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이 본 뉴스
등록된 기사가 없습니다.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남수씨의 붕어빵
신용경제 2017-11-01 15:53:13

 

긍정은 나의 힘
“쿠키 붕어빵은 제가 개발한 건데 정말 맛있어요. 이 붕어빵 맛을 한번 보면 서울에 못 올라가실 텐데…(웃음)” 바라만 봐도 군침 도는 팥과 슈크림이 가득 들어간 노릇노릇 붕어빵, 동그랗게 구워진 와플에는 삼색 아이스크림이 먹음직스럽게 올라앉았다. 남수 씨가 개발한 쿠키 반죽 안에 보드라운 달걀을 품은 계란빵도 먹음직스럽다. 원광대 앞에서만 만 5년째 붕어빵을 굽는 김남수 씨는 본인이 만드는 음식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가득하다.
붕어빵도, 와플도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맛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맛에 대한 연구와 업그레이드에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그는, 한 가지를 하더라도 자부심을 품고 임한단다. 이처럼 음식 장사에 자신이 있는 이유는 바로 “맛을 알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맛을 모르고 먹는장사를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 가게에 다시 찾아오게 하는 맛, 어느때고 다시 생각나는 맛을 연구하죠. 그래서 장사하시는 분이나 창업을 준비하는 분 중에 저를 찾아오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달걀 파동으로 달걀값이 요동쳤을 때 힘들지는 않았냐 묻자, 어떤 상황과 여건에서도 긍정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고 사는 편이라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현명한 길을 찾는단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긍정적인 힘이 가장 큰 자산이라는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닌 듯하다.
“장사는 즐겁게, 재미나게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처럼 실제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는 긍정 에너지가 넘친다. 웃음 띤 얼굴로 손님을 대하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자연스레 끄집어내는 그로 인해 손님들은 먹기 좋게 구워지는 붕어빵 앞에서 잠시나마 이야기꽃을 피운다.

 

사랑의 붕어빵을 굽다
카스텔라를 연상시키는 보드라운 빵과 인심 좋게 들어간 넉넉한 앙금, 재료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특별한 맛으로 도 유명하지만, 그가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몇 년 전 ‘붕어빵 천사’로 언론에 소개되면서부터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그의 선행은 이미 30년 넘게 지속되어 왔다. 경기가 좋지 않아 사람들이 붕어빵 사 먹는 푼돈마저 아낄 때조차 그의 기부는 멈춘 적이 없다. 지난 2013년 전국적으로 혼란을 몰고 온 메르스(MERS, 중동 호흡기 증후군) 사태 때는 최초로 기부문화 형성한 것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나라가 혼란스러우니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제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먼저 붕어빵으로 사랑의 씨앗을 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언론에 알려지면서 본의 아니게 상까지 받게 됐죠.”
그가 행하는 대부분의 선행은 늘 조용했지만, 그럼에도 이웃을 위하는 일이라면 두 발 벗고 나섰다. 그뿐인가. 지역사랑도 남달라 재래시장 살리기 대책, 관광문화발전을 위한 노력 등 전라북도 알리기에 열과 성을 다해왔다. 남다른 이웃사랑만큼이나 지역사랑도 유별난 남수 씨다.
“전주가 새천년에 국제영화제, 월드컵같이 큰 행사가 많았어요. 그땐 제가 전북대학교 앞 지하도에서 장사하던 때였는데, 동네잔치 하지 말고 세계적으로 알리는 문화축제로 만들자는 뜻에서 사비로 열심히 홍보하고 의견을 냈죠. 지역사랑이 별건가요? 지역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내 나름대로 참여하면 되는 거죠(웃음).”
그가 제안한 좋은 의견과 뜻은 그저 바람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많은 부분 반영이 되었고, 김완주 前 전북지사로부터 표창을 받는가 하면, 지역발전 책 표지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에 대한 애정이야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행동으로 보여주고 실천하는 그의 모습은 ‘바쁘다’는 이유로 잊고 사는 우리의 모습과 비교되어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진다.

 

가난을 딛고 사랑을 나누다
“기부요? 계기랄 것까진 없지만 저희 집이 옛날에 무척 어려웠어요. 지지리도 못살았죠. 저희가 총 8남매였는데, 그중 여섯이 죽고 저와 누님 둘만 남았으니까요. 먹을 게 없으니 이것저것 되는대로 먹다가 식중독으로 죽기도 했고, 몇 날 며칠 배를 곪다 영양실조로도 죽었대요. 워낙 제가 어렸을 때 이야기라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어머니 얘기로는 남매 중 둘은 하룻밤 새 하늘나라로 갔다고 하더라고요. 그 정도로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어려웠던 그 시절, 그는 부모님 따라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았다. 부모님 일 나가시면 숟가락 하나 들고 동네에 밥 얻어먹으러 다니는 게 일상이었단다. 그처럼 어려웠던 집안 사정으로 학교도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했다고.
“부모님은 막일을 하셨어요.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시며 저희를 먹여 살렸죠. 어머니는 소위 ‘속없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도우셨어요. 원체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었거든요. 생각해보면 저도 알게 모르게 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 우리 가족이 도움받아 살았듯이 어려운 이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죠.”

 

 

지속적으로 하는 봉사나 기부는 이미 그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다. 연말이면 일정 금액을 기부하는 건 물론, 폐지줍는 노인을 보살펴 드리는 것 또한 어르신을 공경하는 마음의 실천이다.
“계란 한판에 만원이 넘을 때도 폐지 줍는 어르신들 달걀 만큼은 꼬박꼬박 챙겨 드렸어요. 제가 힘들면 그보다 더 힘든 어르신들, 더 추운 이웃들이 많거든요. 그걸 외면할 수는 없었죠.”
그뿐인가. 그가 사는 동네의 어르신들이 행여 다치실까 염려돼 위험한 길목에 사비를 털어 난간을 설치해 드리기도 했다.
“제가 전주 한옥마을에서 큰길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오목대라는 산동네에 살았어요. 어르신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는데, 고지대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지 않으니 눈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겐 정말 위험했죠.”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내가 아니라도 했을 일이라 얘깃거리도 안 된다며 애써 말을 아끼는 그는, 그럼에도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볼 때면 더없이 뿌듯하단다.
“짧은 인생 욕심낼 게 아니라, 하나라도 나눠 먹고 베푸는게 낫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벌어놓은 돈을 죽어서도 가져가는 게 아니잖아요. 넉넉하진 않지만, 하루에 만원은 기부를 한다는 생각으로 어떤 방법으로든 이웃에게 되돌려 드리려고 해요.”

 

나눔은 이어진다
“행복이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행복하고, 행복하니까 하고 싶은 거고요. 이유는 그거 하나예요.”
그저 하면 된단다. 기부든, 봉사든 생각만 하다가 시간 보낼 게 아니라 일단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하라”는 거다. 이것만큼 간단할 게 어디 있느냐고 되묻는 남수 씨다.
“뭐든 사람이 마음먹는 대로 되는 거잖아요. 수중에 100원이 있든, 1,000원이 있든 어떤 방법으로든 쓰게 되어있어요. 나 혼자 따뜻할 수도 있고, 더 많은 사람과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도 있죠. 선택은 본인 몫이고, 생각이 있다면 실천하면 됩니다. 너무나 간단하지 않습니까? (웃음)”
매사에 두려움도 없고, 망설임도 없기에 그의 언행에는 거침이 없다. 그가 걸어온 길이 그랬듯 앞으로 나아갈 미래도 그러하다.
“제 꿈은 원룸을 지어서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거예요. 대학교 앞에서 돈을 벌었으니 학생들을 위해 써야죠. 멀지 않았어요.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듯한 그에게 꿈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다. ‘어렵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될 만큼 가난했던 시절, 더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던 어머니를 붕어빵처럼 꼭 빼닮은 남수 씨. 나눔은, 그렇게 이어진다.

 

 

권성희 기자 song@mcredit.co.kr

디지털여기에 news@yeogie.com <저작권자 @ 여기에. 무단전재 -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