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박원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
대내외적 요인에 따른 한국수출 내리막길
우리나라 무역 분야는 지난해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수출은 전년 대비 10% 넘게 감소했고 수입도 5% 이상 줄었다. 무역 규모가 가까스로 1조 달러가 넘었고 흑자 기조를 유지한 게 그나마 다행이다. 가장 큰 이유는 2018년 말까지 수출 성장을 견인했던 반도체 경기가 곤두박질쳤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인 메모리 가격이 급락하면서 반도체 수출은 30% 가까이 줄었다. 물론 다른 요인도 있다. 글로벌 경기 흐름에 민감한 석유화학과 기계제품 수출이 부진했던 것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석유화학과 석유제품의 수출 감소폭은 12~15%에 달했다. 반도체와 석유화학 제품이 총수출 감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5%에 육박한다. 자동차와 철강 등 다른 주력 품목이 이를 만회하지 못하면서 전체적인 무역 성적은 낙제(무역 규모 1조 달러 미달)를 겨우 면한 셈이 됐다.
물론 대외 환경 탓도 무시할 수 없다. 미·중 무역 분쟁과 이에 따른 중국 경제 침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유로존의 불확실성이 그것이다. 이들 악재가 세계 경제에 찬물을 끼얹으며 교역량도 줄었고 이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직격탄을 날렸다. 여기에 빅 데이터와 공유경제,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전 영역으로 확산되면서 기존 산업 판도를 바꿔놓고 있는 것도 무역에 영향을 주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자동차 산업이다. 전기 자동차와 자율주행, 차량 공유 등 새로운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하며 자동차 수요가 줄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응해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은 감원과 공장 축소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올해도 이런 요인들은 무역 분야에 계속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중국이 우여곡절 끝에 작년 말 무역 협상 1단계에 합의했지만 잠복된 불안 요인을 완전히 제거했다고는 볼 수 없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도 1단계 합의가 한국의 수출 증대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과 중국이 관세 폭탄을 주고받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한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수출 물량이 크게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중국 경제 부진에 맞물린 한국 무역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미·중 무역협상이 단기간에 끝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겉으로는 통상 문제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중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과 함께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을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고, 미국은 이런 중국을 따돌리려는 목적으로 무역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이 화웨이를 비롯해 중국의 기술 기업들을 압박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미·중 무역 협상 1단계 합의는 타결이라기보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치적 필요성으로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한 측면이 강하다. 두 지도자 모두 국내 정치 상황에서 궁지에 몰리자 무역협상 1단계 합의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중 무역전쟁은 올해도 글로벌 교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2단계, 3단계 협상이 순풍을 타면 지난해에 비해 환경이 좋아질 것이고 한국의 수출 실적도 기대 이상으로 높아질 수 있다. 반대로 1단계 합의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이 다시 격돌한다면 상황은 더 악화될 수 있다. 변수가 너무 많아 쉽게 예상하기 어렵지만 많은 전문가가 비관론에 방점을 찍고 있다. 중국은 끊임없이 대국(大國)을 지향할 것이고 패권국인 미국은 이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중 통상마찰과 갈등으로 인한 불확실성은 올해도 무역 분야에서 상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와 맞물려 주목해야 할 것이 중국 경제다. 중국은 한국 수출의 30% 가까이 책임지는 국가다. 중국 경제가 휘청거리면 수출 물량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이 보는 중국 경제 전망은 어둡다. 지난해 3분기 중국의 성장률은 1992년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미국과의 무역 분쟁으로 수출이 꺾인 데다 내수 진작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도시의 부동산 거품이 심한데다 기업들의 부채가 급증해 소비를 촉진하는 정책을 써도 기대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수출과 소비, 투자가 모두 저조한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중국 정부는 금리 인하와 세금 감면 등 다양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만회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중국 경제가 계속 부진하면 한국의 무역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돼 있다.
2020 무역의 청신호
다행스러운 점은 중국을 제외한 다른 신흥국들의 무역 환경은 다소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은 작년과 크게 달라질 것이 없지만 일부 신흥국은 성장률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인도는 6.1%에서 7%로, 러시아는 1.1%에서 1.9%로, 브라질은 0.9%에서 2%로 성장률이 높아질 것으로 예측됐다. 이에 따라 세계 경제성장 전망치도 올해 보다는 소폭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성장률만큼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수출 여건에는 긍정적인 요인이다.
국제유가와 환율 동향도 주시할 필요가 있는 변수다. 환율과 유가흐름은 올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다만 돌발 변수가 생기면 양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 환율과 원자재 가격 변동은 그 원인이 너무 많아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환율은 미국의 원화 절상 압력과 경상수지 흑자 상황은 강세 요인이지만 한국과 미국의 금리 차 역전과 세계 경제 불안으로 달러 수요가 높아지는 것은 약세 요인이다. 국제유가는 세계 경제 회복 속도가 빠르지 않기 때문에 크게 움직일 확률이 높지 않다.
올해 무역 분야를 전망할 때 희소식은 역시 반도체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 2분기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회복될 것으로 전망된다. 빅 데이터와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등 신기술 분야가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반도체 수요가 늘어나게 된다.
2018년에는 구글과 아마존 등 글로벌 정보기술 기업들이 데이터센터를 확충하며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견인했는데 올해부터는 여기에 더해 수요처가 다변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재고가 줄고 스마트폰에 탑재하는 메모리의 용량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측면이다. 반도체 수출 회복 수준은 슈퍼 호황기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지난해보다 개선될 것만은 분명하다. 고용량·고성능 제품이 출시되며 컴퓨터도 반도체와 더불어 수출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자동차는 기저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수출 품목에 속한다. 거대 시장인 미국 경기가 좋아지고 있다는 점이 청신호다. 미국에서 자동차 수요가 늘어나면 한국 수출도 증가한다. 부가가치가 높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과 전기차 등 친환경차 중심으로 수출이 증가하면서 채산성도 좋아질 수 있다. 글로벌 경기에 영향을 받는 석유화학과 일반기계도 긍정적인 전망이 우세한 편이다. 두 품목은 미국과 일부 신흥국에서 수요가 살아나며 수출 성장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경기에 민감한 품목들은 미국과 중국, 미국과 유럽연합의 통상 갈등이 다시 불거지면 기대한 만큼 수출 실적을 거두기 어려울 수도 있다.
부진한 품목과 불확실성 도사려
공급 과잉에 따른 수요 위축과 세계 시장의 경쟁 심화로 올해도 회복이 힘든 품목들도 적지 않다. 디스플레이와 스마트폰을 비롯한 무선통신기기, 섬유 제품 등이 그것이다. 디스플레이의 경우 LCD는 이미 단가가 급락해 경쟁력을 잃었고 OLED도 수요에 비해 생산량이 많아 실적이 좋아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무선통신기기는 5세대 이동통신 확산의 호재가 있기는 하지만 화웨이와 샤오미 등 중국 기업들과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데다 국외 생산 물량이 늘고 있어 수출이 증가하기 어렵다. 철강 제품도 수요가 크게 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의 수입 규제 등 악재가 많아 올해 수출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교역량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세계 경제의 성장 동력이었던 중국의 침체가 단기간에 좋아질 수 없고 유럽 경기도 호황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 수요가 급감해 독일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유럽은 더 힘들어질 수 있다.
기대할 수 있는 곳은 미국과 일부 신흥국이다. 세계무역기구(WTO)는 미·중 무역 전쟁이 확산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올해 세계 상품 교역이 물량 기준으로 2.7%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세계 경제성장률을 밑도는 수준이다.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지정학적 갈등 등으로 교역량이 크게 줄었던 지난해만큼 나쁘지는 않겠지만 올해도 무역 부문의 부진이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다.
한국은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 경기가 살아나면서 1년 이상 지속된 역주행이 멈출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무역 분쟁과 한반도 주변의 불확실성 등 각종 악재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에서 낙관할 수만은 없다.
위기 속 기회를 찾아라
대외 환경은 어쩔 수 없지만 무역 분야에서도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대비가 필요하다. 국제무역연구원은 3가지 측면에서 무역 정책을 제언하고 있는데 설득력이 있다. 우선 단기 변동성에 대한 대응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보호무역주의와 유럽과 중동, 남미 등 지정학적 불확실성으로 돌발 변수가 생겼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핵심이다. 이를 위해 다국적 통상 협력을 강화하고 중국과 미국, 일본 등 특정 국가에 치중된 수출 의존도를 낮출 필요가 있다. 신남방과 신북방 정책은 좋은 대안이다.
조선과 철강, 자동차, 건설 등 기존 주력 업종의 경쟁력을 키우는 일도 중요하다.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이 무서운 속도로 추격하고 있는 만큼 신기술 기반의 고부가가치 제품과 서비스로 체질을 바꿔야 한다.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초고속 통신망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접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도 기업들이 이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규제 완화 등 다각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벤처기업과 스타트업들이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 조성도 시급하다. 수출은 이러한 전체 산업정책의 한 축으로 핵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지금은 대기업이 무역을 주도하고 있지만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의 수출 비중을 높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기업과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무역 분야의 중·장기 정책 과제로 올려놓을 만한 항목이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무역 분야는 녹녹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 속에 기회가 있는 법이다. 호재를 잘 살리고 리스크를 잘 방어한다면 기대 이상의 수출 실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약력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학·석사/ 前 매일경제신문 증권부 차장, 중소기업부장/ 現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
주요저서 : 『인문학, 주식시장을 이기다』, 『춘추전국의 전략가들』, 『현대자동차 왜 강한가』, 『대학민국 부동산 경제학』, 『우화경영』, 『새판을 짜다』 등 다수
<월간 신용경제 202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