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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착이 준 선물
신용경제 2018-02-06 16:41:40

이진신
한의학박사, 경희푸른한의원 원장 hanisa.co.kr

 

성탄절을 앞둔 인천공항은 짙은 안개로 인해 많은 비행기가 연착되었다. 힘들게 탑승한 비행기에서까지 몇 시간을 보냈다는 인터넷 기사를 보며, 내가 타야 할 비행기 또한 피해가지 못할 연착의 릴레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예전에 겪은 연착의 경험이 예방접종 효과로 작용했는지, 가져간 책을 펼쳐 보면서 시간을 보내 보기로 한다. 늘 작은 진료실에서 환자와 대화를 나누고, 치료실에 누워있는 환자를 치료하며, 컴퓨터에 환자정보를 입력하는 단조로운 동선 내에 머물다가, 조금 큰 보폭으로 며칠을 보내려는 황금 같은 시간에 주어진 기다림의 시간은 지치게 하지만 보너스처럼 다가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읽고 싶었지만 방치되어 먼지로 데코레이션 된 책이 나의 시신경이란 활주로를 통과하여 창공과 같은 뇌세포와 조우할 수 있는 시간이면서, 간간이 들려오는 외국어 대화에 귀를 쫑긋 기울인다. 잘되지 않는 리스닝에 기름칠이라도 해보려는 워밍업 시간이다. 일상을 벗어난다는 흥분이 넘치는 뇌의 급격한 난기류에 책의 페이지가 쉽게 전진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는 것은 인천공항이나 내 머릿속이나 마찬가지이다. 언젠가는 열릴 활주로처럼 난독증화 되어가는 굳은 뇌가 스스로 활자를 받아들일 때가 곧 오리라는 믿음이 옅어질 무렵에 게이트가 열린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비행기 타기도 전에 머리에 쥐날 뻔했다. 다행이다.

 

 

늘 있어왔지만 그동안 인식되지 않은 것을 만날 때의 기쁨이 있다. 지은이도 연주자도 알지 못하지만, 우연히 듣게 된 음악이 역사적 명곡 같은 깊은 감동을 줄 때가 있고, 낙서처럼 보이는 낯선 형상이 모네나 피카소의 작품을 봤을 때의 경이로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듯 여행은 늘 제자리에 있는 듯한 나의 다른 면을 만나는 조우를 선사한다.

 

과자를 줄이기로 했던 마음의 밀도가 하늘에서는 옅어지는지, 탄산음료나 인스턴트 음식을 더 찾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초딩 입맛을 벗어나려는 인간의지의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한 애처로운 나를 만나기도 하고, 헬스장의 허리 돌리는 운동하듯 몸을 트위스트 시키며 걷는 밝은 미소의 아주머니를 보면서, ‘체중을 조금만 줄여도 도움이 될 텐데’ 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서사적 지식과 무거워진 몸과 늘 피곤한 다리가 해결책을 마련하여 새로운 보행법에 적응해가는 고도 비만환자의 최적화된 걸음걸이라는 절차적 학습의 가치에 대한 잔잔한 감동을 느끼며 찬사를 보내는 모습이 내 안에서 공존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생각 가운데 ‘나는 환자를 볼 때 질병적 시각을 우위에 두고 환자들을 보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질병과 고통 가운데 살아가려 애쓰다가 도움을 요청하려 다가온 그들에게 ‘왜 빨리 치료받지 않았나요?’라고 환자를 야단치듯 말하려 했던 점에 대해서 ‘혼냄 DNA’의 우성적 인자 탓으로 돌리는 교만함이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당연히 진료적 역할을 감당하려면 환자에게 티칭(teaching), 설명의 영역이 분명 필요하기에 적절한 논조는 필요하다는 자기변호 간의 논쟁 속에서, 그럼에도 환자에게 야단치듯 말하는 나쁜 습관 또한 진료의가 걸릴 수 있는 질병이라는 점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나 또한 그런 질병에 걸려 있지는 않은지 자가 진단하며, 교만과 혼냄 증후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다짐해 본다.

 

환자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려 노력하고 적응하는 그들의 노력과 인체 간의 협업을 발견하여 감동하는 감동DNA의 발견과, 삶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들을 따뜻하게 인도해야 할 의무가 주어져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이 연착과 긴 기다림으로 가득한 이번 여행이 준 선물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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