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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은행은 사원(temple)이었다?
신용경제 2019-11-08 17:11:07

몇 해 전 World Bank에서 발표한 글로벌핀덱스(Global Findex)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까지 전 세계 인구 중 금융 계좌를 갖고 있는 사람의 비율은 불과 절반(51%)밖에 안 된다고 한다. 또한, 금융 계좌를 단 하나도 개설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무려 20억 명 이상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모바일 금융 서비스 역시 전 세계 인구 중 불과 2%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World Bank 보고서의 내용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만드는 내용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만큼 금융서비스가 너무나도 친숙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박정호
명지대학교 창업교육센터 특임교수

 

점토판에 새겨진 기록
오늘날 우리에게 은행이 없는 일상생활을 상상하기란 그리쉽지 않다. 은행이 없다면 월급을 보관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소소한 지출에 모두 현금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 요금, 휴대폰 요금, 각종 공과금 모두 해당 회사에 직접 방문하여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 은행의 대출 내지 할부 서비스가 없다면 아파트나 자동차를 구입하기 위해서 거금의 일시불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은행이 없는 세상은 단순히 불편함을 넘어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 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한 은행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을까?
은행의 기원이 무엇인지, 무엇을 초기 은행의 형태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은행을 통해 수행하는 다양한 금융서비스 중에서 어떤 부분을 주목하느냐에 따라 은행의 원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 속에서 초기 대부업의 기록이 남아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은행이 처음 등장한 곳으로 볼 수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적지에서 발굴된 점토판은 오늘날로 따지면 일종의 어음 내지 채권의 기능을 수행하였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점토판에 새겨진 내용을 보면, 이 점토판을 소지한 사람이 추수 때 얼마만큼의 보리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졌는지가 새겨져 있거나 만기가 되면 점토판을 소지한 사람에게 일정 수준의 은화를 지급하라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갚아야 할 금액과 시점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는 점토판은 왕궁이나 사원을 거쳐 발행됨으로써 점토판의 내용에 공신력을 부여했다. 따라서 점토판을 관리 감독하는 기관 내지 담당자가 은행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가장 안전한 공간, 사원 이상에서 설명한 바처럼 대부(貸付) 기능을 중심으로 은행의 원류를 찾을 수도 있지만, 은행의 가장 원시적인 기능은 귀중품을 보관하는 공공금고의 역할이 주를 이루었다. 물물교환으로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던 시대가 지나고, 금화 내지 은화
와 같은 화폐나 귀금속을 거래에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들 화폐와 귀중품을 보관할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특히, 강력한 중앙 정부가 형성되지 않았던 고대 도시국가들은 빈번히 다른 국가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재산을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자 하는 욕구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이때 고대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공간은 다름 아닌 사원이었다.
사원은 신을 모시는 폭력이나 절도와 같은 비도덕적인 일이 금지된 신성한 장소이다. 또한, 신이 지켜보고 있는 신성한 곳에서 다른 사람의 귀중품을 몰래 훔쳐 가는 행위는 저주 내지 불행을 자초하는 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강도나 폭도들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원은 많은 사람이 빈번히 방문하는 공공장소이다. 따라서 누가 언제 방문했는지 무엇을 들고 갔는지 확인해 줄 수 있는 수많은 목격자가 항상 존재한다. 때문에 사원에서 아무도 모르게 무언가를 들고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설사 누군가 몰래 뭔가를 가져갔다 하더라도, 당시 상황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여러 목격자를 쉽게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사원의 공공성은 도난을 방지하고 도난 시 범인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준다. 초기 사원은 귀중품을 보관해 주고 직접적으로 대가를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점차 많은 사원이 이를 비즈니스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수수료를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델포이와 올림피아의 여러 사원에 사람들이 맡겨놓은 금은보화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수요 증대에 따른 은행업의 시작
이후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는 도시가 각지에서 등장하면서 단순 보관 기능을 넘어 환전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기 시작했다. 이는 지중해 연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북부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유럽 대륙 등과 다양한 지역과 교역을 수행했던 로마 역시 귀중품의 단순 보관 기능뿐만 아니라 환전서비스가 추가로 필요했다. 유럽각지와 다양한 상거래를 수행하다 보니 이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화폐를 취급하게 되었고, 이들 화폐의 품질 또한 재각 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적인 환전상에 대한 수요가 점차 증대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빈번한 상거래를 지원하기 위한 영수증 발급과 어음 발행도 필요했다. 때로는 물건을 담보로 저당을 잡아 줄 사람도 필요했다. 당시 로마는 이러한 시민들의 요구에 부합하고자 국가 차원에서 사원 이외에 귀중품을 보관할 수 있는 시설물을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상인들의 어음과 영수증 발급 업무를 도와주고 환전 관련 금융서비스를 주업으로 하는 환전상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상인들이 주로 왕래하는 거리에 탁자에 무게를 달기 위한 저울을 올려놓고 벤치에 앉아 상인들의 교역 활동을 지원해 주었다. 은행을 의미하는 단어인 ‘Bank’ 역시 당시 환전상이 거리벤치(bench)에 앉아 업무를 수행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심지어 은행업을 중심으로 한 금융 세력이 기존의 왕실 내지 종교 세력을 대체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 바르디(Bardi), 페루치(Peruzzi), 아치아이우올리(Acciaiuoli), 메디치(Medici)가문이 대표적이다. 특히, 매디치 가문은 작은 환전상으로 시작한 가문으로 14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하였고, 결국 자신들이 거대 금융 권력을 바탕으로 급기야 교황 2명, 프랑스 왕비 2명 등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융성한 은행업은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의 여타 국가에 커다란 귀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벤치 마크의 대상이 되었고, 오늘날과 같은 은행의 형태와 기능을 전 세계적으로 유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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