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는 듯한 8월의 무더위 속에서 그날은 아침부터 시원한 빗줄기가 쏟아졌다. 평소보다 기온은 낮아졌지만, 무척이나습 한 탓에 머리끝부터 땀과 빗물이 경쟁하듯 뚝뚝 떨어진다. 어느 슈퍼마켓 처마 아래 도착해 숨을 고르자 저쪽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빠르게 다가온다.
기분 좋은 미소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는 그가 오늘의 주인공, 관악우체국 소속 백현호 집배원이다.
구암동 연예인이 떴다!
서울시 관악구 구암초등학교 일대는 백현호 집배원이 매일 출근하는 배달지역이다. 이 동네 구석구석을 20년 가까이 찾아다녔으니 모르는 집,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바삐움직이는 걸음걸음에도 길가에서 만나는 어르신 한 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세요?” “식사는 하셨어요?”로 시작되는 그의 인사는 매번 기분좋은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오늘은 배달 중 짬을 내어 관악구 구암 경로당을 방문할 참이다. “늘 지나다니는 길이고, 자주 마주치는 분들이지만 이렇게 마음먹고 찾아뵙는 게 쉽지는 않다”는 그의 양손엔 떡과 음료가 가득 들렸다.
“날마다는 아니고요, 한 번씩 생각나고 시간 날 때 찾아뵙죠. 모두가 어머니, 아버지 같은 분들이라 저에겐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경로당에 들어서자 둥글게 둘러앉은 어르신들이 기자에게 누군지 묻지도 않고 어서 앉으라며 대뜸 따끈따끈한 옥수수와 떡을 내민다. “특별히 큰 걸로 내왔다”며 커다란상 두 개가 펼쳐지고, 둥글게 앉은 자리에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가 두런두런 이어진다. 이야기 속 화제는 자연스레 백 집배원으로 넘어갔다.
“저 양반(백현호 집배원) 이 동네서 일한 지 아주 오래됐어요. 저렇게 바쁘게 다니면서도 폐지 모아 팔아다가 그 돈으로 장학재단에 기부를 해요. 참 대단한 양반이야. 한결같아요.”
맨 안쪽에 앉아 계시던 어르신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할머니도 맞장구치며 이야기를 잇는다.
“아마 집집이 숟가락이 몇 개 있는 것까지 다 알거여. 인사도 참 잘햐. 일 하다가도 노인네들 보면 길가에서 사탕 봉지라도 하나 들려주고 가고, 아주 싹싹해. 어려운 이웃들보면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지. 항상 웃는 낯이잖아. 보면 기분이 좋아.”
그러자 여기저기서 “정말 좋은 일 많이 하시는 분”이라며 입을 모아 칭찬한다.
백 집배원은 갑작스러운 칭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어르신들 뵈면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드리는 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즐거운 일”이라며 “그저 어르신들은 건강하시기만 하라”고 말한다.
“어르신들 보면 편하고 좋아서 절로 웃음이 나요. 그러니까 제발 얼굴은 보여주세요. 항상 보이던 어르신들이 며칠 안 보이면 불안해져요. 늘 뵙던 분인데 오래 안 보인다 싶으면 건강에 이상이 생겼거나 심지어 이미 돌아가신 경우까지 있거든요. 다른 건 바라는 게 없어요. 그저 어르신들 건강하시고 지금처럼 그 모습 그대로였으면 좋겠어요.”
반대로 어르신들 또한 백 집배원에게 그런 마음이다. 최근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백 집배원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단다. 매일 보는 사람인데, 그가 며칠 안 보이자사고가 났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저 우체부 양반이 폐지 모으는 노인들 돕는다고 종이 한 장을 허투루 안 버리고 모아. 그런데 폐지 실은 집배원 차가 사고 났다는 소문이 난 거야. 그 말이 건너 건너서 전해지다 보니 ‘그 사람 죽었다더라’ 하는 소리까지 나왔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런데 나중에 멀쩡하게 다시 나타나니 어찌나 반갑던지 눈물이 다 나대. 저 양반 오래오래 잘 살 거여(웃음).”
어르신들 모두 그때가 생각났는지 “그때 그 기억은 생각도 하기 싫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고물 주워다 노인 도와주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야. 나도 잠깐 폐지를 모아봤지만, 상당히 힘든 일이거든. 특히 남을 돕겠다고 그 일을 한다는 건 보통의 마음이 아니지.”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백 집배원이 이제 가봐야겠다고 일어서자 “노래 한 곡 하고 가야지, 가수가 어딜 그냥 가?”
라며 느닷없이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금 당황해 하던 백 집배원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부르겠다고 나선다. “제대로 부르려면 마이크도 하나 줘야지?”라며 몇 겹 겹쳐진 종이컵을 스스로 찾아 잡더니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로 시작되는 노래를 기막힌 음색과 안정적인 가락으로 뽑아낸다.
박수치며 분위기를 맞추던 어르신들의 흥도 고조된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고 짧은 노래가 끝나자마자 백 집배원은 “아이고, 너무 놀았다”며 “어르신들 좋은 시간 보내시라”는 인사와 함께 부리나케 일어선다.
내겐 너무 소중한 사람들
관악구 봉천동 재개발 예정지. 재개발 계획이 나온 이후로도 10년째 방치된 채 자물쇠가 굳게 채워진 집, 곳곳에 균열이 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늦은 오후가 될수록 빗줄기는 더 거세지고 백현호 집배원의 발걸음도 점점 빨라진다. 어느새 우비를 갖춰 입은 그가 “이제 거의 다 끝났다”며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을 부지런히 오가고, 굽이굽이 골목을 빠른 걸음으로 헤매는 그의모자 위로 빗물이 스며든다.
“몸도 편찮으신 어르신들이 불도 잘 안 들어오는 지하방에서 여름이고 겨울이고 너무나 힘들게 사세요. 그런 환경 속에서도 저만 보면 한결같이 미소 지으며 ‘어디 갔다와’, ‘고생이 많네’ 하고 인사해 주시니 더 힘을 내어 일할 수 있죠. 그래서 저도 이분들께 도움될 만한 일이 뭐가 있을지 늘 고민하게 됩니다.”
왕왕 짖는 강아지 소리가 가장 먼저 반겨주는 초록대문 집에 “할머니!” 외치며 들어서더니 잠시 뒤 집 안에서는 어르신과 백 집배원의 이야기 소리가 두런두런 이어진다.
‘아까 노인정에서 노래시켜서 노래하고 왔다’는 그의 말에 한바탕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대화는, 친손자나 아들과 나누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초록대문 집을 나와 다시 골목을 걷다 다다른 낡게 녹슨 대문 앞. 그의 표정이 착잡하다.
“이 집 어르신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만나 뵐 때마다 제가 그렇게 ‘오래 사셔야 한다, 저 그만두는 날까지 계속 건강한 모습 보여주셔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6개월 전쯤 세상을 떠나셨죠. 인생은 영원하지 않고 이별이 당연한 걸 알면서도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그렇게 가슴이 아파요. 항상 지나가는 길이지만 이 앞을 지날 때면 늘 생각이 납니다.”
배달 중에도 신문이나 끈을 주워 배달박스 한편에 모아두는 그에게 “이걸 왜 모으느냐” 묻자 “모두 폐지 모으는 데 필요한 것들”이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이런 종이 한 장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요. 모아두면 어르신들한테 꽤 유용하게 쓰이거든요. 끈은 또 끈대로 필요해요. 이걸로 할머니가 박스를 묶겠다고 하시니 허투루 버릴 수 없죠. 그분들에게 어떻게 필요한지 아니까 조그마한 종잇조각 하나도 빳빳하게 펴서 모아요.”
걷는 속도만큼이나 바쁜 일상이 매일매일 계속되지만, 수년째하고 있는 중증장애인 재활치료시설에 대한 기부와 봉사도 잊지 않는다. 이에 얼마 전에는 그가 후원하고 있는 ‘신망애 복지재단’에서 그에게 감사장까지 보내왔단다.
“봉사라고 해서 특별한 건 없습니다. 사무실에 에어컨이 고장 났다고 하면 십시일반 모아 에어컨을 설치해 드리기도 하고, 행사 있으면 달려가서 노래도 부르죠. 최근에는 너무 바빠 소정의 후원금만 보내드렸어요. 마음은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은데 여의치 않았거든요. 그럴 때가 가장 안타깝고 참 많이 죄송해요.”
5년 전 복지재단에서 그에게 감사장을 받을 때만 해도 ‘백현우’라는 이름만 적혀있던 것이, 이번 감사장에는 떡하니 ‘연예인 백현우’라고 새겨져 있다. 노래를 통한 재능기부부터 다양한 봉사활동과 물품 기부까지 조용하지만 꾸준한 그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노래하는 집배원’ ‘봉사하는 유명인’으로 어느새 그들에게 가장 든든한 ‘연예인’이 된것이다.
“이제 퇴직까지 2년 남짓 남았거든요. 그래서 퇴직 후의 진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짬날 때마다 머리 깎는 걸 배워서 대한민국 어르신들 머리를 깎으러 다닐 겁니다. 재미없게 머리만 깎나요? 노래도 부르고 흥도 돋워드려야지요. 어르신들께 기쁨을 드리고 꿈도 드리고 뭐라도 하나 더 챙겨 드릴 수 있는 것, 그게 제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새 소식을 가득 담은 묵직한 그의 배달가방만큼이나 그의 머릿속은 봉사에 대한 생각과 계획으로 가득하다. 비에 젖은 어깨 위로는 책임감도 무겁게 얹혀있다. 그러나 그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이 곧 그의 즐거움이요, 행복이란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 그가 만들어가는 일상이 소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권성희 기자 song@mcredi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