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택의 <청구영언> 원본,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확인 추후 영인본과 PDF로 제작 보급 예정
박혜림 2016-09-19 15:18:18
1728년 조선 영조 4년에 고려 말 이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거나 개인 문집에 수록되어 있던 시조 580수를 모아 따로 묶은 책인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 원본이 서울 용산구 소재 국립한글박물관에 소장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나라 최고(最古) 시조집인 <청구영언>(靑丘永言)은 <해동가요><가곡원류>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시조집으로 꼽히며, ‘단심가’와 ‘하여가’가 한글로 수록된 책이기도 하다. 9월말까지 국립한글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에 전시될 예정이다.

제공|국립한글박물관


<청구영언>(靑丘永言) 원본을 조사한 권순회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는 이번에 원본으로 확인된 <청구영언>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728년 중인층 전문가객(시조를 전문적으로 가창하던 사람)이던 김천택(金天澤)이 편찬한 최초의 가집(시조 사설을 모아 놓은 책). 시조 580수를 수록하였다. 김천택이 편찬한 원고본(原稿本)이다. 「청구영언」 편찬 이전에 시조 사설은 개인 문집에 수록되거나 구비전승 형태로 전승되었다. 그런데 18세기 초「청구영언」이 편찬되면서 문헌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청구영언」 편찬이후 19세기 말까지 대략 170여종의 가집이 간행되었다. 「청구영언」은 이 가운데 편찬 시기가 가장 빠를 뿐만 아니라 다른 가집의 원형적 모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른 가집들은 일단 「청구영언」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면서 편찬 당시의 상황에 맞게 악곡과 사설을 더해가는 방식으로 편찬되었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① “청구영언(靑邱永言)”이라는 제목이 이후 간행되는 가집에 보편명사처럼 널리 사용되었다. 후대의 가집 가운데 김천택이 편찬한 것이 아님에도 10여 종에 “청구영언(靑邱永言)”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이다.
② 이후 간행되는 가집의 악곡 및 사설 배열 방식이 바로 「청구영언」에서 출발한다. 전체적으로 악곡별로 사설을 배열하면서도 그 안에서 유명씨 작품과 무명씨 작품을 구분하고 여기에 주제별로 분류 방식을 더하는 형태는 후대 가집에 그대로 이어진다.
③ 서발문 역시 후대 가집에 그대로 전재(轉載)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정내교(鄭來僑, 1681~1757)의 ‘청구영언서(靑丘永言序)’는 다른 가집에도 여러 번 전재되었다. 이 역시 「청구영언」의 후대적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청구영언」은 애초에 오장환(吳璋煥)이 소장했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진서간행회(朝鮮珍書刊行會)’에서 1948년 활자본으로 간행하여 그 실체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원본은 통문관을 거쳐 한글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청구영언”이라는 제목이 붙은 다른 가집과 구분하기 위해 “청구영언 진본(靑丘永言 珍本)”이라고 널리 통칭하는 바 이는 원본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조선진서간행회본에 근거해서 붙
인 명칭이다. 따라서 원본이 공개되면 이 역시 재고해야할 사항이다.
이처럼 중요한 가집임에도 불구하고 「청구영언」은 한글박물관에 전시되기 이전까지 원본의 실체가 공개된 적이 없다. 이 가집을 소장했던 이겸노 선생이 서울대학교 정병욱, 영남대학교 심재완 선생 등 아주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잠깐 보여주었을 뿐이다. 고전시가 전공자들 가운데 원본을 직접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유이다. 다만 “도난당했다”, “훼손이 심해 공개하지 않는다”는 등의 헛소문만 횡횡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전시가 연구자들은 조선진서간행회 활자본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이 판본의 여러 군데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번에 원본을 열람해보니 표제가 “靑邱永言”이 “靑丘永言”으로, 중간의 제목에서도 “無名氏” 항목이 “無氏名”으로 잘못 인쇄된 사실을 담박에 확인할 수 있었다. 1999년 한국고전문학회에서 이 가집의 무명씨 항목을 대상으로 한 발표가 있었다(김용철, 『진본 청구영언』 「無氏名」의 분류체계와 시조사적 의의). 지정토론자가 “無氏名”이 “無名氏”의 오류 아니냐는 질문을 했는데 원본을 확인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어떠한 결론도 낼 수 없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2차 자료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빚어진 해프닝이다.
이처럼 원본을 영인하는 것은 고시조 연구에 더 없이 긴요하다.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청구영언」은 중고등학교 국어 및 문학 교과서, 문학사 및 개론서 서술에서 빠짐없이 언급되고 있다. 최초의 가집은 김천택이 편찬한 청구영언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국민 상식이다. 하지만 원본은 누구도 확인할 수 없었던 상황이다. 따라서 원본이 영인되면 교육현장에서도 널리 활용될 수 있을 것이고, 그 의의도 적지 않다.
「청구영언」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노래도 불리던 것들이다. 이 노랫말들을 얹어 부르는 음악을 ‘가곡’창, ‘시조’창이라고 한다. 가곡이 정격이고 시조는 19세기 이후 등장한 대중적 창법이다. 가곡은 중요무형문화재 30호이면서 2010년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 가곡의 노랫말을 모아 놓은 책이 바로 가집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한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천택 편 「청구영언」이다.



<월간 PT 201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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