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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봄을 걷다
신용경제 2017-03-02 17:27:19

좋은 신발은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이끈다는 속설이 있다.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통해 왕자와 재회했고 취업준비생은 면접을 앞두고 새 구두를 장만한다. 오래된 이야기부터 현재 우리의 삶까지, 중요하게 여겨지는 신발. 여기 신데렐라에게 유리구두를 내어준 요정처럼 깔끔한 수선으로 헌신을 새 신처럼 만들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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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구두


“구둣방 일은 시대에 의해 자연스럽게 하게 된 거 같아요. 60년대는 누구나 부족하고 어렵게 살던 때라 밥 세 끼만 먹으면 행복했죠. 학교 육성회비가 없어서 학교도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다녔어요.”

 

전라도 광주에 공장 하나 없던 시절, 11살 소년은 자연스럽게 시내에서 구두 닦는 일을 배웠다. 밥 먹고 잠 잘 데가 있는 것만으로 족했던 어린 소년은 그렇게 사회에 적응해 나갔다.

 

“의붓아버지가 폭력을 일삼아 집을 나오게 됐고 그 후엔 길거리에서 자는 게 일상이었어요. 집도 절도 없으니 겨울엔 빈집에서 아직 재가 남아 따뜻한 연탄을 품고 자기도 했죠.”

 

구두닦이 외에도 껌, 신문 등을 파는 일을 전전하던 그는 잠자리와 밥을 제공해주는 광주 구두닦이 직업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구두 한 켤레에 20원씩 받으면 그 돈을 밥값 개념으로 학교에 예금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게 됐죠. 밤에는 대학생들이 와서 200여 명 되는 우리를 상대로 한글을 가르쳐줬어요.”

 

직업학교에서 많은 도움을 받은 김병록 대표는 그때부터 사회에 나가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힘닿는 데까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방황의 시절은 있었다.


“17살 때 서울에 올라와 다방에서 잔심부름을 했어요. 그러다 유흥업소에서 일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술과 담배, 싸움을 일삼으며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됐죠.”


사춘기를 겪으며 창피함에 구두 일에서 손을 떼고 유흥업소 일을 택했지만, 몸은 거친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지하에 위치한 유흥업소 탓에 마시게 된 많은 양의 먼지와 하루 세 갑씩 태운 담배로 인해 그는 이십 대 초반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 4기 판정을 받았다. 지금은 의학 기술이 발달했지만, 당시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어요. 그때 몸무게가 45kg 정도밖에 안 나갔죠. 의사 선생님께서 여기 일 다 접고 산속에 가서 살라고 해 산에 있는 기도원을 다녔어요. 그러면서 몸이 많이 좋아졌지만, 완전히 낫진 않아 피곤하면 다시 재발하곤 했죠. 지금도 한쪽 폐가 없어요.”

 

유흥업소 생활을 청산하고 산속에서 재활과 신앙생활에 몰두하던 중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하게 된 그는 다시 안정적인 구두 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전에 과일 장사, 택시운전 등 여러 가지 일을 해봤지만 잘 안 됐어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구둣방 일을 시작하게 됐죠. 일이 안정권에 접어드니 어린 시절 입은 은혜와 도움을 갚아야겠단 마음이 들었어요.”

 

돈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일하면서 몸으로 할 수 있는 걸 찾아 도와 줘야겠다는 생각에 구둣방 앞에 ‘65세 이상이신 분들 50% 할인해드립니다’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구두가 하나뿐인 노인분들이 많이 계세요. 어떻게든 고쳐 신어야 하는데 그 비용마저 부담스러워하셔서 50% 할인을 생각했죠. 가끔은 고쳐도 안 되는, 버려야 하는 신발도 있어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새로운 방식을 택했다. 신발이 없는 노인들을 위해 고민한 끝에 그는 가게 단골손님들에게 안 신는 구두가 있으면 가져다 달라는 요청을 했다. 쓰임을 안 손님들은 흔쾌히 응했고 그렇게 받은 구두들을 깨끗하게 손질해 어르신들께 드렸다.

 

“나중엔 가게 앞에 용도를 설명하고 집에서 신지 않는 신발을 가져다 달라고 크게 써 붙였어요. 지역주민들이 지나다니면서 보시곤 십시일반으로 한두 켤레씩 갖다 주셔서 몇 달 만에 몇백 켤레가 쌓였죠.”

 

그런데 어르신들이 가게에 직접 와 신발을 받아 가는 방법은 한계가 있었다. 이에 그는 근처 중국집, 떡집 사장님과 사물놀이 하는 분들을 설득해 공원에서 행사를 벌였다. 행사를 통해 어르신들께 새것처럼 손질된 신발 선물뿐 아니라 공연과 음식 대접까지 해드린 것이다.

 

“구두는 3, 40분 만에 500켤레가 단숨에 사라졌고 그 행사를 기점으로 사연이 알려져 전국에서 신발이 올라왔어요. 당시 IMF가 터져 ‘아나바다운동’이 시작돼 타이밍이 기가 막혔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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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위로


구두 선물을 성공적으로 이어나가며 다듬어지지 않은 노인분들의 머리를 눈여겨 본 그는 학원에서 이발 기술을 배워 한 달에 한 번 노인정과 장애인 시설 등을 다니는 이발봉사도 시작하였다.

 

“지금은 시설 일곱 군데를 정기적으로 다닙니다. 그전엔 구둣방이 본업이었는데 봉사를 다니다 보니 지금은 부업이 돼버렸죠(웃음). 사실 치매 노인분들이나 장애인분들은 낯선 이에게 굉장히 방어적인데 저는 매달 만나니 커피를 타다 주시면서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하세요.”

 

지난 이발봉사 때 계셨던 분이 다시 갔을 때 안 보이면 슬프지만, 그래도 머리라도 깔끔하게 가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마음으로 깊은 교감을 나누며 자신을 기다려주는 분들이 있기에 봉사를 놓을 수 없다고.

 

“한 가지 더, 봉사는 정년퇴직이 없죠. 내가 건강하면 평생 할 수 있는 겁니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정년퇴직 후 외롭다며 봉사를 시작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아 하루 봉사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봉사도 습관이 되고 중독이돼야 할 수 있는 거죠.”

 

그는 봉사 역시 습관이 들어야 함을 강조하며 더불어 봉사는 조건과 대가가 없기 때문에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다고 전했다.

 

“우리 몸이 지저분하면 샤워를 하듯 마음이 지저분해졌을 때 봉사를 하면 상쾌하고 마치 샤워한 기분이 들어요. 또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다시 충전해서 돌아오기도하죠. 봉사도 하고 마음의 샤워와 재충전도 하니 일석삼조 아닌가요?(웃음)”


그렇게 행복함으로 구두·이발 봉사를 빠짐없이 해오던 그에게도 난관이 봉착하였다. 2002년, 모두가 월드컵 열기로 뜨거웠을 무렵이었다.

 

“당시 사춘기였던 딸아이가 부탁하는 거예요, 창피하니까 다른 일 해달라고. 고심 끝에 구둣방 일을 정리하고 중국집을 시작했죠.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장사가 어려워져 문을 닫아야 할 상황까지 왔어요. 당시 아이들이 한창 커갈 때라 더 막막했죠.”

 

아득함과 막막함에 봉사를 가던 중 산길 에서 나쁜 마음을 먹은 순간, 자신을 기다릴 치매 노인분들이 생각나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봉사를 간 그가 대단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해할 수 없기도 하다.

 

“사실 정상적이진 않죠. 하지만 그때 포기해버렸으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없었을 거예요. 엄청난 위기였지만, 동시에 위로와 힘을 얻어 2008년에 다시 구둣가게를 냈습니다.”

 

잠시 공백기를 가졌던 구두 봉사를 다시 시작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모금도 시작했다. 담배를 끊으면서 담뱃값으로 소모됐을 돈으로 작게 시작해 손님 중에 비용을 받기 모호한 경우, 그분들께 500원 1,000원씩 모금을 받아나갔다.

 

“그렇게 1년을 모아 어려운 이웃들에게 쌀을 기부했습니다. 그러다 한번 은 밖에 설치한 모금함을 누군가 가져갔어요. 처음엔 씁쓸했지만,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먼저 가져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죠.”

 

행복은 살아있다.

 

2010년부턴 뒤차 통행료를 대신 내주는 행복 릴레이를 시작했다. 미국의 한 다리에서 누군가 뒤차 통행료를 대신 내고 가 많은 사람에게 잔잔한 감동을 줬다는 글을 읽고 실천하게 된 것이다.

 

“봉사 다니는 곳 중에 일산대교를 거치는 데가 있어요. 유료 대교라 뒤차의 통행료를 내주기도하고 명절이나 새해, 또는 특별한 날에 외곽순환도로를 정기적으로 다니면서 실천하죠. 그래서 늘 톨게이트 입구만 가면 마음이 설렙니다. 단돈 천 원으로 남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덕분에 통행료를 안 내게 된 뒷사람은 난폭운전을 안 하게 되고 양보운전도 할 수 있어 여러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믿는 그는 한 사람이 즐거워짐으로써 가져오는 수많은 나비효과를 기대한다.

 

“앞으로도 새로운 봉사활동을 계속 구상해나갈 예정입니다. 큰 게 아닌 작은 것으로 행복을 주는 방법을요. 또 봉사를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 다면 하루빨리 시작해 습관이 되도록 하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커피값, 술값을 아껴 모금하는 등작은 거부터 시작하는 방법을 추천해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악역이 아닌 선한 역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을 표한 그는 육십 평생 살면서 사회적으로 풍족하지 못하고 궁핍했던 때보다 정이 메마른 지금이 더욱 마음 아프다며 말을 이었다.

 

“자기 위주로만 살아가지 않고, 또 틀에 박힌 봉사, 스펙을 위한 봉사가 아닌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해요. 지금 국민이 굉장히 힘들고 지친 상황인데 이 기사를 통해 조금 이나마 위로가 되고 마음의 상처가 치료 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많은 이들을 위해 따끈따끈한 기사를 계속 써주길 바란다는 부탁과 팍팍한 현실 속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빛이 생기면 좋겠다는 바람을 끝으로 긴 이야기를 마쳤다.

 

‘인간 김병록, 인생 잘 살았구나!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자신에게 스스로 외친 그. 정말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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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유정 기자 jin_yj@mcredi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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