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신
한의학박사, 경희푸른한의원 원장
hanisa.co.kr
“기억나니?”
수개월 전 처음 알게 되어 여러 번 찾아갔던 도서관.
조용하지만 보물 같은 문장들을 숨겨놓은 놀이터,
지쳐서 엎드려 자던 학생도 쌩쌩한 걸음으로 걸어나가게 하는 곳,
오래된 건물이지만 사람의 머릿속을 기가 막힌 방법으로 새롭게 하는 마술 같은 곳.
다시 만난 도서관은 화장을 했습니다. 낡은 빛깔은 온데간데없고, 화려한 햇빛을 반사하는 거울은 지혜가 빛나듯 하고, 반짝이는 바닥 위 또각또각 구두 소리에는 똑똑함이 묻어납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설렘의 찰나 후 만난 도서관의 변화는 도서관에 대한 추억을 어지럽게 만들어 희미하게 사라집니다. 책에 새겨진 글, 단어, 문장은 도서관의 공기 속 약간의 소음을 양념 삼아 뇌세포 빈자리 어딘가에 꽂히게 되는데, 정갈했던 책장이 질서를 잃은 듯 새로운 도서관 속에서 길을 잃게 됩니다.
제가 예의 없이 질문을 던져봅니다.
“야! 도서관! 너 나 기억하니?”
“저요? 제가요? 당신요? 잘 모르겠는데요?”
“바보 같은 도서관아! 나 여기 자주 왔잖아!”
“제가 머리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바보라니요. 오셨는지 아닌지 CCTV 화면 돌려볼까요?”
“너 정말 바보같이 이럴래? 내가 왔는지 아닌지 확인해 보자는 게 아니잖아! 내가 그동안 여기서 좋은 책들도 만나고, 추억도 많이 쌓았는데,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해서 그러는 거잖아. 좋은 책과 오작교 역할을 했던 네가 갑자기 낯설어 보여 투정부리는 거잖아.”
“대출한 책 미납한 명단이야 잘 기억하고 있지만, 당신과의 추억까지는 제가 잘 모르겠거든요. 저도 새 단장 후 페인트 냄새도 아직 안 빠져서 머리 아프니, 이제 그만하시고 좀 조용히 해 주세요.”
예산을 다른 곳에 안 쓰고, 도서관을 정비하는데 써줘서 참 고맙긴 합니다.
그래도, 나를 기억하느냐는 문제는 모든 작가에 있어 중요한 것인데, 그런 분들의 작품을 저장하고 보여주는 도서관이 독자를 대출한 책 정도만 기억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니 조금 배신감과 서운함이 몰려옵니다.
“아!”
일말의 가능성이 떠오릅니다.
“와이파이!”
어쩌면 늘 접속했던 와이파이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휴대전화를 열어, 와이파이에 접속해봅니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인 듯, 우리의 소중한 비밀은 온데간데없고, 새로운 비밀번호를 넣으라고 합니다. 건물 외관 하나 달라졌다고 이렇게 나를 기억하지 못하다니, 서운합니다.
”서운해! 서운하다고~!”
새로운 2020년이 짠하고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옷을 곱게 차려입고 말입니다. 새해소망을 떠올려봅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했던 것과 같은 소망입니다.
“2019년아! 1년 전 나와 약속했던 결심과 소망 기억하고 있니?”
“글쎄… 너 스스로 그런 약속을 하긴 했던 것 같아. 하지만 네가 그걸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잘 기억이 안 나면 2018년, 2017년의 소망은 어떠했는지 데이터베이스를 돌려준다는 친절한 안내에, 문득 그때도 금년과 비슷한 소망을 했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식욕을 통제할 능력을 갖추기를, 몸짱이 될 운동능력의 소유자가 되기를, 외국어도 하나 좀 유창하게 하게 되기를 소원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분명히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왜 2019년! 너는 그 소원을 기억도 하지 못하고, 꿈을 이루지도 못하면서 새롭게 소원을 빌어보라는 2020의 반복된 권유에 침묵하고 있니? 소망에 대한 기억력이 지구력에 문제 때문인지, 열심히 노력하다가 까먹었는지 따지지는 말자. 둘 다인 것 같으니까.
늘 새로운 것 같은 소원 빌기는 금년이 마지막이 되길 빌어봅니다. 내년에 또 이렇게 빌지 않기를, 매년 겪은 기억력의 상처가 올해에는 꼭 치유되길 바랍니다. 눈은 말똥말똥해지고, 머리는 총명해져서 꿈과 소원을 위해 365일 변함없이 달릴 수 있도록 달리는 말에 채찍 대신 침 하나 찔러줄게!
달려라 2020!!!
<월간 신용경제 202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