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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 기사단의 보물은 진짜 있는 것일까?
신용경제 2018-05-02 13:25:49

전설의 템플 기사단의 후예를 자처하는 단체가 로마 교황청을 상대로 1천억 유로에 해당하는 소송을 건 사건이 있었다. 소송을 건 이들은 교회가 과거 템플 기사단을 해체시키고 재산을 부당하게 몰수한 것을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템플 기사단이라면 숨겨진 보물로도 유명한 전설의 미스터리 기사단이 아닌가! 그런데 그 많은 보물은 어쩌고 700년도 지난 후에 몰수당한 재산을 거론하는 것일까?

 

황수정 작가「물음표로 보는 세계사」, 「느낌표 세계사」 저자

 

신이 원하신다? 템플 기사단의 시작, 십자군 전쟁!
1099년 신의 뜻으로 사악한 이교도(?)가 점령하고 있는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군대가 출동했다.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한 이들은 기독교를 박해하고 성지순례를 방해하는 이슬람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억지였다. 무슬림은 이교도에게 관대했다. 그들은 다른 신을 믿는 것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성전을 시작한 이들이 걱정할 만큼 예루살렘 내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위험하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무슬림들이 기독교 성자들의 성지순례를 막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이슬람 입장에선 성전을 시작한 이들의 슬로건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십자군 원정은 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 도대체 이 전쟁을 누가 그렇게 원한 것일까? 일단 이 전쟁을 가장 원한 건 교황 우르바노 2세였다.

 

 

자크 드 몰레(Jacques de Molay)
템플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인 자크 드 몰레는 7년간의 감옥 생활과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예수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었다는 혐의는 인정했으나 남색에 대해서는 끝까지 부인했다. 그는 화형당하면서 왕과 교황에 대해 저주를 퍼부었는데 필립 4세가 갑작스럽게 죽고 그의 후손들과 후계자 없이 돌연사하면서 카페 왕조가 끝나자 사람들은 저주가 실현된 것이라고 믿었다.

 

우르바노 2세는 교회의 유일한(?) 교황이 아니었다. 사건은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때문에 시작됐다. 눈밭에서 소복과 맨발 차림으로 하인리히 4세를 몇 날 며칠 벌벌 떨게 했던 그레고리우스 7세는 그로부터 3년 후, 복수의 칼을 갈았던 하인리히 4세의 역습을 맞아 남부 이탈리아로 도망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교황을 몰아낸 하인리히 4세는 다시는 그 굴욕을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클레멘스 3세를 교황의 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문제는 이다음부터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교황의 꼭두각시 교황을 보다 못한 이들이 1088년, 테라치나에서 콘클라베를 열어 우르바노 2세를 교황으로 추대한 것이다.
그러니 우르바노 2세에겐 예루살렘 탈환만큼 로마 교황청 탈환이 급했다. 때마침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1세로부터 이슬람 세력에 대항할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한 사절단이 도착했다. 우르바노 2세는 드디어 교황의 권위를 되찾고 유럽 정세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돌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교회는 분열된 교회의 통합과 왕권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령하기 위해, 죄지은 자는 피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하늘나라의 티켓을 위해, 영주는 새로운 정복지를, 영주를 따르는 기사들은 교황이 약속한 동방의 금은보화와 미녀를, 상인은 새로운 무역 활로 개척을 위해 십자군 원정을 시작했다.

 

믿고 맡기세요! 템플 은행?
1차 십자군 원정은 성공적이었다.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하면서 우르바노 2세의 “신이 원한다!”라는 말은 뻥이 아님이 밝혀졌다.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구해낸 십자군과 교황청은 한껏 고무됐다. 십자가의 아래 성지를 탈환하러 나섰던 이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온갖 약탈과 살생을 저지르며 예루살렘을 초토화했다.
그러나 이들의 광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작해야 예루살렘과 트리폴리 등 몇몇 지역만을 점령하는 데 그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이슬람의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 성전은 지켰는데 성지순례 길은 이슬람의 손아귀에 있었다. 성지순례 명분을 지키지 못한 십자군은 급한 대로 해결책을 내놓았다. 바로 순례자들의 보호자인 템플 기사단의 창설이 그것이다.
1118년, 샹파뉴 기사인 위그 드 파양스를 중심으로 가난과 고행, 신앙심, 복종을 맹세한 9명의 템플 기사단이 결성됐다. 이들은 성지순례차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이들은 교황 직속 조식으로 자유로운 국경 출입과 모든 국가로부터 치외법권을 보장받았다. 또 교황 외 그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아도 될 특권도 함께 부여받았다. 이 많은 특권 중 템플 기사단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바로 과세 면제권이었다.
이들은 성지순례자들의 신체적 안전만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물도 함께 보호해주었다. 템플 기사단들은 아주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순례자들의 돈을 보호해주었다. 그들은 십자군이 주둔한 곳에 설치한 천여 개의 지점에서 환전 업무를 맡았다.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난 이들은 템플 기사단에게 자금을 맡기고 증서를 받아 각각 지점에서 돈으로 환전할 수 있었다. 환전으로 벌어들인 수수료 이익은 꽤 짭짤했다.
교황청과 국왕으로부터 받았던 동방원정 자금으로 고리대금을 하면서 돈을 불렸던 이들은 환전 수수료 이익으로 고정 수입이 생기면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단체로 급부상했다. 템플 기사단은 더는 가난을 업으로 삼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해졌다. 유럽과 팔레스타인 각지에 소유한 영지만 9천여 곳이었다. 템플 기사단은 땅을 놀리지 않고 그곳에 요새들을 건설했다.
템플 기사단은 약탈을 일삼던 기존의 기사단과 달랐다. 그들은 신용을 잘 지켰다. 돈을 맡긴 본인 외에는 어떤 이유로도 어떤 압력이 들어와도 인출을 거부했다. 덕분에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서로 템플 기사단에 돈을 맡기거나 자금을 융통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 영광도 오래가지 못했다.

 

13일 금요일의 악몽과 미스터리 보물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하늘에 날아가는 용도 떨어트릴 권세를 자랑하던 템플 기사단에게 최대 위기가 닥쳤다. 그날 프랑스의 펠리페 4세는 각 지방 영주들에게 은밀하게 보냈던 밀서를 일시 개봉할 것을 명령했다. 밀서에는 템플 기사단의 각종 이단 행위, 신성모독 행위, 남색 행위가 조목조목 기록돼 있었다. 평소 자신을 그리스도의 현신이라 여겼던 필리프 4세는 믿기 힘든 죄목으로 템플 기사단을 고발하고 즉각 체포했다.
13일 금요일 새벽 펠리페 4세는 놀라운 속도로 템플 기사단을 검거하고 그들의 재산을 압수했다. 소탕 작전이 실행된 당일에만 파리에서 140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체포됐다. 몇몇 기사들은 스코틀랜드로 피신했으나 단장 자크 드 몰레는(Jacques de molay)는 좁혀오는 체포망에 걸리고 말았다.

 

시농 양피지
2001년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시농 양피지. 이 문서에는 기사단의 이단 혐의가 유죄가 아니라는 교황의 판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쟁 자금을 위해 기사단에 많은 빚을 지고 있던 필립 4세는 기사단의 이단 행위를 고발하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펠리페 4세가 아무리 이단과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이들을 검거했다고 했지만, 교황 직속 기관을 일망타진한 일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교황이 이 사건을 문제 삼아 황제를 파면시키고 전면전을 선포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템플 기사단은 별다른 성과 없이 매일 깨지기만 하던 십자군 원정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며 자존심이었다. 그들은 180여 년이 넘는 세월 성지를 지키고 순례자들을 보호해 왔던 성전 기사단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클레멘스 5세는 펠리페 4세가 템플 기사단을 체포하라면 체포 명령을 내리고 해체하라니까 해체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템플 기사단의 운명은 교황의 안위에 직결되는 문제였는데도 말이다. 물론 클레멘스 5세는 체포 후 이들을 교회 재판에 세워 대충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펠리페 4세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클레멘스를 협박했다.
펠리페 4세의 선 공격에 놀란 클레멘스 5세는 그에게 대충 협조하는 척하다가 뒷일을 도모하려고 했다. 하지만 뒷일을 도모하기도 쉽지 않았다. 펠리페 4세가 선임자를 살해하고 교황의 자리를 차지한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클레멘스 5세는 11월 22일, 전 유럽의 템플 기사단 체포 명령을 내리고 1312년 템플 기사단 전격 해체를 공식 선언했다.
체포된 기사단은 죄목을 부인했지만 계속되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이단 행위를 비롯한 천여 개의 죄를 인정했다. 7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며 온갖 고문을 당했던 단장 자크 드 몰레 역시 대부분의 죄를 인정했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는 대가로 공개 석상에서 죄를 고백하기로 타협했다. 그런데 약속과 달리 군중 앞에선 자크 드 몰레는 고문을 당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결국, 그는 공개석상에서 산채로 화형당하고 말았다.
템플 기사단은 자신들의 재산을 탐낸 펠리페 4세의 음모로 괴멸당하고 말았지만 템플 기사단의 보물은 두고두고 탐험가들의 모험을 부추겼으며 수많은 전설을 남겼다. 전설에 따르면 자크 드 몰레는 템플 기사단의 부흥을 위해 화형을 당하기 전 자신의 조카, 기스 드 몰레에게 직위와 함께 보물의 위치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교황이 기사단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지 않자 그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템플 기사단의 역사를 쫓다 보면 그 보물의 힌트를 알 수 있을까? 보물은 못 찾더라도 템플 기사단을 쫓다 보면 중세의 한복판에 있는 듯 흥미진진한 모험은 즐길 수 있을지 모른다. 자, 그럼 템플 기사단과 함께 지금 중세로의 탐험을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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