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 - 역사로 본 해양활동(우리의 해양사) 우리의 해양사
이명규 2014-05-07 11: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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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장보고 영정
출처. 한국해양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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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조선수군의 주력전선이었던 판옥선
출처. 한국해양재단>

 

해양문화 - 역사로 본 해양활동(우리의 해양사)

 

* 선사고대의 해상활동

주로 해안유적과 패총에서 발견되는 즐문토기는 고대인들이 해상 활동을 했음을 의미한다. 울산 반구대의 암각화는 고대인들의 해상활동을 입증하고 있다. 해안과 도서지역에서 출토되는 흑요석의 타제석기는 고대인들이 연안 항해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주도와 남한 각지에서 출토된 한대(韓代)의 유물과 화폐들은 당시 해상무역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야요이식 토기는 한국의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이며, 일본 마제석검은 청동기 역시 한반도에서 그 기술이 전파된 것이다. 이 외에도 일본의 벼농사, 지석묘 문화 등이 한국으로부터 전파된 것임을 볼 때 고대로부터 활발한 해상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삼국시대의 해상활동

먼저 고구려는 391년에 한강하구에 있는 백제의 관미성을 수륙군으로 공격하여 탈취한 기록이 전하며, 396년에는 수군에 의한 대대적인 백제 공격으로 50여개의 성과 700여 촌을 함락시키는가 하면, 해로를 통해 중국 남조와 사신을 교류하고 404년에는 백제와 왜의 연합수군을 대방 지역에서 격퇴하는 등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 특히 왕성한 해상활동을 보였다.

백제는 4세기 중반에 중국-백제-가야-왜로 이어지는 교역항로를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해상활동을 전개하였다. 367년 이후 왜와 통교한 이래 멸망하는 672년까지 300여 년간 왜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으며, 특히 554년과 663년에는 왜군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또한 백제는 해상을 통해 남조(南朝)와 사신을 자주 교류하였으며, 때로는 고구려에 의해 해로 통행을 방해 받기도 했으며, 498년에는 탐라를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에 강병이 백만명이나 되어 오·월을 침범했다는 기록이 최치원의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에 나타나고 또한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越州) 부근이라 한 기록이 신·구당서에 나타나는 것은 백제의 해상활동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하고 있다.

송서·양서·남사의 백제전화 통전에 백제가 진나라 때 요서, 진평 2군을 점령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그 사실성 여부에 대해서는 학계에 긍정·부정의 양설이 있으나 백제의 해상활동이 활발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신라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 호공의 내항(來航) 이야기 등으로부터 신라가 초기부터 활발한 해상 활동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는 3세기 중기 이후 끊임없는 왜인의 내침을 맞아 지상전으로 항쟁했지만, 295년과 408년에 대마도 정벌을 계획한 것으로 보아 신라가 해상활동의 능력을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해상세력은 5세기 전기에 현저히 강화되었고,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하였으며, 그 후 505년에는 처음으로 선박 이용 제도를 설정하였고, 512년에는 우산국을 병합하였으며, 583년에는 수군과 함선을 관장하는 전문기구로서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여 해상방어 체제를 완비하였다.

신라는 6세기 초기까지 고구려나 백제의 사신선에 편승하여 중국과 사신을 교류했으며, 564년에야 비로소 단독으로 북제에 사신을 보냈다. 그 이후에 신라는 남조·수·당과 해상을 통한 사신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아울러 신라는 기벌포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는데 660년에 당의 백제 원정군을 태자 법민이 100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맞아 기벌포로 진격, 백제의 수군을 격파했다. 669년부터 675년까지 당군의 보급이 이루어지는 해로를 장악, 676년에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과 22차례의 격전 끝에 크게 승리함으로써 당군을 축출하고 통일을 완수하였다. 

 

* 발해의 해상활동

중앙 관청인 공부 산하의 지사로서 수부를 두어 선박의 건조와 관리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712년에 발해와 당은 국교를 열었으나 거란 세력의 방해로 요서지방의 육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주로 해로를 이용하여 교류를 했다. 한 편 산동반도의 등주에 발해관을 개설하여 사신을 영접하고 무역을 하였으며, 727년에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이후 해상을 통하여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732년에는 해상을 통하여 중국 본토인 등주를 공격하여 점령하기도 하였다.

 

* 통일신라의 해상활동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후 당군 축출 과정에서 수군을 강화하고 정비하였으며, 678년에는 선부령 1인을 두어 수군 운영 체제를 강화하였다.

문무왕은 죽은 후에 대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해방이 나라 안위의 중요한 일임을 표명했다. 이후 828년에 청해진, 829년에 당성진, 844년에 혈구진 등 해방과 관련된 진을 설치하였다.

삼국통일의 전쟁과정에서 서로의 관계가 소원해졌던 신라와 당은 735년에 관계를 회복한 이후 해상을 통해 교류를 광범위하고 활발하게 했으며, 그 결과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인의 해외진출과 민간 무역이 성행하면서 해상활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고려의 해상활동

고려는 962년에서 1150년까지 57회, 송은 34회에 걸쳐 사신을 각각 파견하였으며, 아울러 사신들에 의한 부대무역(附帶貿易)이 성행하고 있었다.

고려와 송의 해상무역은 주로 송상(宋商)에 의해 주도되었고, 송상은 1011년에서 1273년까지 260년 동안 120여 회에 걸쳐 5,000여명이 내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역 활동은 남송이 멸망한 후부터 중단되었다. 이것은 장보고의 활약 이후 동북아시아의 해상무역에 대한 주도권이 우리 민족으로부터 중국의 송상에게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1세기에 우리 민족의 해외무역활동이 이처럼 쇠퇴하게 된 주요 원인은 거란 세력의 위협으로 옹진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횡단 항로의 사용이 어렵게 되어 산동반도와 강소성 연해에 있던 재당 신라인들의 무역 기반을 상실한 점, 고려 왕조의 소극적인 해외무역 정책, 송상의 적극적인 내항 등이었다.

항몽세력의 선두에 있었던 삼별초는 원종이 몽고에 투항하자 1270년에 난을 일으켰으며, 이후 1274년에 제주도에서 토벌될 때까지 서남해상에서 여·원 정부를 상대로 항쟁을 하였다.

1274년에 여·원 연합군은 고려에서 126척, 원에서 770여척의 전함을 각각 건조한 후 25,600명의 병력으로 합포를 출항, 제1차 일본정벌에 나섰으나 규슈의 하까다에서 태풍을 만나 13,000여 명의 병력을 손실한 후 귀환하였다.

1281년에 여·원연합군(동로군)은 고려에서 900척의 전함을 건조하여 4만명의 병력으로 합포를 출항, 제2차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역시 하까다 만에서 태풍을 만나 실패하고 귀환하였다.

13세기에는 일본 국내 정치의 불안으로 서일본 해상 세력들의 고려에 대한 해적행위(왜구)가 창궐하여 고려의 해변이 피폐해졌고, 1376년에는 조운을 중단할 정도로 큰 피해를 주었다. 고려는 주로 육지에 상륙시켜 육전으로만 대응하다가 이러한 형태의 토벌작전이 갖는 한계를 절감하고서 수군에 의한 왜구 토벌로 정책을 전화하였다.

1377년에 최영이 6도 도통사가 된 후, 고려의 수군 건설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한편으로 최무선에 의해 개발된 화약 무기가 함선에 장착됨으로써 왜구를 제압하는데 결정적인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380년 진포해전, 1383년 박두양 해전의 승리로 왜구를 점차 제압해 가던 고려는 1389년에 100여 척의 함선을 동원하여 대마도 원정을 단행함으로써 왜구를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 조선의 해양활동

조선은 고려 왕조의 멸망이유 중 하나가 해양 방어의 실패에 있었음을 교훈으로 삼아 수군 확장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세종대에는 829척의 함선과 50,177명의 선군(船軍)을 보유하게 되었다.

14세기 후반에 고려의 강력한 대응으로 왜구가 수그러들었지만, 14세기 말부터 다시 내침하기 시작함에 따라 1419년에 조선은 227척의 함선과 병력 17,285명으로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 임진왜란의 수군 활약

1592년 4월 13일에 일본이 700여 척의 함선과 158,7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은 전면전 대비 체제가 아닌 소규모 국지전 성격을 띤 지역 방위 체제로 왜구에 대한 방어 체제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초기 대응에서 실패하였다.

조선 수군은 늦게나마 전면전 대비체제로 전환하였고, 이에 따라 이순신 함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연합함대는 임진년에만 4차에 걸친 해상작전을 전개하여 모두 10차례의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은 해상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임진년의 해전에서 승리한 덕분에 일본군의 수륙병진전력은 실패 하였으며, 당시 평양에 있던 소서행장의 진격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본국과의 해상 보급로가 막힌 것을 인식한 일본군이 부산으로 총퇴각하는 등 일본은 조선 점령 전략의 근본적인 수정을 강요당하였다.

이순신은 여수 본영으로부터 거제도에 있는 일본군 근거지까지 원거리 출전을 해야만 하는 현실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1593년 7월 15일에 한산도에 전진 기지를 설치하고 함대를 주둔시켰으며, 이로써 그는 거제도 이서 해역의 해상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1593∼96년 사이에 행해진 강화 회담의 기간 중 조선 수군은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에 의해서 함대 전력의 증강과 보존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결전의 시기에 대비하고 있었다.

1597년 2월 통제사 이순신이 원균으로 교체되고 한편으로 강화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일본의 재침이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조선 수군은 괴멸되었다.

1597년 7월에 통제사로 재기용된 이순신은 12척의 패잔함대를 수습하여 9월 16일에 명량 해전에서 133척의 일본 함대와 싸워 대승함으로써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것은 물론, 세계해전사상 전무후무한 대승리를 한 명장으로서 자신의 위명을 역사에 길이 남기게 되었다.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은 함대 증강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명의 수군과의 연합작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하다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전사하였다.

 

* 조선후기 해상활동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수군 진관 체제를 정비하였고, 수군 진영을 개폐하였으며, 함선의 건조와 개량을 하는 등 수군의 복구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여 통영(統榮)에서 연 2회의 수조(水操)훈련을 실시했으나 18세기 이후에는 유명무실해졌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면, 조선 수군은 형식상으로만 존재하는 무기력한 수군으로 이미 전락된 상태였으며, 조선 정부의 무능과 해방(海防)에 대한 무관심, 국제 정세와 함선, 무기 등의 발전 기술에 대한 정보 부재로 수군 근대화에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19세기 이후 조선 해안에 접근하는 이양선에 대한 대응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결국 일본에 멸망하고 말았다.

 

※ 본 원고는 한국해양재단이 2010년-2011년 추진한 "해양교육교재 개발" 및 "해양교육 교과관련 콘텐츠 개발" 사업의 성과물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 한국해양재단 www.changpog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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