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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개츠비 그리고 한의학을 위하여
신용경제 2018-09-03 09:02:17

이진신
한의학박사, 경희푸른한의원 원장
hanisa.co.kr

 

외국 작품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서를 읽거나 번역가의 손에서 재탄생한 글을 읽어야 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읽기 위해 러시아어를 알 필요 없고, 카뮈의 작품 때문에 프랑스어를 배울 필요가 없는 까닭은 외국 작품을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는 분들의 수고가 있기때문이다. 외국어로 적혀 있는 문장을 이해하는 것과 이해한 내용을 모국어로 풀어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 다른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길잡이를 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번역은 모국어로 다시 쓰는 어려운 과정이며, 재창조에 가깝다. 번역가가 잘못 번역하거나 국어의 표현이 적절하지 않아도 양쪽 언어에 능숙하지 않은 독자의 경우 이러한 실수를 알아낼 수 없다. 그러하기에 한 글자, 한 문장,한 이야기를 물 흐르듯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노력하지만, 역자의 이름은 크게 부각되지않은 현실에서, 그들의 노고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몇 해 전부터 서점가의 한편에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프랑스 작가의 작품과 영어 작품의 번역에 문제를 제기하며, 새로운 번역으로 원저자의 뜻을 더 잘 알 수 있는 책이 출판되었다는 홍보가 한창이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들이고, 한 번은 읽어보거나, 읽어보지는않았더라도 내용은 알 정도로 유명하기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 작품의 번역가가 굉장히 유명한 분이기에 그분들의 번역이 이해할 만한 실수이기를 바라는마음과 혹여 정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진다.
한의사도 번역가와 비슷한 점이 있다.
자연의 변화를 음양이나 오행과 같은 도구로 읽는다. 약재로 사용하는 식물의 경우에는 화학구조, 유전정보의 첨단적인 기술이 없던 시절에 기(기운)와 미(맛)로 해석하고 인체에응용하였다. 또 인체도 장부와 경락이라는 강력한 언어로 해석하여, 침과 한약을 쓸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하였다. 이 번역 중 정확하지 않거나 오역한 내용은 한의사들의 오랜 치료에 의해 걸러지고, 더는 사용되지 않는다. 또한, 너무도 탁월한 해석으로 인체와 약재, 침치료의 규칙을 만든 내용은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지닌다.
탁월한 해석은 생명력을 오래 지니지만, 잘못된 해석은 후대에 사라지곤 한다. 그런데 아무리 해석이 뛰어나도 자연이 만든 원재료의 힘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아무리 해석을 잘해도 당귀는 당귀이며, 황기는 황기이다. 자연이 만들어 낸 작품인 한약재를 한의사가 아무리 해석을 잘해도, 그 약재의 특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 하나의 작품으로 완벽한 식물, 약재를 바꿀 수 없다. 다만, 뛰어난 해석을 통해 우리 몸의 곳곳에 기운을 북돋울 뿐 아니라, 기분까지 개선시킬 수 있으며, 습하고 찝찝한 환경에는 거기에 맞는 구성을 하고, 춥고 으슬으슬한 인체의 환경에는 면역력, 기초 체력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힘을 줄 수 있다.
위장의 중요성을 일 순위로 놓고 대부분 질환을 비위를 강화함으로 치료하려는 식견을 제공한 의가(한의학자), 진액의 부족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헛된 열이 상당수 질병의 원인으로 본 의가가 진액을 보완하는 것과 열을 안정시키는 것의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또한, 손끝·발끝에 많이 존재하는 기운을 잘 조절하여야 한다는 혜안을 후대에 남기신 의가들이 있다. 이분들의 자연에 대한 훌륭한 해석과 인체의 질병에대한 번역은 한의학이라는 학문에 활기찬 기운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분들은 한의사들의 교과서에만 있거나, 한의사들의 머릿속에서도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유명하지 않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연의 마음을 더욱 드러내고자 했던 선배 의가들의 노력에 후배 한의사들은 은혜를 입고 있다.
최근에도 훌륭한 의가(한의사)들이 한의학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제시하며, 한의학의 생명력을 풍성히 드러내고 있다. 이들의 독창적인 견해들은 선배들의 학문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지만, 선배들의 작품을 오히려 더욱 빛나게 하기도 한다. 시대를 넘어서는 교학 상장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학문에 독불장군은 없는 법. 최근에 밝혀지고 알려진 한의사의 지혜를 예전 선배님들, 수백 년 수천 년 전에 한의학의 기틀을 마련하신 선배님들이 보시면 뭐라고 할까? 그분들의 명성을 위협할까, 당신들의 권위가 후배에 의해 흔들릴까 노심초사하며 자존심 상하여 힘들어할까? 아니면, 당신이 미처 명확히 밝히지 못했던 부분을 선명하게 이야기해주는 후배의 노고에 미소를 지을까?
자연을 더 잘 이해하려는 노력, 약재의 기운과 맛을 인체에 더 정밀하게 맞추려는 수고, 인체의 경락의 기운을 더 맑게 하려는 노력이 어디 진료하는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환자의 몸이 나의 수고로 좀 더 건강한 길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조금은 경제적인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치료의 확률을 높이는 것, 치료를 받는 힘든 여정을 조금은 덜 힘들게 지지해 주는 것을 위해 노력이 아닐까?
더 나은 해석이 있다면 논의하고, 선명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지적은 포용하며, 함께 노력하는 이들의 수고를 인정하고 격려하는 풍토가 된다면 그 변화 자체로 많은 독자들은 감동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작품의 해석으로 받던 감동에 더하여 노학자의 인생 해석에서도 감동을 받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결국은 옳고 그름의 문제로 결론지어질 때보다는, 진정한 옮음을 추구하는 이들의 하모니가 더욱 아름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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