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군대에서 이발을 배웠다. 그 이발 기술로 군인 머리를 깎았고, 휴가를 나올 때면 동네 어르신들 머리를 손질했다. 본격적으로 이발소를 차린 후에도 틈틈이 몸이 불편한 환자들과 머리 깎을 돈 한 푼이 아쉬운 이웃을 위해 가위를 들었다. 이발 경력 40년. 이발사로서의 전성기를 보낸 후 후회도 미련도 없이 가위를 내려놓은 그는 곧 붓을 들고, 펜을잡았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무궁무진하다는 그의 봉사는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1965년, 강원이발관
두툼한 스크랩북에는 셀 수없이 많은 상장과 수료장, 위촉장으로 빼곡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올해까지 차례로 정돈된 종이는 쉴 틈 없이 걸어온 그의 모든 인생이 담겨있다.
“군에서도 이발을 했어요. 여기 이 애들이 다 내 후배들이지. 허허”
앨범에 꽂힌 오래된 사진을 뒤적이며 한장 한장 넘기는 손길에는 그 시절의 추억과 회한이 담겨있다.
“휴가 나와서도 군복 입은 채로 가위 하나 덜렁 들고 경로당 가서 노인들 머리 손질해드렸어요. 손주같은 놈이 머리를 깎아드리니 고맙다며 주머니에 억지로 돈을 쑤셔 넣으면 ‘군대에서 밥 다 주고 잘 재워주는데 이런 게 왜 필요하냐’며 도로 드리고 도망쳤지(웃음).”
그가 이곳, 단양군 어상천 면에서 ‘강원 이발관’라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시작한 건 1965년. 시대가 말해주듯 모두가 어렵고 가난한 시절이었다.
“군에서 대대장님이 나에게 이발사 자격증을 따가지고 나가면 좋지 않겠냐고 하는데도 ‘제대 후에는 이발하지 않겠다’며 빈손으로 나왔어요. 헌데, 나와서 농사지어보니 너무 힘들어. 아버지, 어머니, 집사람과 나까지 넷이서 죽도록 일을 하는데도 그 돈 가지고는 아이들 중학교도 못보내겠더라고. 60년대에는 초등학교도 전부 월사금을 냈는데,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었지요.”
그래서 홍 씨는 이발 기술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어려운 살림에도 서울 고등기술학교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가족들의 든든한 지원과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입학하려니 중학교 졸업 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해요. 그런데 내가 (중학교는) 검정고시 나왔거든. 6·25 이후 난리속에 공부했으니 수료했다는 근거가 없어요.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니 다행히도 다 찢어진 영수증이 있더라고. 내가 돈 내고 공부한 건 확실하잖아요. 그래서 그걸 보여주곤 고등 기술학교에 입학을 했지(웃음).”
서울을 오가며 기술을 배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 길이 아니면 가족 모두 죽는다’는 생각으로 일하는 틈틈이 정규 과정을 모두 이수했다. 그리고 졸업과 함께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송아지와 밭을 팔아 지금 이 자리에 이발소를 차렸다.
“자격증도 나왔겠다, 실기부터 상식까지 이발에 필요한 모든 걸 배웠기 때문에 자신 있었어요. 그 후 그저 성실하게, 진심을 다해 일 했습니다.
길 떠나는 이발사
군에서 휴가 나올 때마다 동네 어르신들 이발을 도맡았던 그의 봉사는 이발소 개업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경로당의 노인뿐 아니라 거동이 불편해 문 밖 출입을 못하는 환자나 어려운 이웃의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 그는 없는 시간을 쪼개 묵묵히 이발가방을 꾸렸다. 출장 나가면 배 이상으로 받는 출장비나 이발비 한 푼 받지 않았다.
“아프고 처지 곤란한 사람들에게 어찌 돈을 받겠습니까. 그 돈 받아 기분이 좋을 거 같으면 몰라도, 숨이 왔다 갔다 하는 환자 머리 깎아주고 그럴 수는 없었어요. 우리 가족도 6·25를 겪으며 지독하게 없이 살았거든. 그 생각이 떠올라서 어렵게 사는 이웃을 보면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그 사람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이발이나 말끔하게 할 밖에요.”
가장 잘하는 일이 이발이긴 했어도 봉사라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단다. 특히 생사가 오늘, 내일하는 환자나 치매 노인 이발에는 변수도 많았다.
“치매 어르신 같은 경우 정신이 온전치 않으니 사람을 못 알아보는 건 물론이고 옷도 막 찢고 그래요. 사방에 오물을 발라놓은 방엘 들어가면 방문을 열기 전부터 냄새가 지독하거든. 들어가 보면 머리를 얼마나 오래 방치했는지 머리카락에 서캐랑 이가 가득한데다 때까지 껴서 기계가 도저히 안 들어가요. 결국은 머리를 한 움큼씩 들어서 가위로 자르고, 빗으로 때를 벗겨 내면서 또 자르고…
옆에다 물 떠다놓고 씻어가며 그 일을 반복했지요. 이발하는 내내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차마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단다. 오히려 돈을 많이 줄 테니 해달라고 했다면 안 한다고, 못한다고 했을 거라고. 그러나 그렇게 몇 배의 노력과 시간을 들여 말끔하게 이발을 해 드리고 나올 때면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충만해졌다는 홍순천 씨.
“이발 해드린 어르신 사후에 자녀들이 찾아와서 ‘선생님께서 우리 아버지 머리를 정성스럽게 깎아주신 덕분에 얼마전 깨끗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고맙다고 손 붙잡고 인사할 땐 저도 같이 눈물이 나요. ‘그래도 내가 저승길 앞둔 노인들 머리를 깨끗이 정리해 드렸구나’하고 생각하면 되레 감사한 마음마저 들죠.”
임종을 앞둔 어르신들의 머리 손질뿐이던가. 명절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차를 몰고 다니며 새벽이 올 때까지 환자들 이발을 도맡았다.
“좋은 일을 하면 어째 피곤하지도 않더라고(웃음). 대단한 일도 아닌데 때때로 가게로 찾아와서 감사 인사를 전해 오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내가 뭐 그래 큰일 했다고 이러나 싶어 아직도 쑥스러워요.”
1965년부터 1995년까지 만으로 30년간 같은 자리에서 계속해 온 이발소를, 다섯 자녀 중막내 대학 졸업하던 날에 문을 닫았다.
“눈도 침침해지고 손이 떨리니 이대로 더 하다가는 일 나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막내가 학교 졸업하던 날 ‘너 졸업하니 나도 이제 졸업하련다’ 하곤 가위를 놓았지요.”
그의 일생에 중대한 결심이었지만 미련도, 후회도 없는 선택이었다.
봉사는 지금도 현재진행형
이발사로 사는 삶은 졸업했을지언정 봉사마저 그만둔 건 아니다. 틈틈이 떠나는 이발 봉사는 물론이요, 새로 시작한 재능 기부는 퇴직 후에 더 활발해졌다. 첫 번째 도전은 ‘간판 봉사지원’과 ‘행복 문패 달기 운동’. 틈틈이 갈고 닦아 온 서예실력으로 글을 쓰고 꽃을 그려 마을의 이름 없는 정자에 현판을 달아주었다. 실제로 그가 자그마하게 운영 중인 강원 슈퍼마켓(前 강원 이발관) 한편에 마련된 서예실에는 그동안 써 온 반듯한 붓글씨들과 깊이 베인 정결한 먹 냄새가 얼마나 오랜 시간 공들여 노력해 왔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어상천 면에 정자가 아주 많았어요. 50군데 이상의 정자에 다 달았거든. 정자뿐만 아니라 집집이 무상으로 간판 만들어 달고, 현수막 써주고 그랬어요. 어상천이 훤해졌지 (웃음). 이발 봉사할 때와는 또 다른 기쁨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홍 씨는 어려서부터 마음에 담고 있던 작은 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단다.
“단양군이 작긴 해도 배움의 기회가 참 많아요. 평생학습에 들어가면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이 다 있거든. 거기 들어가서 교육을 이수하고 문해교사자격증을 땄어요. 그렇게 딴 자격증으로 영춘 면과 어상천 면 주민자치실 경로당에서 한글도 가르치고, 서예지부장을 지내며 마을 사람들에게 서예도 가르쳤지요. 지금은 지역 어린이집 원생과 초등학생을 위한 인성교육을 맡아 하고 있어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한 지도 올해로 7년째.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자 벌써 홍 씨의 입가에는 슬그머니 웃음꽃이 피어난다.
“아이들이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따르는 게 그렇게 좋아요. 얼마나 예쁜지 몰라. 급수 한자와 사자성어, 예절 교육 같은 것들을 하고 있는데, 나부터가 정말 재밌고 신이나요.”
앞으로도 능력과 체력이 될 때까지 아이들의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주고 싶다는 홍순천씨. 평생을 다양한 재능으로 봉사를 실천해 온 그가 만들어가는 또 다른 내일이 궁금하다.
그가 가위를 들면 사람들의 머리가 말끔해졌고, 그의 붓이 지나간 자리엔 근사한 현판이 완성됐다. 그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사랑과 관심으로 무럭무럭 자라기를. 오늘도 먹 냄새가 진하게 밴 강원슈퍼 사랑방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권성희 기자 song@mcredi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