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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 땡큐 앤 유?
신용경제 2018-11-05 09:28:18

이진신
한의학박사, 경희푸른한의원 원장
hanisa.co.kr

 

배운 것, 익숙한 것, 경험한 것에 대해 자신감이 있다.
외국인을 만나도 “How are you?” 라는 질문에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Fine, thank you. And you?”라고 답할 수 있다. 교육의 힘이고, 힘들게 외운 시간에 대한 보상이다. 뿌듯하다. 그런데, 이 문장들로 이루어진 인사가 끝난 후에는 자신감이 갑자기 떨어진다. 외국인의 입에서 나오는 다음 문장부터는 긴장이 된다. 들을 준비는 되어 있는데, 들리지 않는다. 다음 문장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내가 배운 교과서대로 이 사람이 이야기하지 않아서일까?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대화는 여기서 종결하도록 하자. 만국 공통어인 미소로 자연스럽게 마무리를 지으면 ‘그래도 훌륭한 마무리야’ ‘휴, 영어로 좋은 대화였어!’ 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신감 넘쳤던 인사는 아쉬운 마무리를 남기며 용두사미처럼 끝나게 된다.
비슷한 경우를 일상에서도 만날 수 있다. 가을 하늘 같은 하늘이 펼쳐지며, 낙엽을 쏟아 내기 전에 한껏 물든 단풍이 산과 도심 속 공원을 수놓고 있으면, 운동과 담쌓았던 사람도, 헬스장에 결제만 하고 다니지 않았던 분들도, 먼지 묻은 운동화 끈을 오랜만에 묶어 보게 된다. 발목 한 번 돌려주고 목 한 번 동서남북으로 돌려주고는 ‘하늘아! 단풍아! 내가 간다!’ 하며 첫발은 내디딘다. 말없이 걷다 보니 몸이 좀 풀리는 것 같다. 괜히 혈액순환도 잘 되는 것 같고, 촉촉하니 흐르는 땀이 근육과 관절에 윤활유가 되며 왕년에 좀 뛰었던 추억을 자극한다. 이 추억은 현실의 발이야 준비가 되었건 말건 추억 속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피드를 좀 내어 보라고 재촉한다. ‘오늘 하루 좀 뛰고 나면 1~2kg은 빠지겠지?’ 꿈꾸듯 스치는 생각이 떠오르기라도 하면, 멋진 배경을 바탕으로 달리기 시작한 내가 이 뜀박질이 끝날 무렵에는 날렵해질 것 같은 CF 속 한 장면이 오버랩 되기라도 하면, 내 무릎 관절이 전해주는 이야기나 종아리 근육의 거친 숨소리 따위는 이미 들리지 않는다.
한 걸음 내딛기 위해서는 온몸의 근육이 데워지는 워밍업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발목 한 번, 목 한 번, 어깨 한 번 움직여 줬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라는 자기 확신이 사람 잡는지 모른다. 젊고 건강할 때의 근육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할 때가 많고, 또 지난달에 이렇게 뛰고도 괜찮았던 고통의 역치에 도달하지 못해서 괜찮았던 기억이, 오늘도 괜찮을 것이라는 안심의 오류가, 오늘의 경보 시스템을 꺼버리곤 한다.
늘 앉아있느라 굳은 종아리 근육 또한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바로 걷고 뛰기에 최적화가 될 것이며, 허벅지 근육과 엉덩이 근육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는 세계적인 축구팀의 미드필드 진들처럼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내가 오랜만에 진행되는 산책 여정의 버팀목이 될 것이다.
아킬레스건은 또 어떤가? 매일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도 내몸을 굳건히 지켜줬던 이 탄력이 조금 더 무거워진 내 체중과 뛸 때의 충격 정도야 충분히 견뎌줄 것이다. ‘신화의 영웅 불멸을 꿈꾸던 그 아킬레스의 이름을 따 올 정도이니 얼마나 강인하겠어!’ 라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영웅이 발뒤꿈치 부분에 화살을 맞아 불멸의 이름은 얻었을지언정 목숨은 잃게 되었다는 스토리가, 통증으로 발을 쩔뚝이며 가을날의 산책을 끝내고 나서야 기억이 난다.
아킬레스건이 이렇게도 유연하지 않고, 탄력이 없었단 말인가?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느라 구부러져 있던 자세에 최적화된 척추를 세워주는 근육들이 직립에 적응하여 걷고 뛰는 동작에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트랜스폼 될 그 시간을 버텨주지 못한단 말인가. 불멸의 아킬레스야!
그렇게 기분 좋은 가을 날씨를 만끽하려 “Fine”이었던 기분으로 산책을 나갔고, 심지어 달리기까지 했던 좋은 출발이었다.
화사했던 태양을 조신하게 머금은 단풍과 노오란 은행잎의 패션위크를 감상할 수 있어서 “Thank you!” 하며 가을날을 즐겼다. 하지만 지금 “당신 YOU”의 모습은 패잔병처럼 여기저기 부상으로 절뚝거리고 있네요.
어릴 때는 언제 뛰어도 괜찮았고, 준비운동이라 할 것도 없이 쉬는 시간, 점심시간의 축구에도 탄력이 좋은 나뭇가지처럼 회복되었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뛰어서 발목이 삐끗하고, 친구의 다리와 부딪혀서 타박상이 생기는 정도였고, 땀이 난 옷을 갈아입지 않고 다음 시간에 앉아있느라 몸이 좀 무겁거나 감기에 걸렸을 뿐이었다. 수업 시간에는 졸려서 엎드려 자고도 또 다음 쉬는 시간에는 나가서 뛸 수 있었던 개나리 같은 젊은 노랑을 추억하며, 은행잎의 노랑이 그때처럼 그 때 같은 마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다가 삭신이 쑤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좋아, 고마워 가을아! 당신은?”이라는 문장 다음에는, “나도 가을을 마음껏 만끽했어. 가을 같은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단풍과 은행잎 같은 여유를 누리고 있어. 병아리 같은 개나리처럼 유연하진 않지만, 성숙한 노란색이 되었어.”라는 대화가 숨어 있을 것만 같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독히도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가며 찾아온 가을은 준비 없이 불쑥 찾아온 것 같지만, 깊은 색과 진한 향기를 머금을 수 있는 선물 같은 시간을 선사한다.
낙엽이 떨어지기 전, 생명이 우리에게 있을 때를 감사하며, 기뻐하며 삶을 누리길…
당신도 그러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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