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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아요 그대
신용경제 2017-09-06 09:02:33

올해 개소한 장애인권 법센터는 장애인 인권 보호 활동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김예원 변호사의 법률 사무소다.
가을 햇살 가득한 날 서초구에 위치한 그녀의 사무실에서 잘나가는 국내 대형 로펌을 박차고 나와 1인 사무실을 개업한 이유와 그가 만난 사람들,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이야기들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들이 사는 세상
“부모님 말씀으론 제가 7살 때부터 변호사가 될 거라고 얘길 했다는데 제 기억으론 없고 사춘기 때 제 눈에 대한 얘길 들은 뒤 결심하게 됐어요.”
태어날 당시 의료사고로 인해 한쪽 눈이 적출된 그는 장애인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스스로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점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다.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장애가 있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된 거 같아요. 다만, 의료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알았을 땐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법률적으로 보상받을 길이 없었던 상황이라 부당함을 느꼈죠. 그리고 그때 어딘가에 분명히 저와 비슷하게 억울한 일을 겪는 사람들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어릴 때 사회 수업 들으면서 우는 친구들 있잖아요, 제가 그런 학생이었거든요(웃음).”
학창시절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며 펑펑 울고 정의로운 사회를 외쳤다는 그녀는 사회·문화에 관심이 많고 논쟁을 좋아하는 성향을 지녔다. 또 악바리인 탓에 공부도, 싸움도 지는 걸 싫어하고 큰 목소리와 입담은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편에서 함께 싸우고 싶다는 꿈을 품게 했다. 그 어렵다던 사법고시를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꿈에 대한 열망이었다.
“훗날 변호사가 되어 어려운 일에 처한 사람을 찾아가고 그분들과 같이 싸우는 장면들을 생생하게 꿈꾸면서 노력했어요. 고시 막바지 8개월은 하루에 매일 16시간씩 공부를 했죠.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16시간이 아니라 정말 집중해서 공부한 시간만요.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저를 굉장히 몰아세웠죠. 당시 몸무게가 10kg이나 빠질 정도였어요.”

 

께 싸우고 싶다는 꿈을 품게 했다. 그 어렵다던 사법고시를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꿈에 대한 열망이었다.
“훗날 변호사가 되어 어려운 일에 처한 사람을 찾아가고 그분들과 같이 싸우는 장면들을 생생하게 꿈꾸면서 노력했어요. 고시 막바지 8개월은 하루에 매일 16시간씩 공부를 했죠.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16시간이 아니라 정말 집중해서 공부한 시간만요.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저를 굉장히 몰아세웠죠. 당시 몸무게가 10kg이나 빠질 정도였어요.”
 

 

자에 속하는 분들은 심각한 학대상황에 노출돼있거나 폭력이 만연한 상태에 있음에도 도움조차 청하지 않죠.”
무력한 모습의 사람들과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게 되면서 충격을 받은 그녀와 동료들은 일시적인 지원이 아닌 이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곧바로 연수원 내에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연수원장이던 김이수 재판관과 교수들은 좋은 뜻에 동참했고 이에 모금 바람이 불어 큰 성공을 거뒀다.
“한두 달 남짓해서 약 3억 6천만 원이 모금됐어요. 그 돈으로 공익활동을 전담할 변호사 3명을 지원할 수 있게 됐죠. 그때 지원받은 변호사에 속하진 않았지만, 기금활동을 기점으로 변호사의 공익활동에 대해 많은 관심이 생겼어요.”
이후 그녀는 국내 대형 로펌에서 설립한 공익 재단에서 장애인뿐 아니라 북한 이탈 주민, 난민, 이주 외국인 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던 중 심각한 사건 하나를 맡게 되었다.
“미신고 장애인시설에 장애인들이 갇혀있다는 제보가 들어와 장애인단체와 해당시설을 찾아갔어요. 생존자는 네분이셨는데, 당시 가해자 호적에는 21명의 장애인이 자식으로 입적이 되어있었죠. 심지어 네 분 중 한 분은 구출되자마자 직장암 말기로 돌아가셨어요. 남은 세 분의 인권상황도 굉장히 심각했죠. 몸에 원치 않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든가, 여자분인데도 불구하고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번으로 되어있다든가.”
더 경악할만한 사실은 만약 A라는 사람이 죽으면 새로운 이를 데려와 ‘오늘부터 네가 A다’라는 식으로 운영을 해왔기 때문에 희생자의 수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 상황 속의 피해자들을 대리하면서 그녀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고 이는 장애인권 쪽에 더욱 집중해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해자들은 그곳에서 최소 2, 30년을 학대받으며 살았는데 가해자 형량은 3년 6개월밖에 안 나왔죠. 피해자의 몸에 분명히 학대로 의심되는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진술이 안 됐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는 공소장을 쓰려면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경 어디에서, 무엇으로, 어디를, 몇 대 맞았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진술이 필요하죠.
아니면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공소를 기각시켜 버리기 때문에 아주 확실한 몇 개 말고는 기소조차 할 수 없었어요. 정말 안타깝고 화가 나는 상황이었죠.”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똑같은 사법 절차를 거쳐 범죄사실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며 거의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장애인 관련 사건은 성폭력처벌특례법, 아동학대처벌법과 같은 특별한 법체계가 없기 때문에 변호사에겐 기본적인 업무 외에도 피해자의 장애상태를 고려하고 법적 진행 과정에서 그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는 등의 노력과 헌신이 요구된다.
“이외에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다뤘던 장애인 시설비리 등 여러 사건의 피해자 대리를 맡으면서 심각성을 느끼고 장애인권 보호 쪽으로 완전히 마음을 굳혔죠. 그런데 로펌은 어느 정도 사건화가 된 문제의 상담을 잡고 소송을 진행하는 곳이다 보니까 좀 더 날 것 그대로의 사건, 완전 초기의 사건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어요. 그리고 더 많은 분을 직접 만나고 싶었죠.”

 

 

그녀, 날다
타인이 정리한 이야기가 아닌 피해 당사자의 입을 통해 직접 사건의 내용을 듣고 싶었던 그는 고민 끝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장애인인권센터로 이직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장애인 시설을 조사하고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또 현장에 출동해 그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법적·의료적 부분을 지원했다. 그렇게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일하던 그녀에게도 둘째 아이라는 행복이 찾아왔다.
“둘째 임신 후 육아휴직 동안 가만히 못 있는 성정의 저를 스스로 붙잡아두기 위해 3가지 목표를 세웠어요. 논문을 하나 쓰고, 여성가족부에서 위촉하는 성폭력 전문상담원자격을 이수하기, 그리고 사회복지사 자격증 따기였는데 8개월 정도 걸려 모두 이뤘죠.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정말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자기반성을 하게 된 그는 서울시에 한정되지 않고 타 지역 사건을 비롯해 도움 요청을 위한 전화조차 할 수 없는 이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싶었다.
“몇 개월간 고민을 많이 했죠. 안정적으로 복직을 할지, 조금 더 용기를 낼지에 대해서요. 하지만 결국엔 제 마음이 원하는 방향을 따라 장애인권 법센터 개업을 선택했어요.”
김예원 변호사가 어려운 결정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족들의 든든한 지원과 응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개업 의사를 비쳤을 때 남편이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다고.

“남편이 본인 월급으로 우리가 아껴 생활하면 되고 가치 있는 방향이니까 응원하겠다고 해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양가 부모님께서도 같은 마음으로 지지해주셨죠. 그리고 직업상 무슨 회의를 가더라도 회의비라든가 교육비를 조금이나마 받을 수 있어 완전 맨땅에 헤딩은 아니에요. 더 힘든 분들도 많으셔서 이런 말씀 드리는 것도 죄송스러워요.”

 

 

약한 소리를 하는 것도 송구스럽다지만, 두 아이의 엄마로 서, 또 홀로 모든 업무를 진행하는 사업자로서 1인 2역을 해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 아침 챙기고 준비시켜 어린이집에 보내요. 그리고 바로 출근해 5시쯤까지 열심히 일하죠.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러 가요. 다행히 요즘은 스마트폰으로도 업무가 가능해 이동 중에도 일할 수 있어 근무시간은 회사에 다닐 때와 비교해 차이가 거의 없죠. 오히려 더 많은 거 같기도 해요(웃음).”
두 자녀와 집에 돌아온 뒤엔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들과 시간을 가진다. 가족이 잠든 후엔 남은 집안일을 끝내고 그때부터 다시 새벽까지 업무를 시작한다. 남편도 가계일을 돕지만, 야근 등 회사 업무에 따라 퇴근시간이 유동적이기 때문에 가사와 육아는 그녀의 몫이다.
“사실 많은 일과가 벅찰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일하는 거 자체가 즐겁고 보람 있어 스트레스받지 않죠. 그런데 요즘은 체력의 한계가 느껴져서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운동도 시간싸움이다 보니 아직 시작은 못 했어요.”
체력적인 부분 외에도 금전적인 면에서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월급을 받던 회사생활과 달리 고정적인 수입의 안정성이 없을뿐더러 좋은 일을 하지만 세법상 법률사무소는 기부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리 사업자가 기부금을 받고 기부금 영수증을 발행할 순 없어요. 그렇다고 비영리단체로 운영하기엔 영리와 비영리사업은 여러 가지 절차와 시스템이 달라 행정 일만 하다시간을 다 쓸 거 같았죠. 그래서 비영리 쪽은 과감히 포기했어요. 그 시간에 일할 시간을 더 늘리자는 마음이었죠.”
그렇게 후원도, 월급도 없는 장애인권 법센터 운영을 시작했다. 변호사의 주 수입은 사건 수임을 통한 수임료인데 일반 사건 수임은 하지 않기 때문에 초반 수입은 제로에 가까워 그녀는 다른 영업활동 병행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됐다.
그러던 중 현재의 사무실이자,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운영하는 변호사교육문화관 내 ‘다사랑오피스’에서 그의 활동을 지원해주기 위해 사무실을 무료로 제공해주었다.
“이곳 내규도 있지만, 제 양심상 사무실을 받아놓고 일반사건 수임을 해서 밥벌이, 돈벌이하는 건 아닌 거 같아 다른 사건 수임에 대해서는 곧바로 생각을 접었죠.”
모든 일이 의도된 선택이라기보단 상황마다 신념에 따라 선택을 했을 뿐이라는 그는 그냥 이 자리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자원하고 만나면서 활동하는 자체가 행복하단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사연을 듣고 몇몇 지원단체에서 활동비를 지원해줘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

 

 

지금 행복할 것
“일을 하면서 사건해결이 잘 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제가 대리하는 사건의 피해자들이 저와 함께 싸워나가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모습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처음엔 굉장히 의기소침하고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본인이 잘못해 일을 자초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계세요. 또 본인 인생은 이제 끝났다는 패배감을 가지기도 하죠.”
지속된 인권침해로 인해 낮은 자존감을 가진 이들이 자신과 사건 내용을 나누고 내 잘못이 아닌 가해자의 문제라는 점을 같이 공감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싸워나가는 힘을 얻는 모습을 볼 때 김예원 변호사는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당시 피해를 받을 때는 하지 못했던 의사 표현이 가능해지고 그러면서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회복되기도 해요.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 효능감을 얻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뿌듯하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큰돈을 벌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그는 그저 지금처럼 앞으로도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좋은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오랫동안 하고 싶을 뿐이다.
“딱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장애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으로 현재 ‘장애인권리보장법’이라는 법안이 발의되어 있어요. 이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장애인에 대한 법률 패러다임을 바꾼 법이죠. 기존의 법이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 복지의 대상으로 바라봤다면 장애인권리보장법은 장애인이 권리의 주체고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주체로서 다양한 신청권을 가진다는 관점의 법이에요. 법안이 통과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장애인을 대하는 법의 태도 같은 것들이 긍정적으로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애와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법적 태도가 바뀌길 바란다는 소망을 내비친 그녀.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피해를 본 장애인들을 위해 함께 싸워줄 뿐아니라 그들 스스로 행복하고 당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하는 김예원 변호사가 있기에 움츠러들었던 그네들은 어깨를 펴고 걱정 없이 새로운 꿈을 다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어느 노래 가사처럼.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진유정 기자 jin_yj@mcredi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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