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철저히 공간에 지배당할 때가 많다. 동네에 위치한 소박한 커피숍의 커피 가격이 5,000원이 넘으면 비싸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리지만 특급호텔 커피숍에서 기꺼이 1만 원이 훌쩍 넘는 커피 값을 지급한다. 즉, 적정 금액에 대한 기준이 공간에 따라달 라지는 것이다.
박정호
KDI 전문연구원
수요의 가격탄력성 활용
일찍이 기업들은 매장의 공간구조만 바꿔도 손님들의 지불 수준이 달라지거나 없었던 구매 욕구도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 왔다. 일례로 백화점의 경우 창문을 없애 고객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에 몰입하도록 유도하고 있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할 때도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곧바로 올라갈 수 있게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매장을 한바퀴 돌아야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하는 등 다양한 공간 활용 전략을 도입해 왔다.
층별 매장 구조 역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현대백화점이든, 롯데백화점이든, 신세계백화점이든 간에 모든 백화점의 1층은 귀금속 매장들이 입점해 있으며, 가장 위층에는 식당이 위치해 있다. 식료품은 항상 지하 1층에 있으며 남성복 매장은 여성복 매장보다 위층에 놓여 있다. 이러한 현상을 일견 오래된 관례 내지 습관적인 매장 배치로만 생각할 수도있을 것 이다. 하지만 매장 배치에는 백화점에 들어온 고객들의 주머니에서 단 한 푼이라도 더 빼내려는 백화점의 판매 전략이 숨어있다.
백화점에서 매장의 위치 내지 제품의 위치를 결정할 때 여러가지 경제원리를 활용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기초적으로 활용하는 개념이 수요의 가격탄력성이다. 수요의 가격탄력성이란, 어느 재화의 가격이 변할 때 그 재화의 수요량이 얼마만큼 변화하는지를 측정하는 지표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수요의 가격 탄력성은 가격에 대한 민감도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만약 특정 재화의 가격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수요의 가격 탄력성은 탄력적으로 나타나며, 특정 재화의 가격 변화에 사람들이 덜 민감하게 반응하면 수요의 가격탄력성은 비탄력적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필수재의 경우 가격이 다소 높아져도 반드시 구매를 해야하는 물건들이기 때문에 가격 변화에 따른 수요량 변화가 둔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치재의 경우에는 가격이 올라가면 불필요한 물건이기 때문에 수요량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화점 매장 구조가 동일한 이유는 이러한 수요의 가격 탄력성을 활용한 매출 증대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백화점 내 층별 판매 전략
냉장고, 세탁기와 같은 값비싼 가전제품의 경우는 고객들이 사전에 해당 제품을 구매하기로 작정하고 목돈을 갖고 백화점에 방문한다. 따라서 이들 손님에게 추가적인 구매를 끌어 내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층을 거쳐 전자제품을 살 수 있도록 올라가게 만들어야 한다.
반면, 향수, 구두, 가방, 쥬얼리 등은 모두 가격 변화에 민감한 수요의 가격 탄력성이 높은제품들이다. 이처럼 가격 변화에 민감한 제품들은 1층에 위치하여 백화점을 방문한 모든고객에게 노출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매출 증대에 기여하는 일이다.
여성복 매장이 남성복 매장보다 아래층에 놓여 있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성들은 옷을 사러 백화점에 더 자주 가지만 가격에 민감하다. 이 때문에 남성복보다 먼저 등장한다. 하지만 남성들은 옷이 필요할 때만 필요한 옷을 사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더 많으므로남성복 매장이 더 위층에 놓여 있게 된다.
즉, 남자들은 새로운 양복을 맞추기로 마음먹었을 때만 남성복 매장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 여자들보다 가격에 덜 민감하게 된다. 그래서 수고를 들여 올라가더라도 비싼 가격에 옷을 살 확률이 더 높다.
이러한 이유로 고객들이 이미 구매 여부를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온 제품군을 가능하면 높은 층에 배치하여 해당 층까지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다른 매장도 방문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 공간을 배치한 것이다. 백화점은 달라도 백화점의 공간 배치가 비슷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하에 위치한 식품 매대를 놓는 순서 역시도 철저히 계산되어 있다. 우리가 식품코너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매대는 과일 매대인 경우가 많다. 이는 고객들이 과일을 통해서 빨강, 노랑, 주황 등 화려한 색깔들을 먼저 마주치게 되면, 기분이 업(up)되고 이로 인해 구매 욕구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매장 내부에 들어오기에 앞서 총천연색을 먼저노출함으로 인해 이후 마주치게 될 각각의 매대에서의 매출 또한 함께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식품 코너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품목은 정육, 생선류 등이다.
이들 품목은 고객들이 백화점에 방문하기 사전에 구매 여부를 결정하고 방문하는 품목들이다. 모처럼 가족끼리 삼겹살 파티를 할지 혹은 등심구이를 먹을지를 사전에 결정하고 매장에 방문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품목들은 구매를 결정하고 방문하는 고객들에게는 필수재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제품은 매장의 가장 뒤편에 배치하고 매장의 앞부분에는 제품 가격도 저렴하고 일상생활에서 흔히즐기는 품목인 라면, 과자, 빵, 카레 등을 배치해 둔다. 꼭 사기로 마음먹는 품목을 사고 난뒤에 백화점 입구 쪽으로 걸어 나오면서 일상생활에서 흔히 즐기는 라면, 빵, 카레 등을 지나가게 배치해 둠으로써 추가적인 구매를 유도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매장의 공간구조를 활용해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를 높이고, 이를 통해 추가적인매출 증대를 도모하고자 하는 기업들의 전략이 더욱 정교해져, 백화점 말고도 우리가 일생 생활 속에서 자주 들리는 수많은 매장 역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