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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도 입고 싶어 하는 사치스러운 역사?
신용경제 2018-12-03 14:58:36

황수정 작가
「물음표로 보는 세계사」, 「느낌표 세계사」 저자

 

비쌀수록 잘 팔리는 베블런 효과는 1899년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사회 평론가인 베블런이 발표한 <유한계급론>의 “상층계급의 두드러진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자각 없이 행해진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명품은 확실히 정상적인 소비재의 경제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건 명품의 경제학이 사람들의 이중적인 심리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황에도 가격을 올리는 명품과 그 명품을 사겠다고 줄을 서는 사람들을 비난하면서도 명품에 대한 동경까지 부인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이 이중성이 명품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쯤해서 연말연시 선물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도대체 우리는 명품이 꼭 필요한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왜 명품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일까? 명품에 대한 애증의 쌍곡선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우리에겐 항상 사치스러운 역사가 있었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명품=사치품’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명품은 ‘뛰어난, 혹은 이름난 물건’이란 뜻이다. 고가의 브랜드 상품을 뜻하는 ‘Luxury’가 아니라 ‘Masterpiece’인 것이다. 명품을 후자 쪽으로 정의한다면 별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명품은 장인의 기술과 가치로 존재감을 나타내지만 사치품은 오로지 비싼 가격으로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이런 본질적인 뜻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장인의 기술이 집약된 명품도, 값비싼 사치품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해야하는 대다수 서민에게는 똑같이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치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 하도 널을 뛰어서 무엇이 명품의 가치인지 헷갈릴 정도다.
이제는 건강을 위해 섭취를 제한해야 할 음식으로 분류된 설탕과 커피, 초콜릿도 사치품으로 대접받던 시대가 있었다. 수요가 많은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면 그 어떤 물건도 사치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쉬운 예다. 우리가 인류 역사상 가장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어 사치품이 넘쳐나고 사치품 목록이 달라지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는 사치품에 맹렬한 비난을 쏟아붓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들도 알고 보면 사치품인 경우가 많았다. 수많은 사람의 피와 살로 지어진 궁전, 성당, 건축물과 예술 작품들, 일부 상류층을 위해 존재했던 미술품들, 오페라까지 모두 생계와 무관한 것들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역사는 틈만 나면 이 호사스러운 사치품목들을 탐하지 않았던가?
사치의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본 <사치와 문명>의 저자, 장 카스타레드는 인류 역사에서 사치는 물질적인 호화로움을 넘어 종교, 문화, 예술을 갈망하는 욕망까지 아우르는 정신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화의 원동력 측면에서 사치는 본질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속성을 지녔다. 다른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하고 자신의 물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차별성을 지니고 싶어 하는 복잡하고 무의식적인 욕망, 이것이 바로 사치다.
사치를 이렇게 포괄적으로 정의하면 인류는 지적인 사고가 가능한 그 시점부터 사치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물건을 담기만 해도 될 그릇에 그림을 그리는 수고를 했을까?
인류는 이처럼 지구상에 등장하면서부터 사치를 시작했지만 해당 품목은 그때그때 달랐다. 지금은 누구나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도 사치품에 속할 때가 있었다. 이 물건이 지금도 사치품이라면 우리 대부분은 사치의 대명사로 군림했던 아멜다 마르코스를 뛰어넘을 수 있다. 이것이 궁금하다면 지금 꼼지락거리는 당신의 발가락을 보라. 당신의 발을 감싸고 있는 것이 보이는가?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양말도 사치품인 적이 있었다.

 

구멍 난 양말도 다시 보자! 사치스러운 양말?
중세까지만 해도 사람이 실로 일일이 짜야 하는 양말은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나폴레옹의 첫 번째 황비인 조세핀은 자신의 이름을 수놓은 명주 양말을 1백 켤레 이상 가지고 있었고, 두 번째 황비 마리 루이즈 역시 양말 사치를 즐겼다고 한다.
무명실로 짠 양말에 정교한 수를 넣는 기술은 15세기 북유럽에전해졌고 16세기 들어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도 양말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이들 국가에서는 양말을 사치품목에 넣고 몇 차례 양말 소비를 금지하기도 했다.
어디 양말뿐인가? 지금은 여성의 필수품인 스타킹 역시 예전에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스타킹은 원래 ‘호즈(hoze)’라는 중세시대 남성 의복 중 하나였다. 남성들이 입는 딱 붙는 바지인 호즈는 지금의 나일론 재질 스타킹과 비슷해 보이지만 많이 달랐다.
여성들이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스타킹을 본격적으로 신게 된것은 17세기 즈음으로 귀족 출신의 여성들이 주로 애용했다.
지금의 나일론 재질의 스타킹은 듀퐁(Dupont)사에서 나일론을 생산하면서부터 만들어졌다. 1940년 뉴욕에서 나일론 스타킹이 처음 판매되던 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스타킹을 사려고 했는지 몇 시간 만에 4백만 켤레의 스타킹이 팔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불티나게 팔리던 스타킹이 시장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 일이 발생했다. 발매 직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나일론이 모두 낙하산을 제작하는 데 쓰였기 때문이었다.

 

산업혁명의 시작은 사치품 때문이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발생한 산업혁명은 인류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산업혁명으로 도시가 성장하고 노동 운동이 발전했으며 광범위하게 자연을 이용하게 된 인류는 스스로의 노동력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산업혁명에서 흥미로운 점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낸 분야가 바로 면직물 공업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전통 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모직 공업이 아니라 면직 공업에서 산업화가 추진되었다는 점이 이상하지 않은가?
영국이 동인도 무역을 통해 수입한 인도의 면직물이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모직물에 비해 세탁과 보관이 쉬웠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면직물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대량 생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즈음 타이밍 좋게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영국은 공장제 기계 공업을 도입해 보다 저렴하고 품질 좋은 면제품을 대량 생산해 유럽은 물론 전 세계로 수출하면서 산업혁명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인류의 역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산업혁명이 농업 분야가 아니라 면직물 공업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참 재미있는 우연이다.
어쩌면 인류는 당장 먹고사는 문제보다 소비의 문제를 더 효과적으로 해결하는데 더 큰 관심이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어찌 되었든 산업혁명 덕에 많은 사람이 소수가 누리던 물질의 혜택을 저렴한 가격에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반대로 항상 남이 누리지 못하는 특별한 것을 누려야 하는 상류층의 불만은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눈으로 바로 보이는 패션에서부터 차별받고(?) 싶어 했다.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입을 수 없는 고급스러운 재질, 타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특별한 디자인, 여기에 VIP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대우까지.

물론 이전에도 상류층들은 재단사에게 자신만을 위한 특별한 옷들을 주문해 입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패션을 주도하는 이들은 주문하는 상류층이었다. 그런데 주문 제작이 아니라 스스로 창작해 옷을 만드는 한 남자가 나타나면서 패션의 중심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창조해내길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제작 시스템을 거부했다. 패션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온 이 사람은 바로 세계최초의 디자이너이자 ‘파리 오트 쿠튀르의 아버지’라 불리는 찰스 프레드릭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다.
그는 파리를 중심으로 획기적인 패션과 시스템을 선보였다. 그의 성공과 더불어 그의 활동무대인 파리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가 되었다. 옷 한 벌로 상류층과 파리, 세계 패션을 들었다 놨다했던 패션의 왕, 찰스 프레드릭 워스. 그는 어떻게 상류층으로부터 패션의 소유권을 빼앗아 올 수 있었을까? 악마도 입고 싶어 하는 사치스러운 역사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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