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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배낭메고 세계여행 - 애칭 많은 체코 프라하 중세의 향기 머금은 천 년의 고도를 찾다
신용경제 2018-01-05 11:23:06

‘체코’하면 ‘프라하의 봄’을 떠올렸다. 그러다 몇 년 전 SBS 드라마 ‘프라하 연인’이 인기를 끌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드라마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유명세를 과시하고 있다. 괴테는 ‘백탑의 도시’라고 했고, 로댕은 ‘북쪽의 로마’라며 이곳을 사랑했으며, 작곡가 드브로자크의 나라로 ‘유럽의 음악학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수많은 애칭만으로도 유럽 문화의 중심지이자 유럽인의 사랑을 듬뿍 받아 온 아름다운 도시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글·사진 : 김정일
4.19 혁명정신 선양회 회장
사호선문학회(四護旋文學會) 고문
중앙대학교 총동문회 고문

 

 

프라하, 도시 전체가 박물관
중세의 모습을 고이 간직한 채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 실제로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역사적인 건물들이 제 모습을 뽐낸다.
이미 198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세계 6대 관광도시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 명성을 날리고 있을 뿐 아니라, 해마다 1억 2천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프라하를 찾는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프라하 봄이 떠오르는 ‘바츨라프 광장’이었다. 이 광장은 구시가지의 광장과 함께 프라하를 대표하는 광장이다. 바츨라프 광장은 체코 국립박물관부터 무즈택 광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750m, 폭 60m 달하는 긴 대로이다. 광장에서 박물관 쪽을 바라보면 마치 우리나라 광화문 앞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처럼, 광장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인물이 말 위에 앉아 깃발을 들고 지켜보고 있다. 이는 체코의 수호성인이자, 930년경 보헤미아 땅의 군주였던 성 바츨라프 왕이다.
이 광장은 14세기 카를 4세 명으로 유럽 최초의 도시 계획에 따라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신시가지를 건설했을 당시에는 소, 말 등의 가축을 사고파는 시장이었다가 19세기에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오늘날의 광장이 되었다.

우리나라 광화문광장에서 4·19 혁명, 6·29 민주항쟁, 촛불 혁명 등 각종 민주항쟁이 벌어지듯 이곳 바츨라프 광장에서도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다.
1968년 체코인들의 자유, 인권, 민주를 향한 외침인 ‘프라하의 봄’ 은 이 광장에서 시작되었으나 구소련의 탱크에 무참히 짓밟혔다.
자유에 대한 이런 열망이 바탕이 되어 1989년 11월 극작가이자 인권 운동가 바츨라프 하벨은 반체제 연합인 ‘시민포럼’을 조직했고, 공산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며 일어난 사건이 ‘벨벳 혁명’이었다. 체코 민주화 혁명이 성공을 거둔 새로운 희망의 진원지, 바츨라프 광장은 체코 현대사의 중심지인 것이다.
현재 광장 양쪽에는 은행, 레스토랑, 카페, 백화점, 클럽이 늘어서 있다. 오늘날 프라하에서 가장 번화하고 현대적인 거리로 손꼽힌다. 아름답고 화려한 거리의 모습에 가려 전 세계 관광객들은 과거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찾아오는 이도 많을 것이다.
광장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재래시장인 하벨 시장은 관광객들이 붐비는 서울 남대문시장과 흡사하다. 이 시장은 프라하 시민에게 달걀, 치즈, 우유 등 낙농 제품 판매를 시작으로 출발하였는데, 현재는 관광객을 위한 각종 기념품과 과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기념으로 이곳 특산물인 체리를 산 뒤 구시지 광장으로 쪽으로 걸어갔다.

 

 

건축물 박물관 구시가지 광장
체코의 비장한 역사를 그대로 떠안고 있는 ‘구시가지 광장’은 1437년 종교 개혁자 안 후스의 추종자들이 처형되었던 장소이자 30년 전쟁 때인 1621년,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한 27명의 프로 테스탄트 귀족들이 참수를 당했던 장소다. 틴 성당과 마주하고 있는 천문 시계탑 아래 바닥에는 그때 처형된 귀족들의 머리가 놓였던 자리에 십자가 표시와 함께 1621년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어 당시의 참혹했던 역사를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다.
구시가 광장은 프라하 천 년의 역사가 응축된 유서 깊은 장소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프라하 관광의 기점이자 최고의 심장부이다. 광장 주변은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아르누보 양식을 모두 볼 수 있어 유럽의 건축 박 물관이라고 불린다.
구시가지 광장에서 한쪽을 돌면 구 시청 건물에 천문시계가 걸려 있다. 체코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명소 중 하나로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 우리 일행이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4시 정각이 되자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맨 먼저 예수님의 12 사도를 상징하는 인형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다음으로 상단의 시계에 달려 있는 4명의 인형이 활동을 시작하였다. 해골 모양의 인형, 터키군인 모양의 인형, 유대인의 인형, 그리고 거울을 손에 든 인형이 움직였다. 이중 해골 인형은 최후의 심판 즉, 죽음을 상징한다. 터키 군인은 오스만 튀르크의 군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정복욕을, 유태인 인형은 인간의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끝으로 거울을 든 인형은 인간의 허영심과 망상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오를르이 천문시계는 1410년 시계 제작자인 미쿠라스와 천문학자인 얀 신델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시계는 상단의 플레나타니유(시간을 나타내는 시계)와 하단의 칼렌다니윰(동양의 간지와 비슷하게 우주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시계)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톱니바퀴와 추로 시계가 작동했으나, 업그레이드해 이제는 전자식으로 움직인다. 하단의 시계에도 4명의 인형이 달려 있는데 1명은 천사, 나머지 3명은 시민계급으로 점성가, 다른 사람은 천문학자와 지식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장 중앙에 자리 잡은 얀 후스는 가톨릭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다가 화형당한 체코의 신학자이다. 광장의 동상은 순교 500주기였던 1915년에 구시가 광장 중앙에 세워졌다. 체코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15세기 종교개혁가 마린 루터보다 한 세기 앞서 종교개혁을 주장 했으며, 신학자로 성직자이면서 카를 대학이라고도 불리는 프라하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부패한 가톨릭 교황과 성직자의 교회 권위를 부정하였으며, 면죄부 판매도 맹렬히 비난했다. 이로 인해 1411년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후 1415년 이곳에서 처형을 당한 슬픔의 현장이기도 하다.
부패한 가톨릭 교황과 성직자의 잘못된 관행 앞에 맞선다는 건, 곧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후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개혁의 중심에 서서 비판했다. 비록 죽음을 당했지만, 그의 죽음은 결국 훗날 종교개혁과 가톨릭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주춧돌이 되었다. 결국, 헛된 죽음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영원히 살아서 후세에게 귀감이 되어준 것이다.
오른쪽은 ‘아담’ 왼쪽 탑은 ‘이브’라 불리는 틴 성당의 쌍둥이 종탑은 구시가 광장의 랜드 마크인 80m 높이의 첨탑으로 한밤중에도 관광객들의 시선을 끈다. 1366년에 건립되어 17세기까지 다양한 건축 양식으로 개조를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인 고딕 양식이 되었으며, 프라하 성의 성 비트 성당과 함께 프라하 고딕 양식 건물을 대표한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고딕 양식의 외관과는 달리, 성당 내부는 바로크 양식을 하고 있다.
구시가지 광장에는 틴 성당 외에 흰색 벽에 옥색의 양파 모양 지붕을 한 바로크 양식의 성 미쿨라세 성당이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성당은 12세기에 세워져 틴 성당이 들어서기 전까지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회합의 장소였다.

 

 

중세 성문 화약 탑에서 체코 최초 석조다리 카를교까지
화약 탑은 원래 구시가지를 지키는 13개 성문 중 하나였기에 프라하 시내에는 이와 비슷한 건물이 많다. 화약 탑은 시민회관과 나란히 서 있으며, 체코 왕들의 대관식 행렬이 지나가던 첼레트나 거리의 시작점이다.
17세기 초 연금술사들의 연구실 겸 화약 창고로 사용되면서 지금의 ‘화약탑’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프러시아 전쟁때 심하게 파괴되었지만 1876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현재 내부는 화약 탑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관이 있고, 탑 꼭대기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로 유명하다. 한 바퀴 돌면서 프라하 전경을 360도로 감상할 수 있었다.
시민회관은 검정 화약 탑과 바로 옆에서 대조적으로 화려한 아르누양식으로 지어져 구시가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건축물 평가받고 있다. 원래 이곳에는 왕궁이 있었는데 17세기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1903년 체코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하여 1912년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300년간 합스부르크왕가의 지배에서 벗어나 1918년에 체코슬로바키아 민주공화국이 선포된 역사적인 장소로 현대 체코의 자존심을 상징하고 있다.
구시가 광장에서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은 골목길로 관광객들을 따라 들어가면, 불타봐 강에 가장 오래된 카를 교에 쉽게 닿을 수 있다.
구시가지와 밀라 스트라나를 이어주는 체코에서는 처음 만들어진 돌다리로 불타바강 위에 세워진 다리 중 유일하게 보행자 전용 다리이면서 프라하 성, 천문시계와 함께 프라하를 대표하는 관광의 명물이다. 전체의 길이는 약 520m, 폭은 약 10m 이며 30개의 성상이 좌우 난간에 각각 마주 서 있다.
1357년 카를 4세 명에 따라 시작되어 1402년 파츨라프 시대에 완공되었는데, 다리 위에 30기의 성인상은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제작된 것이다.

 

고해성사의 비밀을 지킨 안 네포무스키 신부
30기의 성인상 중 흥미있는 볼거리는 안 네포무스키 성상이다. 이 동상 아래 부조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손으로 만져 그 부분만 반질반질하다. 전설에 의하면 보헤미아 왕비의 고해신부 성 요한 네포무크는 왕비가 부정을 고백한 후, 이 비밀을 끝내 지켜 주었다. 이 때문에 왕에게 사형을 선고받고 혀가 잘린 채 불타바 강에 던져졌다. 고해성사의 비밀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버린 최초의 순교자인 것이다. 그가 강에 던져진 다음 날, 강 위에 5개의 별 형상을 한 광채가 떠올라 사람들이 이를보고 시신을 찾아 수습했다. 그래서 그의 조각상 머리 위에 별 5개를 두어 후광을 표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성직자는 고해성사 비밀을 지켜줌으로써 믿음과 신뢰를 얻는다. 성요한 신부는 목숨을 걸고 지켜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빛이 된 것이다. 또한, 요한신부의 죽음을 기리는 명소가 될 수 있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높은 역사의식을 가진 나라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도 그들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상징하는 유적을 지킨다. 체코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를 지켰다. 오늘날 세계적인 명소로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든 이유 중의 하나다. 문화재는 독립된 나라의 자존감과 존재감 그 자체이기도 하다. 겉으로만 봐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체코의 아름다움은 비장한 역사를 담고 있어 여행의 의미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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