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인쇄공사 허성윤 대표, 연극과 함께한 인쇄인생, 연극계에서 인정받아 동방인쇄공사 허성윤 대표, 연극과 함께한 인쇄인생, 연극계에서 인정받아
월간 PT 2016-03-24 13:52:37

4년마다 치르는 올림픽 선수들에 대해서는 흔히 피땀을 흘린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만큼 육체적인 고통을 이겨낸 사람만이 포디엄에 오를 수 있고, 그 선수들에게만 (색상은 다르지만)메달이라는 상 주이어진다.

선수들은 그 작은 메달을 들여다보면서 지난 4년을 돌아보는 경우가 많지만 무엇이 그들을 기쁘게 만드는지는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매년 말, 누군가 상을 받는 장면을 보게 되지만, 수상자들은 대부분 그 일 관에련된 사람인 경우가 많아서인지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간혹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사례를 보게드 만는데, 그 중 하나가 지난 해 연극협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동방인쇄공사 허성윤 대표가 아닐까 한 다.

취재 | 한경환 기자(printingtrend@gmail.com)



최근 구두의 메카로 알려져 있는 성수동 한 곳에 자리 잡은 동방인쇄공사는 허성윤 대표의 연륜 만큼이나 세월의 훈장을 아로새긴 건물이었다. 제법 넓은 마당 같은 공간을 지나 거친 계단을 올라 이곳저곳을 물어물어 허성윤 대표를 만날 수 있었다. 허성윤 대표는 지난 40년 동안 월간 <한국연극> 발행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감사패를 받았다.

방문 전 이미 인터뷰 약속을 잡았고, 인터뷰 내용에 대해서도 미리 이야기해서인지 자리에 앉아자마 허성윤 대표는 잡지와 연극 포스터가 높인 탁자 위로 연극 이야기를 하나 둘 꺼냈다. 사실 이미 허성윤 대표의 사무실 안 대형 책상에는 연극포스터, 티켓을 비롯한 각종 인쇄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그곳이 인쇄소 대표 사무실이 아니라 연극 극단의 사무실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덩그러니 놓여있는 1997년 인쇄공업협동조합으로부터 받은 공로패가 이곳이 연극단이 아니라 인쇄소라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뒤로하고 가장 궁금했던 것은 ‘어떻게 인쇄인이 연극과 인연을 맺었는가’였다. 그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허성윤 대표가 인쇄를 처음 시작했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시작한 인쇄가 연극으로 이끌다

처음 허성윤 대표를 인쇄인으로 만든 건, 당시 돈이 꽤 됐던 명함 제작일이었다. 명함 만드는 기술을 배우면 굶지는 않겠다고 생각해 발을 들이게 된 것이 인쇄업이다. 초창기 인쇄업이 그렇듯 쉽게 시작한 일은 없었고, 일을 시작하자마자 군대를 가게 됐다. 그렇게 입대한 군대는 백마 부대. 당시 월남 파병이 한창이던 때 허성윤 대표도 월남에 파병하게 됐고, 적지 않은 고생을 치르고 귀국선에 올랐다. 이 때문인지 지금 허성윤 대표의 지갑에는 신분증

과 함께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참전유공자로 인증 받은 녹색 플라스틱 유공자증이 반짝였다. 누군가에게는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게 월남전 참전이고, 그런 이야기를 입을 열면 말하는 이도 있지만, 힘들었다는 것 외에는 말을 아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고국에서 다시 시작한 것이 인쇄업이었고, 우연히 연극협회에 필요한 인쇄물을 제작한 것이 연극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다 .

그렇게 시작된 연극과의 인연은 한 때 인쇄소 물량의 대부분을 연극관련 제품으로 채울 정도였지만 세월이 흐르고 허성윤 대표의 인쇄소 규모가 커졌지만, 극단의 규모는 자라나지 않아 연극관련 인쇄물 비중은 점점 줄어들었다 .

연극이 초창기부터 그리 후한 상황은 아니었고, 더구나 당시에는 극단 재정지출의 상당부분이 인쇄물 제작비였던 때인지라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인쇄를 하려는 바람에 크게 남는 장사도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라도 일거리를 받으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는 생각에 끈질기게 연극관련 인쇄물을 만들었고, 그게 동방인쇄공사를 키운 근간이 됐다.

 

연극과 함께한 세월 잡지에 남다

한참을 이야기 하던 허성윤 대표가 갑자기 잡지 한권을 전해줬다. 건네 준 잡지는 피에로 분장을 한 어린이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던 1983년 5월호 ‘한국연극’이었다. 어린이 연극을 살리자는 특집이 실린 이 책은 원래 너무 낡아서 보기 힘들었던 30년 전 잡지를 일일이 스캔하고 인쇄, 제본해 새롭게 만든 책이다.

그 안에는 흑백 사진이지만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고 있는 30년 전 젊은 시절의 허성윤 대표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그 안에는 70년대 초반부터 약 10년간 연극계를 주름잡던 원로들의 이름과 허성윤 대표와의 에피소드들이 그야말로 깨알같이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술자리에서 막걸리를 주고받으면서 나눈 내용을 인터뷰로 엮은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연극인과 촘촘히 엮인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의 과거를 돌아보기에는 특이한 자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너무 길어지는 과거 이야기는 이곳에서 찾아보라는 배려로 이해했다.

 

인쇄의 미래는 역시 맨파워

한참을 인쇄인이 아닌 연극인 허성윤과 대화를 나눈다는 생각이 들 무렵, 이제는 인쇄계 원로가 된 허성윤 대표가 연극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인력난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밝힌 대목이었다. 한 곳에서 오랫동안 제대로 일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힘들다는 건 어제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허성윤 대표가 생각하는 인력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제대 군인을 재교육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다. 최근 취업난도 심각한 만큼 제대한 인력들을 인쇄인으로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다. 물론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적지 않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와 관련 단체로부터 어느 정도 지원이 필요한 부분이라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수확을 얻을 때가 오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더불어 이를 위해 여러 곳의 지혜를 모아 볼 생각도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 그 결과물이 당장 오지는 않겠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 보기로 했다.


<월간 PT 201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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