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이 본 뉴스
등록된 기사가 없습니다.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광고모집중
여행의 뒷모습
임진우 2018-08-06 14:23:39

이진신
한의학박사, 경희푸른한의원 원장
hanisa.co.kr

 

때론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게 기억될 때가 있다.
처음 가보는 여행지에 도착해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게 될까를 계획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정을 고민하며 동선을 짜는 일은 여행의 근간이 되기에 매우 중요하다. 정해진 여정을 따라가는 편리함 대신 복잡하고 귀찮은 이 과정을 직접 준비할 때에는 여행의 순간순간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장점뿐 아니라, 불확실성을 지닌 여행이란 터널을 지나 마주친 즐거움의 빛처럼 선명하게 기억에 새겨진다. 그러한 여행에서 목적지의 도착은 여행의기쁨을 누리던 중 받게 되는 보너스처럼 다가올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환자를 만나는 일상은 완치라는 목적지를 향해 함께 가는 여행과 같다. 단 한사람도 같은 유전자를 지니지 않은 것처럼, 나이와 성별, 질병의 과거력과 각각의 삶이 빚어낸 험준한 질고를 여행하는 과정에 환자와 주치의가 만나 건강을 회복하려는 여정을시작하는 것이다. 이 출발선에서의 계획과 실행, 동행 간의 교감은 중요하다. 머리 아픈 치료의 과정을 설명하고, 치료하는 동안의 여정 중 겪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도 알려주다보면, 단순히 “안 아프죠?” “괜찮죠?” “오늘 진료 끝~!”이라는 진료 문법에 익숙해진 환자스스로가 건강 여행의 주인공임을 자연스레 인지하게 된다.
멋지게 설계하여 치료를 시작하지만 모든 환자와 완주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맞는 더 나은 방법을 찾아가는 환자에게는 행운을 빌어 떠나보내며, 나와의 동행을 선택한 환자의 가이드 역을 맡다 보면 지친 하루가 쉼 없이 지나가곤 한다.
이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것에 사명감을 두고 살아가는 의료인에게 큰 힘을 주는 분들은당연히 멋지게 완치라는 도착지에 안착한 경우이다. 하지만 꼭 완치에 도달하지는 못해도큰 감동을 안기는 분들이 있다.
만날 때마다 여러 증상을 호소하는 이 분은 뵐 때마다 새롭게 생긴 다양한 고통에 대해 기승전결로 스토리텔링 하시는 할머님이셨다. 짧게 뵙는 시간 동안 안면근육을 적극 활용하며 증상을 묘사하는 모습에서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안쓰러움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새롭게 주어지는 과제를 어떻게 잘 치료할 수 있을까 하는 숙제를 주셨다. 하지만 그런 탄식과도 같았던 순간이 지나고 치료를 해드리고 나면, 늘 “감사합니다~”, “더운데 수고하셨습니다”와 같은 인사를 남기신다.
처음 그 인사를 받은 날에는 조금 전 고통을 호소하던 그분과 같은 분인지 의심될 정도로환한 표정을 짓고 계셨는데 고통과 감사라는 상반된 감정을 한 분이 연기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일흔을 훌쩍 넘기신 연세에 고통을 폭풍이 휘몰아치듯 격정적인 어조로 설명하시더니 어떻게 바로 환한 미소를 띠며 감사를 표할 수 있을까? 힘들어하시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다가 너무 길어지면 살짝 지치기도 했었고, 이러한 때에는 경솔하게도 ‘고통을 너무 심하게 강조하시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감사 표현’은 인생을 굽이굽이 지내며 체득한 그 분만의 셀프 치료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치료법 덕분에 적지 않은 연세에, 그리 많이 아프면서도, 밝고멋지게 사셨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분의 모습은 고통의 지나친 강조가 아니라,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본인을 도와주려는 이의 작은 노력을 격려하려는 깊은 배려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단 한번도 거르지 않은 ‘아휴~ 감사합니다” ‘어휴~ 수고 많으셨습니다’ 라고 말씀하며 가시는할머니의 경쾌한 발걸음은 늘 진료실과 한의원에 생기를 남기셨다.
오늘은 무더운 캄보디아 땅에서 우기 탓에 유실된 길을 지나는 자동차의 짐칸에 자리 잡고 앉아 있다. 트렁크가 있어야 할 SUV의 공간에 뒤를 바라보며 쪼그려 앉아서 있으니, 울퉁불퉁한 길을 두 엉덩이가 적극적으로 느끼고 있다. 자동차의 뒷문에 붙어있는 작은 창으로 바라본 풍경은 늘 앞을 보며 다가오는 풍경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뒷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은 눈에 꼭꼭 담기도 전에 멀어진다.
늘 뵐 수 있을 것 같던 할머니의 소식을 며칠 전 듣게 되었다.
함께 계획한 치료의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못했고, 그 울퉁불퉁한 길을 여정 삼아 열심히달리는 중이었는데, 할머니 인생이 종착점에 도착했다는 말씀을 남편 어르신의 붉은 눈시울이 전해주셨다. 도착하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예기치 못하게 만난 짙은 구름 속에 피어난 황혼빛은 슬프게도 아름답기만 하다. 짙은 고통의 순간순간에도 주변을 따스한 빛으로 물들인한 할머님의 폭풍 같은 삶이 차창 저 멀리 흘러간다.
그 어르신의 삶에 경의를 표할 시간을 주려고, 짙은 어둠도 황혼의 빛에 살짝 자리를 비켜준다.

 

그렇게 한 인생의 풍경이 멀어져 갈 때,
잡을 수 없기에 진한 아쉬움과
울퉁불퉁한 길이 주는 강한 울림으로
기억 속에 남겨질 것 같다.
다가오는 풍경을 볼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인생이란 여행의 뒷모습은
인생이 ‘고통의 무게’가 아닌
‘감사의 깊이’로 물들여진다는 비밀을 보여준다.

 

 

디지털여기에 news@yeogie.com <저작권자 @ 여기에. 무단전재 -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