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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야기를 담은 나라
신용경제 2018-06-04 08:50:46

그림과 같은 네덜란드의 아침을 맞았다. 이국적인 정취를 조금이라도 더 담아가고 싶어 해 뜨기 전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와 일찍 산책에 나섰다.
천연의 아침은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글·사진 : 김정일
4.19 혁명정신 선양회 회장
사호선문학회(四護旋文學會) 고문
중앙대학교 총동문회 고문

 

네덜란드, 우리에게 낮 설지 않는 이름
하늘이 높고 공기가 맑은 것이 마치 우리나라의 가을 같다. 또래 여학생들이 떼를 지어 등교하는 모습이 싱그럽다. 필자도 60여 전 자전거로 왕복 22km 거리를 매일 통학하였던 생각이 났다. 당시에는 먼 거리를 다닌 것이 힘들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건강의 밑거름이 되어 이렇게 먼 타지까지 와서 젊은 학생들을 볼 수 있으니 뿌듯하다.
이곳은 자연 친화적인 이유에서인지 자동차보다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30여 분 걷다가 자연경관에 취해 1시간 이상을 더 산책하였다. 길이 아름다운 운하는 전통집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풍광에 매료되어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그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라면 시골을 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하면 자전거와 튤립, 풍차의 나라, 고흐 등 여러 단어가 떠오른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친숙함을 주었던 월드컵 축구감독 히딩크의 출신 국가로도 잘 알려졌다.

 

꽃으로 치장한 거리의 자전거

자전거로 등교히는 학생들

 

세계사에 굵게 새겨진 네덜란드는 사실은 아주 작은 나라이다. 국토면적은 경상남북도를합친 크기이다. 인구는 1천5백만 명에 불과하다. 1628년(인조 6년) 우리나라에 표류해 온네덜란드 선원 J.J.웰테브레는 귀화해서 박연(朴淵)이란 이름을 나라로부터 받았고, 훈련도감을 지내는 한편 대포를 만드는데도 공헌했다. 1653년에는 하멜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하여 억류되었다가 66년에 탈출하기도 했다.
이후 68년 본국에 돌아가 조선의 존재를 처음으로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빈센트 반고흐 뮤지엄

 

결국 우리나라가 네덜란드의 존재를 안 것은 1628년이요, 네덜란드가 조선의 존재를 안것은 그 40년 뒤인 1668년인 셈이다. 유럽 국가로서는 첫 교류국이라는 인연도 있다.
이후에도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계속되어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는 이준이 파견되었으나, 일본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6·25 때는 유엔군의 일원이되어 우리를 도왔고, 1961년 단독 수교한 이후, 사증면제협정, 항공협정, 투자보장협정, 이중과세방지협정 등을 체결, 양국의 우호는 증진되어왔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미술관
네덜란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화가가 있다. 바로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다.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을 찾았다. 1973년 개관한 이래 암스테르담의주요 3대 관광명소로 손꼽히며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이곳에는 고흐의 주요 회화 작품 200여 점과 데생 500여 점을 비롯해 고흐가 남긴 편지와동시대의 화가들 작품 60여 점과 고흐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일본 판화도 다수 전시되어 있다. 고흐의 작품 이외에도 고갱, 밀레를 비롯한 인상파, 후기 인상파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이 미술관 0층은 고흐의 자화상, 1층은 감자 먹는 사람들, 노란 집, 고흐의 방(1888)이 있고 2층은 고흐의 스케치가 다수 있었다. 3층에는 해바라기, 꽃피는 아몬드 나무(1890) 그리고 밀밭 위 까마귀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직 아래 사진 있는 곳에서만 사진 촬영 가능했고, 그 외에는 사진 촬영을 금지시켜 그림을 감상하는 데에 집중도를 높였다.
미술관은 네덜란드의 건축가 리트벨트의 디자인에 기초해 소박하게 만들어졌다. 건립 당시에는 반 고흐의 작품이 그리 유명하지 않았으나 일본 기업에서 해바라기를 고액에 구입하여 그 유명세가 커져 관광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단다. 지금은 건물을 증축하여 전시공간이 넓어졌다.
반 고흐는 1880년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다가 파리로 이주했다. 1888년 프랑스 남부 지역인 아를에 정착했고, 이곳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러나신경 질환과 우울증 등에 시달리다 결국 자신의 귀를 자르며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수용되기도 했다. 이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이주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결국 1890년 권총으로 자살하며 짧은 화가 인생을 마무리했다.
살아생전 고흐는 작품 한 점 제대로 팔지 못했다. 삶에 힘겨움과 애환이 진하게 묻어나는작품이 대부분이어서인지 일반 사람인 필자의 눈에는 작품이 대체로 어둡게 느껴졌다. 작품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부유층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었다. 가만히 고흐의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작품 속에 형상들이 깊고 진한 감정들이 섬세하게 녹아 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모습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역동적인 삶을 살아온 그 유명한 반 고흐 작품들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격스러웠다.

 

 

운하의 도시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수도인 암스테르담은 13세기에 어부들이 암스텔 강 하구에 둑을 쌓아 건설한 도시다. 암스테르담이라는 지명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작은 어촌 마을이었던 암스테르담은이후 유럽 굴지의 무역도시로 발전했고, 지금은 네덜란드 최대의 도시이자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구시가지는 반원형의 크고 작은 운하로 둘러싸인 70여 개의 섬을 500여 개의 다리로 연결하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 특히 운하를 따라 성냥갑 같은 아름다운 집들이 나란히 서 있는풍경은 암스테르담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유럽 철도망의 중추로 암스테르담 중앙역 앞에는 부채꼴 모양의 운하가 펼쳐져 있다.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역사는 건축가인 코이 페르스와 반 헨트가 1889년부터 5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한 것이다.
역 건너편 다리 옆에는 광장 안내소와 유람선 승선장이 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 앞에는선박들이 많이 보이는데, 운하를 따라 여행하는 크루즈 투어를 여기서 할 수 있다고 한다.시내 곳곳을 유람선을 타고 구경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아 아쉽게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암스테르담은 도시 한가운데 강물이 지나가는 듯한 한가로운 풍경이 펼쳐진 운하 도시이다. 해수면보다 낮은 위치에 도시가 개발되었기에 운하는 운명일 수도 있다. 주택가 사이로 조그만 하천들이 보이는데 모두가 운하라 한다. 색다른 풍광이 평온해 보인다. 풍경에서 삶의 여유가 느껴진다. 담락 거리는 암스테르담의 중심지로, 중앙역에서 담 광장까지이어진 대로다. 이 거리를 따라 수많은 상점과 호텔, 식당, 카페 등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담락 거리를 통해 중앙역과 이어져 있는 담 광장은 암스테르담의 최대 번화가이자 랜드마크가 되는 곳으로 늘 사람이 붐빈다.
담 광장 왕궁 건너편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던 전사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서 있다.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전사자들을 기리는 장소에 서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전쟁터에서 나가 싸우는 사람들은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5월 9일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정우산악회는 강원도 양구에 있는 투타연 위령비를 참배했다. 그 비에는 한국전에 참전한 네덜란드 전사자도 있었다. 이국땅에서 목숨을 바친 젊은 혼들을 생각하니, 내가슴 한편이 찡하고 먹먹해 왔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 그리고 렘브란트가 잠든 서 교회
어릴 적 필독도서였던 안네 프랑크의 일기, 그 현장을 찾았다. 안네프랑크는 ‘안네의 일기’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이 겪었던 끔찍한 고초를 전 세계에 알렸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안네가 1942년 7월부터 1944년 8월까지 나치를 피해 숨어 살던 곳인데,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여행자에게 개방되었다. 아래층에는 상점과 사무실이 차려져있고, 위층 벽면에 놓인 회전식 책장을 밀고 들어가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다락방으로올라갈 수 있다. 이곳에서 안네의 가족과 지인 등 총 8명이 숨어 살았는데, 화장실부터 안네의 방, 부모님 방, 그리고 부엌까지 모두 당시의 모습과 비슷하게 재현되어 있다. 곳곳에 안내의 사진과 일기 사본, 낙서 등이 전시되어 있어 하루하루 고비를 넘기듯 살아야 했던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안네의 가족은 1944년 8월 밀고자에 의해 연행되어 수용소 등으로 끌려갔다. 안네는 안타깝게도 1945년 장티푸스에 걸려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 ‘안네의 일기’를 출간했다. 또 그들이 숨어 살던 공간을 그대로 복원하여 전세
계에 나치의 잔혹함과 유대인의 희생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고전으로 읽히는 ‘안네의 일기’는 사실적인 문학 작품으로 전 세계인에게 독일의 만행을 생생하게 알렸다. 이 한 작품만으로도 네덜란드를 더욱 빛나게 해준다.
서 교회는 안네 프랑크 집에서 50m 떨어진 곳에 있다. 1631년에 지어진 프로테스탄트 교회다. 이 교회에는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높은 85m의 종탑으로, 암스테르담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 교회가 유명한 이유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인 렘브란트가 이곳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렘브란트 시신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기둥에 한쪽에 ‘렘브란트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 는 문구만 확인할 수 있다.
네덜란드를 되돌아 생각하면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풍차와 튤립의 조합은 아름다운 수채화 같고, 거기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한 고흐와 렘브란트가있어서일까? 슬픈 이야기이지만 어린 소녀인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비록 가상의 이야기지만 제방을 손으로 막아 마을을 구해낸 소년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여러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커다란 그림을 오랫동안 감상한듯 느낌을 되새기며 다음 여행지 벨기에로 이동했다. 지금도 그곳의 풍차와 고흐가 남긴미술 작품들, 안네가 살던 곳을 떠올리면 가슴을 진하게 하는 애틋함과 감동이 삶의 활력소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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