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인쇄술과 미래사회 종이와 인쇄술에 관한 오해와 진실 종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진단
김재호 2014-11-04 15:26:37

종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진단

종이, 기록물 의미를 넘는 하나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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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영국 BBC는 이색적인 다큐멘터리를 선보였다.
종이책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출판 관계자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책 마지막 장?(Books-The Last Chapter?)’이었다.
문명은 항상 편리하고 발전된 매체로 그 중심을 옮긴다. 길거리에 붙은 방문이 정보를 제공하던 시대에서
각 가정에 배달되는 종이 신문 뉴스가 최고의 정보 제공 수단이던 때가 있었다.
그 후 라디오가 등장했고 텔레비전이 뒤를 이었다. 정보는 이제 영상과 소리를 함께 타며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사회는 점차 용도의 다양화,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 개성추구의 두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종이는 단순한 기록물의 의미를 뛰어넘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모습을 갖추어왔다.


취재 | 오석균 기자(printingtrend@gmail.com)

 

01. 종이인쇄술과 미래사회 종이와 인쇄술에 관한 오해와 진실

 

종이(Paper)의 사전적 의미는 식물의 섬유질을 물에 불려 평평하게 엉기도록 하여 말린 것이다. 책, 신문 외에도 공작, 건축 등 여러 분야에 사용된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료인 펄프가 필요한데 펄프는 Pulper작업(펄프를 물에 푸는 것) → 원료 농축·희석·세척작업 → 고해 작업(긴 섬유를 절단하거나 섬유자체의 내면에 물이 들어가게 하여 표면에 털이 일어나게 하는 것) → Sizing작업(종이가 잉크에 번지지 않도록 처리) → 전료첨가작업(섬유의 사이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작은 구멍 등을 메꾸어주기 위해서 광물성 분말 등을 배합) → 초지기 (실제 종이를 만드는 기계)로 만들어진다.

 

물과 혼합되어 초지기로 투입된 종이원료는 초지기의 첫 부분에서 지층을 형성하고, 원료는 평평하게 펼쳐진 상태로 초지기를 따라 흐르며, 원료를 실어 나른 물은 대부분 밑으로 빠진다. 끝으로 종이의 형태에서 아직 남아있는 수분을 눌러 짜내는 과정인 압착파트(Press-part), 수분 완전 제거로 완전한 형태의 종이가 되는 건조파트(Dryer-Part), 종이의 양면을 곱게 눌러 주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균일하고 반질반질한 종이 완성되는 광택단계(Calender-Part)를 거쳐 종이가 완성된다.

 

종이의 역사
이집트의 파피루스는 엄밀히 말하면 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사람들이 무언가를 기록하기 위해 돌·금속·찰흙 외에 나무껍질·나무·대나무 등을 사용하였는데, 이런 재료들 중에서 오늘날 종이에 가장 가까운 것은 이집트의 파피루스(기원전 2400년경)다. 종이의 역할을 하던 물건들이 출토되는 장소가 있던 그 시대를 가리켜 ‘도서관 제1의 물결’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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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종이는 기원후 105년 중국 후한(동한시대)의 채륜이 발명했는데 나무껍질, 삼베 조각, 헌 헝겊, 낡은 그물 따위를 사용하여 종이를 만들고, 이를 ‘채후지(蔡厚紙)’라 불렀다. 이후 채후지 2C → 당지 3C → 사마르칸드지 7C→ 이집트 아마지 10C → 스페인 등 구라파 11C (갈대를 펄프로 사용) → 지중해 연안 그리스 12C → 이탈리아 12C → 독, 프, 영 금속활자인쇄 시작 14C → 1804년 포드리너 형제 장망식 초지법 발견, 1809 존 딕킨슨 환망식 초지법 발명으로 이어졌다.


종이 인쇄술
종이 인쇄술은 5~6 세기경 중국에서 시작됐는데 당시의 인쇄술은 아직 글자 하나하나를 조각하는 기술까지 이르지는 못했고 나무판에 쓰고자 하는 글자들을 새긴 다음 이것을 종이에 직접 찍어내는 방법으로 오늘날의 판화기법과 같았다. 목판을 이용한 방법은 그보다 좀 더 후대에 개발됐다. 목판 인쇄는 대개 7세기 중엽부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740∼50년에는 작은 불상, 경전, 지폐 등을 인쇄하였으며, 그 기술은 동서양으로 전파되었다. 현존 목판인쇄물로써 가장 오래된 것은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있다. 목판인쇄기술의 발달은 대장경판의 조판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세계에 자랑할 만한 대표적인 문화재로 8만 대장경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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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인쇄술과 사회의 관계
책은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오로지 필사를 통해서만 적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비쌌다. 최초의 인쇄술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5~6 세기경 중국에서 처음으로 시작된다. 금속활자의 발명과 사용에 있어서 역사상 고려가 가장 앞섰다는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12세기경 고려에서 놋쇠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썼다는 사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복’자 활자로 증명되고 있다. 이 ‘복’자는 개성(開城) 근처의 고려 왕릉에서 발견되어 1913년 일본인 골동품상이 구왕궁박물관에 팔아넘긴 것으로, 그 크기는1.1×1.0cm 정도이며, 불균형하나 등면[背面]에 구슬 모양으로 찍은 자국이 나 있다. 생김새로 보아 찰흙을 빚은 뒤에 글자 면(面)에 구슬같이 생긴 나무 끝으로 둥글게 찍고, 반쯤 말린 다음 글자를 새겨서 흙활자를 만들어 보기자[見本字]로 하고, 해감모래 거푸집을 만들어 놋쇠를 부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방법은 해감모래 거푸집으로 해동통보(海東通寶)를 주조해 낸 방법과 같은 것이다. 문헌상 금속활자로 간행된 최초의 책으로 밝혀진 것으로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려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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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금속활자의 제작방법
금속활자는 주자(鑄字)라고도 한다. 고려·조선 시대의 금속활자는 구리·철·납 등 여러 가지 금속이 사용되었으나, 현대의 금속활자는 납을 주로 하는 합금(合金)이다. 형태는 사각 기둥으로 자면(字面)에 글자가 뒤집어져서 튀어나게 새겨져 있다. 활자를 부어 만드는 데 놋쇠·납·무쇠 등이 쓰였지만, 거푸집도 해감모래·북(鼓) 거푸집에서 찰흙 거푸집으로 변했음을 볼 수 있다. 해감모래 거푸집 방법은 흔히 그린 샌드 캐스팅(green-sand casting)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고운 펄모래로 거푸집을 만드는 방법이고, 찰흙거푸집은 찰흙에 활자의 어미자를 새겨서 외쪽 거푸집을 만들어 부어내는 방법이다.


해감모래 거푸집은 보기자를 평평한 곳에 줄을 맞추어 사이를 떼어서, 맞뚫린 북 모양의 한쪽 거푸집틀을 넓은 쪽을 아래로 대고 씌워서, 그 속에 해감모래를 다져넣고, 그 모래에 활자들이 박히면 뒤집어 놓아 다른 쪽의 거푸집을 맞대어 씌우고 모래를 다져서 북 모양을 만든다. 그 다음에 두 짝 거푸집을 떼어 그곳에서 홈길을 만들기 위한 가지쇠와 보기자를 빼내면 오목한 보기자 틀이 생긴다. 이어 거푸집을 다시 맞추어 묶은 다음 녹인 쇳물을 부으면 활자가 매달려 나오게 된다. 찰흙판에 어미자를 그대로 새기고 어미자마다 쇳물을 넘치지 않게 부어서 만든 것이 찰흙 외쪽 거푸집이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의 발명 및 의의
서양에서 최초의 인쇄술은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에 의해 1430년대에 발명되었다. 구텐베르크는 포도주를 짜는 압축기를 토대로 압축식 인쇄기를 고안했다. 이는 기계를 이용한 인쇄술로 인쇄품질도 좋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인쇄가 가능하게 되어 종이매체(신문, 책)의 대량생산을 가능케했다. 납활자와 잉크, 인쇄기라는 활자 인쇄에 필요한 3요소를 고안해낸 구텐베르크는 요한 푸스트에게 돈을 빌려 마인츠에 공장을 설립하고 ‘42행성서’를 인쇄했다. 유럽인들은 이 신기술을 이용해 14세기 전까지만 해도 성 한 채 값과 맞먹었던 성경책을 인쇄하고, 종교교리서를 출판하는 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모은 소설책이나, 당시 유행하던 체스게임의 기술 등을 소개하는 오락서적, 그리고 축성술과 무기의 구조 등을 설명한 기술서적 등을 출판했다. 물론 당시에 유행했던 책으로는 시계지도나 음담패설, 그리고 정치논평과 같은 책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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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금속활자
고려의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의 것임이 세계적으로 공인된 계기는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말의 사주본(寺鑄本)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공개되고 나서다. 이 책으로 보아 당시 고려에는 서적점(書籍店:書籍院)이라는 중앙관서가 있어 주자(鑄字)·인서(印書) 등을 관장하였는데, 중앙관서가 아닌 한 지방의 사찰에서 이런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서적점에서는 이미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이 상당히 발달하여, 지방의 사찰에까지 그 기술이 파급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시대 금속활자의 한계
구텐베르크 활자는 시민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데 기여한 문명사적 의미 때문에 중요한 것이고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이행과정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정교함과 예술성 그리고 자본주의 정신으로 간행되었다는 점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활자는 근대 산업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필수적인 대량생산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중세 봉건사회를 해체시키고 근대사회를 형성하는데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교황에 맞서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는데 만약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없었다면 단순한 한 신부의 소동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주장 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95개조 명제’의 사본을 신속하게 대량을 인쇄해서 먼 지역까지 유포하였기 때문에 종교 개혁을 성공으로 이끄는 핵심요소가 됐다. 그러나 고려의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상정고금예문’이나 ‘직지심경’, ‘청량답순종심요법문’은 당시 고려의 정치 사항을 개선시키는데 도움이 된 서적들이 아니었고, 일반 민중들이 볼 수 있는 책도 아니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인정받는 이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이후 유럽사회의 변혁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간주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사용범위가 제한된 사치품의 성격이 있었다. 고려의 금속활자도 불경이나 중요 서적을 국가가 간행하는 경우에나 사용되었고, 조선 초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금속활자는 ‘대량출판’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대중들의 수요를 위한 책을 편찬하는 데에 금속활자가 사용되지는 않았고, 보존하기 위한 책을 출판하는 데에 주로 쓰였다. 이는 금속활자를 통한 인쇄가 대중들에게 큰 파급효과를 미치지 못했다는 의미도 되는데 한국의 금속활자는 이후 한국의 사회변혁에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고, 이것이 최초의 금속활자가 한국에서 발명되었음에도 그 공로는 구텐베르크에게 빼앗긴 이유이다.


하지만 목활자의 단점을 대체하기 위해 금속활자로 발전시킨 우리 조상들의 창의성을 얕보아 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창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과학을 발달시켜왔으며 당대 최고의 금속활자로 직지심경을 제작하였다. 우리는 현재에 만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창의성과 과학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월간PT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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