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정 작가
「물음표로 보는 세계사」, 「느낌표 세계사」 저자
나폴레옹 3세의 파리 뉴타운 사업
런던에서 유학시절을 보냈던 나폴레옹 3세는 현대적인 런던이 늘 부러웠다. 그는 런던의 현대적인 모습이 재건된 도시의 형태라는 것은 몰랐다. 5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명실상부 유럽최대 도시, 런던은 1666년 9월 2일 푸딩레인 지역 한 빵집에서 일어난 원인 모를 불로 한순간에 폐허가 됐다. 이 화제로 1만 4천여 가구를 포함한 도시의 80%가 전소되고 80여 개가 넘는 교회가 불탔다. 대화재 사건 이후 런던은 모든 주택을 석재와 같은 불연소 자재로 짓는 것을 규정으로 만들었고 거리도 화재 진압에 용이하도록 4차선으로 넓혔다.
이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네로처럼 도시에 불을 지를 수도 없고 자연스러운 화재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 없었던 나폴레옹 3세는 도시 미관 재정비 사업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앞세워 조르주 오스만 남작을 파리의 지사로 임명했다. 황제로부터 뉴타운 사업을 지시받은 오스만 남작은 곧바로 파리 도시 개조 사업에 뛰어들었다. 남작은 고질적인 파리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도시 개조 사업을 위해 우선 도로를 정비했다. 좁고 복잡한 도로 정비를 위한 그만의 획기적인 해결 방책은 2만여 채 가구가 밀집된 빈민가를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시도는 왕의 절대적인 지지 아래 척척 진행됐다. 문제는 이 불도저식 도로정비 때문에 뤽상부르 공원의 상당지역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고대 건축물들까지 깔끔하게 없어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너무 깨끗하게 밀어버리는 바람에 새로운 집을 찾아 떠나는 이들의 대이동으로 동부지역에 심각한 주택난이 발생하고 말았다.
오스만 남작의 불도저식 정비 방식은 또 다른 빈민가와 주택난을 만들어냈지만 중세의 지저분한 도시 개선에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오스만화’ 이후 파리에는 상수도관이 두 배 넘게 늘어났으며 160km에 불과했던 하수도도 540km로 늘어났다. 또 600km에 달하는 용수로가 개발되어 파리의 식수난도 해결됐다.
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현대적으로 깔끔한 도시로 거듭났다. 새로 생겨난 도시 옆으로는 8만여 그루의 가로수가 심어졌고 거리에는 가스등이 켜져 ‘빛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도심 곳곳에는 몽수리, 몽소, 쇼몽 등 공원들이 생겨났다. 현재 파리의 모습은 완벽히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 남작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폴레옹 3세의 1타 3피! 이어지는 피박 행진
나폴레옹 3세는 ‘뉴타운 파리’ 사업으로 꿈에 그리던 현대적인 도시를 손에 넣고 대규모 박람회로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다.
또 도시 정비 사업 명목으로 도로를 확장해 바리케이드 칠 골목을 없애버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규모 토목 사업으로 과잉 자본이 발생해 공항도 해결할 수 있었다.
오스만 남작은 나폴레옹 3세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는 당초 계획된 것보다 도시 정비 사업을 더 크게 확장했다.
그는 시간 간격을 두고 소규모로 진행하는 방식 대신 한꺼번에 파리를 대수술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도시에 대한 권리’를 저술한 하비 교수의 주장처럼 나폴레옹 3세와 합작한 오스만 남작의 뉴타운 사업은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떠돌던 잉여 자본과 실업 상태의 노동력을 한꺼번에 해결할 방법이자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급진적인 세력을 소비와 쾌락의 공간으로 몰아넣는 묘안이긴 했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파리 뉴타운 사업은 확실히 나폴레옹 3세의 1타 3피 전략이긴 했다. 하지만 사업 초기에 투입됐던 잉여자본은 곧 바닥이 나고 말았다.
수십 년에 걸쳐 펼쳐진 대규모 토목 사업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오스만은 매해 5천만에서 8천만 프랑에 달하는 금액을 대출받아야 했다. 1858년부터는 부동산업자들에게 분할 토지를 판매해 건설비용을 충당했다. 그러나 충당할 수 있는 자금에 도 한계가 있었다. 파리 개조 사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었다. 대출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1조 50억 프랑에 이르렀고 소액의 보조금을 지원받는 대가로 참여한 민간 개발업자들의 연쇄 부도도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개발의 첫 삽을 푸는 순간부터 시작된 자금난과 국가 부채 그리고 부도의 위기에 몰린 민간 업체들의 문제는 얼마 되지 않아 개발의 발목을 잡는악재로 작용했다. 여기에 ‘개발’ 냄새를 맡고 몰려온 부동산 큰손들은 도심지의 땅값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지역의 땅값까지 올려놓았다.
대부분 대규모 토목 사업에 세금을 동원했지만 오스만 남작은 직접 차용과 개발기금 공채 발행, 채권 위임 발행을 혼용해 다양한 형태의 빚을 만들어 냈다. 물론 위험을 분산시켰다는 측면(?)과 다양한 방법으로 각계각층에서 투자 명목으로 돈을 잘 끌어왔다는 면만 보자면 오스만의 방식이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투자란 또 다른 의미로 누군가에겐 갚아야 할 빚이다.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 남작이 거금을 들여 벌이는 이 도시 개발 사업은 말이 사업이지 빚을 갚아야 할 정부 측면에선 자금의회수 여부도 불투명하거니와 이익 발생을 장담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3세는 파리 개조 사업으로 자신의 두 가지 목적을 이뤘지만 경제 공황 탈출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대규모 토목 사업은 단기적인 경기 부양책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곧 투기와 거품을 양산한다는 것을 모두에게 확인시 켜줬기 때문이다.
미국 대공황이 만들고 트랜스포머가 선택한 미국 제일의 안식처?
미국 영화에선 종종 테러의 단골 목표로 등장하는 댐이 있다. ‘슈퍼맨’과 ‘007’ 시리즈의 촬영 장소이자 지구를 지키는 변신 ‘트랜스포머’의 은신처인 이 댐은 콜로라도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딱히 미국 안보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 같지 않은 이 댐은 20세기 공학이 이뤄낸 눈부신 성과라고 칭송받는 후버댐이다.
후버댐은 미국 역대 최대의 경제 대공황 블랙 먼데이의 산물이다. 자본주의에서 호경기와 불경기의 주기적인 변동은 늘 있는 일이었지만 1929년의 경제 대공황은 달랐다. 당시 미국은 세계 1차 대전으로 전쟁 특수를 누리며 최대 호황기를 맞던 터라 그 충격이 더욱 컸다. 시장의 소비를 감당할 실구매자들은 전체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공장에선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과잉 생산만큼 미국 경제를 위협하는 것은 적당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잉여 자본이었다. 자, 세계 대전 이후라는 시점만 빼고 보면 1929년 미국의 상황과 1848년 나폴레옹 3세의 상황이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그래서였는지 이들의 불황에 대처하는 법도 꽤 비슷했다.
경제 대공황 시점에서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루스벨트는 점진적인 경기 회복을 주장했던 허버트 후버를 제치고 새로운 처방전 ‘New Deal’을 내세우며 당선됐다. 이제 교과서적인 측면에서 대공황을 타개할 그 새로운 처방전 뉴딜정책을 살펴보자. 그동안 우리는 뉴딜 정책의 핵심이 정부가 대규모 토목공사를 도모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비를 촉진해 경제를 회생시킨 신의 한 수라고 배웠다. 국가가 댐과 도로 같은 대규모 토목 사업을 추진해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고 이를 통해 소비를 부추겨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 뉴딜 정책의 핵심이었다. 후버댐은 바로 이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뉴딜 - New Deal’이란 단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뉴딜은 스퀘어딜(Square deal: 공평한 분배 정책)과 뉴 프리덤(New Freedom: 새로운 자유 정책)의 합성어다. 뉴딜의 의미에서 보듯이 이 정책의 핵심은 분배가 핵심이었다. 사실 뉴딜 정책의 총예산 중 댐 공사 예산은 전체의 10% 정도에 불과했다. 뉴딜정책을 앞세우며 대통령에 당선된 루스벨트는 의회를 통해 18개의 경제 법안을 통과시키고 정책을 펼쳤는데 그 정책의 키워드는 바로 ‘구제와 부흥’에 있었다. 사회적 불평등 해소, 금융 시스템의 현대화, 노사 단체 협약 제도화, 최저 임금제 도입, 고등 교육에 대한 투자 등 뉴딜 정책은 대공황 상태에서 실시할 정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복지 부분이 강했다. 물론 대규모 토목 사업을 통해 수요를 인위적으로 창출하려는 정책 또한 뉴딜에 포함됐다. 뉴딜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단순히 정부가 주도한 국가 토목 사업 정책이 아니었단 것이다.
그나마 이 토목 사업이 아무런 부작용 없이 순조롭게 끝났다면 아마 루스벨트는 노벨 경제학상 내지는 평화상을 받아야 했을것이다. 정부 주도의 대규모 공공사업과 인위적인 수요 창출은 자선사업이 아니다. 명백한 적자 사업이다. 정부가 부채를 양산하고 그 부채가 시장에서 자본이 되는 흐름은 필연적으로 통화과잉을 불러오고 인플레이션을 불러온다. 루스벨트 정부 역시 통화과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긴축 재정으로 돌아서고 말았고 회복에 들어설 듯 보였던 경제는 또다시 붕괴하고 말았다. 나폴레옹 3세는 현대적 도시와 바리케이드 전멸이라는 소소한 목적이라도 달성했지만 루스벨트는 분배라는 대의도 지키지 못한 채 경기부양에서도 실패한 것이다.
한때 경기를 부양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역시 대대적인 토목 사업이 펼쳐졌다. 한반도의 굵직한 강들이 수술대에 올랐고 운하가 건설됐다. 하지만 현실은 교과서의 해결방식처럼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잠시 잠깐 에펠탑이 현대적인 파리 개선 사업의 상징이 되고 후버댐이 대공항의 해결책이었을지 몰라도 우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대규모 토목 사업으로 인위적인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굳이 파리의 도시 개선 사업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미국의 대공황 시절만 해도 대규모 공공사업에 노동력이 필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기계의 효율성이 곧 노동력이다. ‘위에서 흘러넘치는 물이 바닥을 적신다’는 트리클 다운 효과는 효과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나마 파리의 에펠탑과 후버댐은 관광객이라도 끌어모았는데 우리의 토목 사업들은 도대체 무엇을 끌어모을지 궁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