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덜란드의 개성상인이다.” 보나미텍스 회장 박영신
골프가이드 2019-02-07 09:42:19

박 회장은 40년 전 네덜란드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했다. 빈치스타라는 브랜드 역시 그 때 박회장이 특허 신청을 낸 등록 상표다. 멀리 바라보고 여러 가지 모양을 출원해 두어 빛을 보게
된 케이스다.
그는 배재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sk(선경)에 입사해 주재원으로 네덜란드 땅을 처음 밟았다. 그곳에서 암스테르담 대학, 헤이그 대학원을 다니며 유럽 통합 과정을 공부하려 했는데 갑자기 파리 지사장으로 발령이 났다. 여기에서 박영신 회장은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띄웠다. 안정적인 직장에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나온 것이다. 그 당시 박영신 회장은 네덜란드에 간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네덜란드의 선진적인 모습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가 막 살아나기 시작했던 당시의 한국과 비교했을 때 네덜란드는 천국과도 같았다. 그는 단지 네덜란드의 문물을 즐기려고만 하지 않고, 거기에 살면서 선진국형 모델을 배우고, 사업을 펼친 뒤 성공해서 고국에 기여해야겠다는 애국심을 품었다. 당시 29세라는 잃을 게 없는 나이였기에 겁 없이 사업에 뛰어들었고, 한국인으로써 세계에서 이미 위용을 떨치고 있던 유대인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경쟁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일부 박영신 회장 제공

 

 

박영신 회장은 40여년을 네덜란드에서 빈치스타라는 브랜드를 가진 의류기업 보나미텍스를 설립, 운영해 크게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현재 디아스포라 기업가, 즉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는 교포 기업가들의 모임인 한상협회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70세인 현재도 현역으로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 장소에 자신의 회사에서 직접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는 100달러짜리 티셔츠가 미국 업체들이 라이센스를 받아 미국의 유명백화점인 노드스톰, 메이시, 미국 유명 유통업체 버클 등에 납품하고 있는 옷이라며 자신있게 이야기했다. 그의 라이센스 제품들이 그동안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인 루이비통, 나이키, 발망 등에서 주력 제품으로 판매되어 수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던 상표다. 원특허자인 보나미텍스가 실력을 발휘하여 정식으로 라이센스를 계약하는 바람에 거대 공룡 기업들은 하루 아침에 물을 먹게 됐단다. 박 회장과 그의 회사가 가진 어마어마한 잠재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만든 빈치스타라는 브랜드명은 박회장이 평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윈스턴 처칠의 강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상표다. 2차 대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처칠은 영국의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포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런던 시내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을 향해 승리의 V포즈를 그리며 시민들을 향해 포기하지 말라며 연설하였다. 그와 같이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가진 처칠의 마음가짐을 토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카이사르 장군의 라틴어 명언 veni, vedi, vin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에서 빈치를 차용했다. 이런 탄생스토리를 가진 빈치스타라는 이름은 각 분야에서 최고로 성공한 사람들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국내에도 빈치스타의 라이센스 모자가 있고, 곧 신발도 라이센스가 도입될 예정이다. 한편, 1박2일에 출연중인 가수 정준영이 빈치스타의 스냅백 모자를 즐겨 쓰는 것으로 알려져 빈치스타는 정준영 모자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박 회장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 몸으로 부딪혀가며 비즈니스 현장의 노하우를 쌓아갔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항상 그가 채득한 살아있는 지식을 고국에 있는 동료, 후배들과 나누고 싶다는 꿈을 꿔왔다.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박회장은 3권의 책을 쓰기도 했다. “나는 네덜란드 개성상인”, “국제 경영 이야기”, “히딩크를 키운 네덜란드”가 그것이다. 이 책들이 연대, 고대, 전경련 등에서 교재로도 이용할 만큼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고대, 연대, 전경련 등지에서 강연을 하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했다. IMF 시절이었던 당시에 최고위과정 교수로 출강하면서도 오직 고국을 위기에서 구해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는 ‘IMF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란 주제로 각 기업의 임원들이었던 수강생을 향해 갖고 있는 모든 노하우를 아낌없이 쏟아내었다.

 

 

박회장의 열정에 하늘도 감복한 것일까. 그는 의도치않게 한국의 역사적 흐름을 바꿔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1999년 고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시절의 사건이다. 그때 그는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강의하면서 네덜란드 코치가 남아돌기 때문에 네덜란드 코치진을 영입해 와야 한다고 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지역 예선에서 충격적으로 탈락했다. 한일 월드컵이 열리는 한국과 일본 땅을 밟지도 못하게 된 네덜란드 축구 관계자들은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었다. 이 점을 간파한 박 회장은 당시 강의에서 자세한 영입 방법까지 제안했다.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본국신문에 코치진을 구하는 광고를 조그맣게 내고, 그 후 만약 네덜란드 코치진이 대한민국에 오게 된다면 네덜란드 영사가 통역관 역할을 수행하라고 까지 했다. 이이야기가 수강생 중 한 명이었던 현대 임원을 통해 당시 대한 축구 협회 회장이었던 정몽준 회장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이를 그대로 실행, 수십명의 네덜란드 코치들이 지원을 했고, 그 중 한명이 히딩크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국민영웅 히딩크와 4강 신화가 그의 머리에서 나온 극강의 아이디어였다.
두 번째 사건은 LG와 필립스의 합작을 도운 이야기이다. IMF 시절 현대, 대우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할 때, LG 역시 파주에 크나큰 디스플레이 공장을 설립하고도 외화투자자를 찾지 못해 위기 상태였다.
그 때 박영신 회장이 당시 수강생이었던 LG 부회장에게 네덜란드 기업 필립스와 손잡을 것을 제안했다. 우리나라는 IMF사태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유럽은 유로 존이 막 생기기 시작한 무렵이어서 유로 통화를 전세계 각국에 뿌려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또 당시 유럽
중앙은행 초대 총재가 마침 네덜란드 중앙은행장 출신이었다. 이에 박회장은 필립스를 통해 유럽중앙은행으로부터 5억 유로를 투자받고, 파주 공장 물량의 50%를 필립스 TV부분에 내어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LG부회장에게 전했다. 필립스로서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TV부분 점유율이 일본기업 쏘니에 한참 밀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현재 모두가 알다시피 LG 파주 디스플레이 공장은 무사히 가동됐고, 아직까지도 건재하다.

 

 

박 회장은 사업에서도 한때 삼성, 대우, 동국무역 등 굵직한 기업의 빅 바이어로서 우리나라와 거래를 했지만 월드컵을 끝으로 한국의 섬유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아쉽게도 중국으로 발걸음을 돌렸지만 철저하게 글로벌 마인드를 가진 기업하고만 거래를 한다. 그래서 그의 파트너들은 요령성, 광동성에만 있다. 아직도 중국은 글로벌 마인드가 이2성에만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의 애국심은 변함이 없으며, 대한민국을 위한 조언을 해달라는 부탁에 쓴 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박회장은 네덜란드가 세계로 뻗어갈 수 있었던 비결은 홍콩, 대만으로부터 투자를 적극 유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중국 또한 단시간에 크나큰 성장을 했는데, 그 비결 역시 등소평이 “흰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그만”이라면서 외화벌이를 최우선으로 한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라 본다.
우리나라도 한때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만큼 고도 성장을 해왔다. 이는 6,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재일교포들에게 투자를 유치한 덕택이라 박회장은 생각한다. 그는 현재 한국은 이와 같은 정책이 부재하고 글로벌한 시각이 부족한 것 같아 이 점을 너무나 안타깝게 느낀다.
경제는 철저히 시장 경제에 맡겨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아쉽다는 것이다. 그가 29살의 나이에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네덜란드는 자국민과 똑같이 대우해줬다. 자금 융통을 비롯한 각종 규제완화 혜택도 외국인이라고 차별하지 않고 주어졌기 때문에 이처럼 회사가 커나갈 수 있었다고 박 회장은 말한다. 40여년 전 그 당시도 네덜란드는 철저한 팀플레이로 모든 기업이 운영되었었다. 또한 네덜란드는 기업이 100년이 되면 회사명 앞에 영예롭게 로얄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어 기업인의 자긍심을 심어 주고 있다. 우리나라도 본받아야 할 점이다.
한편 그의 회사에서 실력을 쌓아 독립한 창업자들이 어느새 100여명에 이른다. 그들이 보나미텍스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워나간 뒤, 각 분야에서 기업가로 커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박 회장이다.
그는 70살인 현재도 끊임없이 달리며 네버 기브 업을 외치고 있다. 그에게 마지막 꿈이 있다면 고국에 그가만든 브랜드 ‘빈치스타’를 뿌리내리게 한 뒤, 유서 깊은 브랜드로 키운 다음 한국의 유산이 되게끔 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골프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세계
에서 우리의 프로 선수들이 자신의 명예는 물론 국격을 얼마나 높이고 있는가. 그런데 골프산업에선 아직도 내로라하는 브랜드가 없음에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런 이유로 골프업계에서 빈치스타를 크게 키워보고 싶다. 빈치스타가 그 이름처럼 한국에서도 영원히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길 기대해본다.

 

※ 빈치스타 라이센스가 필요하신 분은 golf289@hanmail.net 으로 문의 바랍니다.

 

 

 

<월간 골프가이드 2019년 2월호>

 

디지털여기에 news@yeogie.com <저작권자 @ 여기에. 무단전재 - 재배포금지>
원포인트 레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