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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독립이 진정한 경제 독립이다
신용경제 2019-11-08 11:52:03

김동호
중앙일보 논설위원

 

한·일 경제전쟁, 투키디데스의 함정
기원전 5세기 그리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다툼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아테네 소속으로 이 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에 따른 그리스 몰락을 ‘펠레폰 네소스전쟁사’로 엮어냈다. 여기에 착안해 하버드대 역사학자 그레이엄 엘리슨은 과거 전쟁사를 돌아본 결과 신흥국이 떠오르면 기존 강대국과 반드시 패권 다툼을 벌이는 상황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예정된 전쟁』)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일본 사이에 벌어진 ‘경제전쟁’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상호 파괴적인 전쟁까지 벌이지는 않지만 사실상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난 8월 28일부터 한국의 핵심산업에 없어선 안 될 전략물자 1,194개 품목에 대해 수출을 규제하고 나섰다. 수출 금지는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수출을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 셈이다. 일본의 이 같은 움직임의 배경에는 일본의 경제력 쇠락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 일본은 세계 3위 경제대국이라고 해도 허울뿐이다. 세계 2위 중국과의 격차가 너무 벌어져 있다. 2001년 중국의 3배에 달했던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2010년 역전된 데 이어 지금은 36%(일본 4조 9710억 달러, 중국 13조6080억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더구나 일본은 식민 통치를 했던 한국과의 격차도 좁혀지고 있다. 2001년 8배였던 한·일 GDP 격차는 지난해 3배로 좁혀졌다(한국 1조6190억 달러, 일본 4조9710억 달러). 일본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을 거치면서 사실상 성장을 멈추고 제자리걸음 한 결과다. 게다가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이 지난해 3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일본과 나란히 3만 달러대 국가 그룹에 진입했다.

 

한국경제의 급소 찌르는 수출규제
게다가 한국 기업의 경쟁력은 일본을 압도할 만큼 성장했다. 경쟁력은 스피드 경영에서 나왔다. 한국은 1983년 반도체에 뛰어들어 생산설비를 과감하게 늘리는 치킨게임으로 패권을 차지했다. 삼성전자가 주도한 이 전략은 지난 200년간 경제학 교과서에 공인된 ‘국제분업’과 ‘비교우위’의 결과였다. 한국은 일본의 원천기술을 그대로 가져다 썼고 생산기술 혁신에서 승부를 걸었다. 삼성전자는 이런 구조를 발판 삼아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도약했다. 반도체는 1970년대 미국 인텔이 주도했지만, 일본이 소형화에 성공하면서 미국을 제치고 80년대 들어 주도권을 쥐었다.
하지만 일본은 과잉기술·과잉제품에 발목이 잡혔다. 소부장의 품질이 너무 고도화하고 정교해질수록 인건비와 함께 비용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 틈을 파고들었다.
개발 스피드를 높여 비용을 낮췄다. 이 전략이 먹히면서 삼성전자는 90년대 들어 느림보가 된 일본 기업을 따돌렸다.
이 같은 ‘한·일 반도체 연합’은 정치가 개입하면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일본이 징용노동자 판결과 관련한 한국 태도에 대한 불만을 한국의 ‘화이트 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배제라는 경제 보복으로 맞대응하면서 한국경제의 급소를 찔렀다.
일본은 지난 20년간 끊임없이 반도체 패권 되찾기에 도전했다. 2003년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을 중심으로 ‘타도삼성’을 내걸고 진행한 ‘히노마루 반도체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미쓰비시·NEC·히타치 D램 부문을 합병해 출범한 엘피다는 자국 반도체 업체 간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결국 파산, 2013년 미국 마이크론에 매각됐다.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시스템반도체 기업으로 공동설립한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 역시 올해 5월 국내외 13개 공장에서 생산을 중단하고 그룹 직원 5%에 이르는 1,000명의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더구나 도시바는 메모리 사업부를 2017년 미국 사모펀드 베인캐피탈·SK하이닉스 등이 속한한·미·일 연합에 매각했다. 아무리 뛰어난 반도체 산업 인프라를 갖고 있어도 일본은 반도체 산업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일본의 수출규제도 큰 그림이 보인다.
일본은 삼성전자가 자국의 경쟁 업체를 코너에 몰고 있던 시절(2004년) 화이트 리스트(수출 절차 우대국 명단)에 한국을 포함했다. 그때만 해도 경제력 격차가 컸으니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 사실상 무효화된 것으로 보면서 경제 보복의 칼을 뽑아 한국경제의 급소를 찔렀다. 핵심 타깃은 한국경제의 대들보인 반도체다.
한국으로선 이를 겨냥한 3대 수출규제 품목의 연간 수입액이 7억2,300만 달러(약 8,553억 원)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1,267억 달러(약 150조 원)에 이르는 반도체 수출이 사정권에 들어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전체 수출의 0.001%에 불과 하지만 한국은 수출의 21% 규모다. 산술적 충격은 가공할 만큼 클 수밖에 없다.
 

의존도 낮추고 기술 독립 꾀해야
일본이 한국을 견제하고 나서면서 한국은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됐다. 관건은 한국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의존도를 얼마나 빨리 낮출 수 있는가다.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녹록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껏 가전, 전자, 반도체, 조선 등 많은 산업 분야에서 일본의 절대우위를 하나씩 극복하며 추월해왔다”고 밝혔지만 소부장은 경우가 다르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일본의 첨단 기술을 따라가려면 반세기가 걸린다. 단기간에 국산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뼈아픈 한국의 현실이다. 소부장은 원천기술에서 승부가 난다. 한국은 산업화가 일본보다 거의 100년가량 뒤처졌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부터 산업화에 나섰다면 한국은 해방(1945년)이 지나고 한국전쟁(1953년)을 겪고서야 산업화의 걸음마를 뗐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올해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면서 노벨상 수상자가 28명으로 늘어났다.
한국은 과학 분야에는 여전히 수상자가 ‘제로(0)’다. 한·일 기술격차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산업화가 뒤늦은 만큼 생산기술 혁신에 집중해 경제 성장을 달성해왔지만, 시간의 축적이 필요한 원천기술 개발에는 소홀히 한 결과다. 한국의 진정한 경제 독립은 기술 독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국내 기업이 아무리성장해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일본의 소부장이 대거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의 원천기술은 100년 이상 된 기업이 2만 개에 쌓여 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생산 공정에 없어선 안 될 불화수소·폴리이미드·레지스트의 70~90%를 일본 기업에 의존하는 한국에서 흉내 낼 수 없는 원천기술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불화수소는 소수점 이하 9가 11개인 ‘일레븐 나인’을 사용한다. 한국에는 없는 이런 정밀 소부장이 일본에는 즐비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소부장 육성에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아베 정권의 수출규제를 계기로 소부장의 특정국 의존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면서다. 그 위험은 고무로 나오키가 1988년 『한국의 붕괴』라는 책에서 예견한 대로다. 긴 목 중간을 줄로 묶어 사냥한 물고기를 토해내야 하는 가마우지처럼 한국은 아무리 반도체를 많이 팔아도 일본에 소부장을 의존하는 한 가마우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그의 말대로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지난해까지 54년간 누적된 대일 무역적자는 6,046억 달러(약 708조 원)에 달한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한 데 대해 “검토해 보니 전략물자가 일본에서 1,194개가 되는데, 우리한테 진짜 영향을 미치는건 ‘손 한 줌’ 된다”고 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일본 수출규제의 영향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도 소부장 중심으로 해마다 200억 달러가 넘는 대일 무역적자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분석한 ‘한·일 주요산업 경쟁력 비교와 시사점’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수입의존도가 90% 이상인 품목은 48개에 달한다.
이 핵심 물자가 한국 제조업의 숨통을 조일 수 있다.
 

일관성 있는 전략 통한 진정한 경제 독립 절실
그런데 원천기술의 격차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무엇보다 일본을 넘어서기 어려운요인은 정부의 비효율적 경제정책이다. 한국은 이미 박근혜 정부 당시 구조개혁에 실패하면서 군산·구미·창원·거제·울산 산업단지를 러스트 벨트로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는 ‘소득주도 성장’의 질주마저 시작됐다. 2년 만에 최저임금을 29.1% 올리고 근로시간을 획일적으로 규제하면서 한국 기업은 기진맥진하고 있다. 이런 경제 환경을 피해 제조업의 탈(脫)한국 러시도 본격화하고 있다. 경제 성장률은 1%대로 곤두박질치기 직전 상황에 몰리고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시작되고 3개월이 지나도 당장 국내 기업에 가시적인 영향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일본이 수출규제에 필요한 제도만 만들었을 뿐이고 수출금지에 나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본의 강력한 소부장 생산 시스템을 연구하고 따라잡는 절치부심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 모두 5개의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는 핵심 기술의 자체 개발이다. 언제든 무기화할 수 있는 전략물자는 비용이 들어도 자체 생산이 필요하다. 국내 반도체 업체가 당장
불화수소를 자체 생산하고 나선 것이 좋은 사례다.
둘째는 갑을 관계에서 벗어난 선진국형 강소기업 육성이다.
유럽 경제의 견인차인 독일 경제의 저력은 1,300개에 달하는 히든챔피언(강소기업)에서 나온다. 한국은 강소기업이 23개에 불과하다. 강소기업은 특정 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전 세계 수요처를 대상으로 제품을 공급해 독자적 생존력을 가졌다. 경제의 글로벌화가 진행될수록 그 위력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셋째는 이런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 구축이다. 정부는 2001년 ‘부품·소재 전문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지만 지원체계가 충분하지 않다. 개발된 소재의 신뢰성을 높이려면 인증이 가능해야 하지만, 국내에 인증 장비가 없어 기술이 사장되는 경우가 많다.
넷째는 활발한 인수·합병(M&A) 분위기 조성이다. 지금은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라는 과도한 프레임 때문에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교류가 많지 않다. 그러니 국내 대기업이 국내 중소기업 기술을 경시하면서 선진국에서 검증된 기술만 들여온 결과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 아닌가. 독일 히든챔피언처럼 전문인력 공급이 원활하도록 기술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소재·부품·장비를 우리가 다 만들겠다는 자세도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처럼 100대 핵심 전략물자를 최대한 국산화하되 비교우위가 없는 것들은 수입처 다변화를 통해 특정국가 의존도를 줄여나가야 한다. 대기업은 전략적으로 국내 강소기업에도 제품을 공급할 기회를 줘야 한다. 일본 기업이 점유하고 있는 특허 장벽을 넘는 것도 숙제다. 더구나 제품 양산이 가능해도 풍부한 공급처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
이처럼 소재·부품·장비 육성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지금부터 일관성 있게 20년 이상 밀고 가야 가능하다.
그래도 해야 한다. 이 숙제를 해내야 진정한 경제 독립이 가능하다.

 

필자약력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경영학 박사/ 前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중앙일보 경제연구소장/ 現 중앙일보 논설위원
주요저서 : 『대통령 경제사』, 『반퇴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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