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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과 후버댐의 부동산이 남긴 교훈
임진우 2018-10-02 17:30:16

막대한 부동자금이 견인한 집값과 맞물려 가계부채와 자영업자 대출을 합하면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거의 따라잡았다. 가계부채 실태는 부동산 버블이 극심한 영국을 앞서기도 했다. 중앙·지방정부 채무 증가와 더불어 재무제표상 최초로 1500조 원을 상회한 국가부채 역시 리스크 요인이다.
고용과 투자 악화 원인을 경기 전반의 하강, 내수 부진과 최저임금에서도 찾는다. 일자리 창출 능력은 일본의 8분의 1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나올 만큼 사면초가의 형국이다. 고용 감소와 소득 정체는 필연적으로 이자 상환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기에 더 위험하다.

 

2018년 9월 16일 브릿지 경제
“부동산發 가계부채 놔두면 제2의 ‘리먼’ 온다.” 기사 중에서

 

 

황수정 작가
「물음표로 보는 세계사」, 「느낌표 세계사」 저자

 

정부의 대책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천정부지로 날뛰던 부동산 시장이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조차 얼마나 지속될지 모를 일이다. 전 세계 금융 시장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리먼 사태의 교훈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동산 시장에 혼란만이 존재할 뿐이다. 버블은 도대체 무엇이 버블인지 헷갈리고 인구는 줄어들고 빈집은 늘어난다는데 막상 내 집 마련을 하려면 살 집이 없거나 너무 비싸다. 미스터리 영화보다 더 미스터리한 이 상황을 대부분의 서민은 이해할 수 없다. 이쯤되
면 이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이 우리만의 특별한 케이스인지 궁금해진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납득이 안 되는 부동산 정책은 우리 역사에 늘 있어왔다. 지금은 낭만이 되었지만 말이다.

 

파리의 낭만에는 이유가 있다?
애덤 고프닉의 <파리에서 달까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파리는 언제나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모습 그대로이지만 본질에서는 자기만을 사랑하는까다로운 도시이다.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기념비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또 추상적인것과 발덧이 날 정도로 돌아다녀야 하는 사람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파리와당신이 하나로 결합되기 때문이다” 파리는 애덤 고프닉의 <파리에서 달까지>의 한 대목처럼 구구절절 추상적인 문구가 필요하지 않아도 충분히 낭만적이며 충분히 몽환적이다.
파리는 먼바다를 건너온 이민자들에게 꿈을 안겨주었던 자유의 여신상이 없어도 뉴욕보다 더 자유롭다. 사랑의 감정이식은 오래된 연인이라도 퐁 네프 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만큼은 영화 속 주인공인 양 애잔한 사랑을 떠올릴 수 있다. 파리에선 프라다를 입는 악마가아니라 해도 충분히 패셔너블하며 퐁데자르 다리 위에 걸터앉아 시집을 읽고 있다면 누구나 카뮈와 사르트르, 랭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파리는 현재하고 있는 가장 비현실적인 도시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예술, 낭만과 일상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21세기 프랑스 파리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파리에서의 시간 여행은 눈앞의 정경처럼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낭만적인 파리의 어두웠던 흑역사
이 도시는 자유와 평등을 위해 설치되었던 바리케이드를 오랜 상징으로 파리코뮌의 붉은국기가 어울렸던 곳이었다.
그 때문인지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같은 혁명가들이 이도시를 망명지로 선택하기도 했다. 그 시절 파리의 골목에는 낭만적인 샹젤리제 불빛이 아니라 가난과 배고픔이 짙게 깔려있었다. 파리는 툭하면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문제 지역이었고 그만큼 숨어서 무엇인가 도모하기에 적합했던 도시였다. 이 도시의 역사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기원전 300여 년 경 시테섬에 골 족의 일족인 파리시(Parisii)라는 원주민이 정착했다. 이들은 물 한가운데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루테리아’(Luteria)’라고도 불렸는데 52년 이곳을 점령한 로마군은 원주민들의 이름을 따 이 도시를 ‘뤼테스’라고 불렀다. 흥미로운 점은 도시 파리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이들은 적에게 저항하는 방법도 과격했다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를 통해 이 지역에 사는 이들이 항복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거주지를 다 태워버리는 방식을 취했다고 고백했다.
로마의 점령지였던 이곳에는 로마인의 도시가 건설됐다. 원형 투기장과 광장 같은 공공건물이 지어지고 로마식의 직선도로가 만들어졌다. 시간이 흘러 로마가 쇠퇴하고 이곳을 향한 침략이 잦아지면서 사람들은 센강 왼쪽의 도시를 버리고 다시 섬으로 들어가 두꺼운 성벽을 쌓고 피신해버렸다. 이 도시가 파리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4세기 무렵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파리는 세상에 많고 많은 흔한 도시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파리가 그저 그런 외곽 도시에서 한 국가의 수도가 된 것은 3세기가 흘러 프랑크족이 이곳을 점령하고 나서부터다. 이후 왕조가 바뀌면서 주변 도시로 격감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파리의 백작 위그 카페가 프랑스 왕으로 추대되면서 다시 수도가 되고 왕권이 안정되면서 인구도 크게 늘어났다.
파리는 여러 왕을 지나면서 성곽이 완성되고 대학과 성당들이 건축되면서 점차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그리고 프랑스 역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슷한 시기에 절대 왕권이 국가를 지배하던 시대를 맞이했다. 흔히 여기에서 역사의 공식은 이렇게 전개된다. 강력한 왕권을 손에 넣은왕은 수도를 정비한다. 도로를 확충하고 성벽을 보수하고 자신의 화려한 업적을 남기기 위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짓는다.
그런데 태양왕 루이 14세는 전혀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과감하게 수도 파리를 버리고 베르사유궁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럼 수도가 이전된 것일까? 대부분 수도를 이전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따르기 마련이다. 가령 왕의 권력을 쇄신하기 위함이라던가 아니면 북벌, 남벌 같은 원활한 정복산업을 위해 국가의 총력을 이동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보금자리 이동은 그저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일으킨 프롱드 난으로 호되게 고생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그는 후대의 왕들보다 더 먼저 파리에 꿈틀거리는 반항적인 공기를 두려워했다. 이 시기에 파리는 비록 왕이 버린수도였으나 명실상부 프랑스의중심부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도시가 팽창할수록 위험 지역으로 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낭만을 위하여! 파리 재개발 착수?
18세기 이후, 프랑스에서도 산업 혁명의 바람이 불어 닥치면서 많은 인구가 도시로 집중됐다. 산업화로 이동하는 인구 대부분은 가난한 노동자인 경우가 많았다. 서울의 6분의 1밖에 안 되는 이 좁은 도시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다 보니 방 한 칸짜리 주택에 6~10명의 가족이 머무는 경우가 허다했다.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주택난은 도시에 난개발을 몰고 왔고 낮은 임대료를 받기에 적합한 목재 건물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는 바람에 도로는 좁고 복잡하게 엉켰다. 여기에 중세시대부터 내려오는 고질적인 상, 하수도 부족문제로 오수가 넘쳐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파리의 이런 열악한 환경이 시민들에게 위험했다면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파리는 권력자들에게 위험했다. 시민들 사이에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는 의식이 팽배해졌고낮은 임금과 개선의 여지가 없는 생활환경에 대한 불만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시한폭탄처럼 위험 수위를 넘나들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며 날마다 골목의 카페에 모인 사람들과 그들이 권력에 대항할 바리케이드를 자유자재로 칠 수 있는 도시는 왕과 권력자들에게더할 나위 없이 위험한 장소였다.
자유와 권리를 위한 외침이 거리를 가득 메우던 파리가 일대 변화를 맞게 된 것은 그들의정치적 외침과 투쟁과는 거리가 먼 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에 선출되면서부터다. 왕은 바뀌어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교훈은 한때 맹렬히 비난했던 인물에 대한 향수로 돌변했고, 제조사도 불분명한 나폴레옹 향수를 공공연하게 PR했던 루이 나폴레옹은 프랑스 첫 대통령선거에서 75%의 득표율을 자랑하며 당당하게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문제는 나폴레옹 향수에 잘못 심취된 대통령이 돌연 황제가 되겠다고 나서면서부터 발생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권력에 집착하는 대통령들의 잘못된 특기인 의회 해산과 헌법 개정을 통해 황제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독재자에서 쿠데타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나폴레옹 3세는 국민투표에서 약속했던 국내농업의 보호 대신 무역 장벽을 철폐하고 영세 농민과 노동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적극적인산업화 정책을 펼침으로써 공약을 지키지 않는 독재자의 수순을 착실히 밟아갔다. 여기에시대의 흐름을 간과하시는 센스를 발휘해 손에 쥔 망각한 권력을 마구 휘두르며 도시 미관 정화라는 타이틀로 파리 성형 수술 작업에 돌입했다.

 

 

나폴레옹 3세의 낭만 뉴타운 파리는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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