅을 만날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그나마 꽃미남 영웅의 막장 역사를 보며 얻는위안 하나는 “비범한 외모는 비범한 역사를 만든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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