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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아픔 치유한 독일 역사의 산 증인 - 베를린
신용경제 2018-04-09 14:25:29

베를린은 유명한 이름만큼 굵직한 역사의 한 장면에 종종 등장한다. 독일의 수도이자 브란덴부르크 공국으로서 독일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도시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국가가 되었을 때 베를린은 동독 내에 있으면서도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분단을 겪는 시련을 겪었기에 우리 민족에게는 더욱 공감대가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1990년 10월 3일,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면서 도시도하 나가 되었다.

 

글·사진 : 김정일
4.19 혁명정신 선양회 회장 사호선문학회(四護旋文學會) 고문 중앙대학교 총동문회 고문

 

아름답지만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드레스덴을 뒤로하고 버스는 베를린을 향해 출발했다. 베를린까지는 약 200km, 시간은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1시간 30분여 정도 달리다가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는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공공화장실 이용이 원칙적으로 유료였다. 공공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약 70센트(우리 돈 약 950원)를 먼저 내야하고,그러면 50센트의 영수증으로 환급받는다.
그 영수증으로 휴게소 매점을 이용할 때 50센트를 할인받을 수 있다. 즉, 매점을 이용하는 사람에게는 20센트(270원)만 받는 꼴이다. 화장실 이용에 대해서 인심이 넉넉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럽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급한 상황에서야 270원이란 이용료가 아깝지만은 않았다.

베를린으로 가는 길은 편도 3차선 고속도로다. 이름 하여 아우토반(Autobahn)! 그대로 해석하면 ‘자동차 전용도로’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와는 달리 오토바이까지 다닐 수 있다. 또, 이곳은 속도제한이 없다. 이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2016년독일 교통사고 사망자 160명 가운데 110명이 이 속도 무제한 구간에서 목숨을 잃었단다.그래서 속도제한을 하자는 목소리와 속도 제한을 도입할 경우 세계적으로 자동차 강국인독일 자동차 산업을 위축시킨다는 찬반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동독과 서독을 넘나드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차 안에서 ‘베를린’을 떠올리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던 역사다. 이 도시는 지역적으로는 동독에 있는 도시지만, 베를린 안에서 또다시 동과 서로 나뉘어 베를린의 서독은 마치 동독에 둘러싸인 섬 같은 존재였다. 이렇게 독일 분단의 상징이 되어버린 베를린은 세계적으로 아주 특별한 역사가 있는 도시가 되었다.
TV나 책에서 보아온 베를린 장벽은 이제 허물어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베를린 장벽의 공식 명칭은 현재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라고 불린다. 자신들의 어두웠던 역사의 한 조각을 예술로 재탄생시켜 문화의 장소로 탈바꿈한 시간의 흐름이 그 자체로 경이로웠다. 이곳은 남아 있는 실제 베를린 장벽에 그림을 그려 조성된 갤러리로,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 공개 갤러리라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슈프레 강변 오베르바움 다리부터 동역까지 이어지는 약 1.3km 장벽이 세워져 있는데 그안에는 자유와 희망 그리고 평화 등을 주제로 101개의 대형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중에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은 러시아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 형제의 ‘키스’로 소련 공산당서 기장이었던 ‘브레즈네프’와 동독 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의 입맞춤을 그린 작품이었다. 그렇게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의 작품에서 베를린 과거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동서 분단의 상징에서 이후 독일 통일의 상징이 된 베를린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건축물 브란덴부르크 문이다. 독일이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발전하기 전이었던 18세기 후반 프로이센의 왕이자 동시에 브란덴부르크의 영주였던 빌헬름 2세의 명에 따라 지어진 개선문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1788년에서 1791년에 걸쳐 세워진 초기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로, 프로이센 제국의 건축가였던 칼 고트하르트 랑한스가 설계했다. 높이 26m, 가로 길이 65.5m로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정문인 프로필라에를 본 따 설계한 것이다. 문 위에 올려진 ‘승리의 콰드리가’는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가 조각한 것으로 네 마리의 말이 승리의 여신이 탄 마차를 끄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의 피해를입기는 했으나 전소하지 않고 남았다. 전쟁 이후 1956년부터 약 1년 동안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독일 분단 시절에도 일반인들이 동·서 베를린을 왕래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협정됐으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허가받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서만 동·서 베를린을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1989년 11월 약 10만여 명의 인파가 이 문 앞에 운집한 가운데, 드디어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다. 그 뒤 독일 통일과 함께 1990년 서독 정부가 이 문의 보수공사를 시행했다. 2002년에는 독일 통일 12주년을 기념해 보수공사와 함께 검게 그을린 자국을 지워내는 등 새롭게 단장했다. 오랜 세월 동안 독일에서 발행하는 우표와
주화에 등장했던 이 문의 모습은 현재 독일에서 주조하는 50센트 유로화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통일 독일 후 첫 모습을 보인 ‘연방의회 의사당’
문 앞에 위용을 자랑하는 독일연방의회 건물은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이자 독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지난 45년간 동서로 분단되어 있던 동서독은 1990년10월 3일 새벽 0시를 기해 통일을 완성하며 독일연방공화국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10월 4
일 오후 첫 통독의회가 소집되어 통일 독일의 첫 모습을 전 세계에 선보인 곳이 바로 여기다.
이 건물은 1884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0년 만인 1894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1933년 2월27일에 화재가 발생한 이후 같은 해 7월 14일에 나치가 일당 독재 체제를 확립하면서 더는 국회의사당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이에 대한 복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채 1943년 베를린 대공습, 1945년 베를린 시가전을 겪으며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동서로 분단되면서 베를린도 분단되었고 국회의사당 건물은 서베를린에 남았다. 서독은 본을 수도로 삼아 독일 연방 의회 회의장을 건설했기 때문에 옛 국회의사당 건물은 폐허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4년에 내부를 사용할 수 있도록 부분 복구가 이루어져 이후 독일 역사와 관련된 전시 장소로 주로 이용되었고, 통일 후인 1999년부터 독일의회는 이 건물을 다시 연방의회 의사당으로 쓰기로 했다. 그러다1994년에서 1999년 사이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에 의해 연방의회 의사당은 현대적인 모습이 되었다. 대대적인 보수 작업 후 가장 큰 변화로 유리 돔이 생겼다.
연방의회는 나선형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건물의 꼭대기에 다다른다. 유리 돔 한가운데에는 둥근 의자가 있는데 나는 그곳에서 한참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장의 둥근 통 창 너머로 흰 구름이 서서히 흐르고 아래로는 국회회의장을 밖으로는 베를린 시내를 볼 수 있었다. 이런 곳이 독일연방의회 의사당이라니!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국회의사당 천장을 통해 하늘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시민들이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의사당의 유리 돔. 독일은 의사당 건물을 통해 스스로를 ‘시민사회’라고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유대인을 추모하는 공간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광장’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 있는 이 광장에는 크기가 각기 다른 직육면체 구조물이 가득 들어서 있다. 이곳은 미국의 피터 아이젠만이 설계, 2005년 준공식을 하였다. 이 구조물은 유럽에서 희생당한 유대인을 기리는 것으로 무릎 높이부터 4,7m 높이까지 높이가 다양한
조형물들이 2,711개나 있다.
여기에는 이름이나 날짜 등 어떠한 것도 적혀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미로 같은 구조물 사이로 거닐면서 희생당한 유대인들을 추모한다.

 

 

 

희생당한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비석이자 관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위에 앉거나 올라가는 행동은 금지되어 있다. 독일은 유태인 학살이 잘못된 것을 반성하고, 지금까지 억울하게 희생당한 유대인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을 추모하는 역사적 상징물, 광장을 만들어 각성하게 한다. 참 위대하고 존경스런 민족인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한다.
 

독일의 자존심 베를린 ‘전승 기념탑’
과거 독일인 프로이센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지어진 전승 기념탑은 1864년에서 1873년에 걸쳐 건축했다. 독일 중심가인 티어가르텐 공원에 있으며, 탑 내부는 정상의 전망대에 통하는 285개의 나선형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당초 국가의회 의사당 앞 광장에 세워져 있었지만, 베를린을 세계 수도로 개조하려는 아돌프 히틀러의 게르마니아 계획의 시행에 앞서 1939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기념탑 높이는 69m로 꼭대기에 있는 황금 천사상은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를 표현한 것으로 프리드리히 드리케가 조각했다. 탑 아래의 기단에는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장면과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함락시킨 것을 기념하는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독일이 제2차세계대전 때 베를린 시가전에서 병사들이 여기에 몰려 싸웠고, 곳곳에 크고 작은 총격과 포격에 의한 탄흔이 있었다.

 

전쟁의 상흔이 남은 ‘카이저 빌헬름 교회’
베를린 전승 기념탑을 빠져나와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카이저 빌헬름 교회로 향했다. 동역에서 나왔을 때 확인해 두었고 먼발치에서 카이저 빌헬름 교회와 잠깐 눈인사를 나눴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부분은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폭격으로 붕괴된 교회의 지붕이었다.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베를린의 상징이 된 바로 그곳은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1943년 11월 22일, 영국군은 베를린을 폭격했다. 독일 초대 왕 빌헬름 1세를 기념비적인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카이저 빌헬름 교회도 폭격을 당했고, 서쪽 탑이 무너졌다. 1895년 완공되었으니 50년이 채 못 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이후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폭격당한 그 모습 그대로인데, 이는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잊지 않기위해 영구 보존하는것이다. 처참한 외관 탓에 이 교회를 ‘썩은 이빨’이라고도 한다. 교회는 입구만 남겨졌는데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답고 화려한 천장의 모자이크 벽화만으로도 예전의 교회의 규모와 아름다움을 가늠할 수 있었다. 부끄러운 일을 기억하는 것은 훌륭한 처사이기에 베를린 시민들과 시의 결정은 지혜로웠다.
1957년 베를린 시는 ‘에곤 아이어만’이라는 건축가의 아이디어를 채택해 무너진 교회를 가운데 놓아두고 육각형의 종탑과 팔각형 모양의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비슷한 높이의 종탑은 상처 입은 전우를 돕는 듯하고 안정감 있는 새 정전은 영원한 평화를 상징하는 듯하다.
새롭게 지어진 스테인드글라스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푸른빛이 감돌아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일제점령기의 건축물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민족의 기를 끊으려고 지은 건물들을 없애야 한다는 입장과, 치욕스럽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역사의 일부라서 남겨두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베를린은 후자를 선택했다. 한 때는 승전국으로, 또 한때는 패전국으로 지내면서 역사를 그대로 남기고 교훈을 더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낸다. 우리의 역사는 독일과 달라 어느 것이 옳다고 손을 들어주기 힘들지만, 마냥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한 번쯤 돌아보게 되었다.
독일은 오랜 분단을 종식하고, 거대한 역사의 두 줄기를, 통일이란 역사적 과업으로 하나로 합치면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 훌륭한 민족의식이 이루어낸 업적이다.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분단을 종식하고, 경의선을 타고 중국,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여행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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