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기적
“안녕하세요. 저는 온기제작소의 소장이자 28살 대학생 청년인 조현식입니다. 온기제작소는 익명의 고민을 받아 손편지로 답장해주는 온기우편함이라는 활동을 진행하는 단체예요.”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자신과 온기제작소에 대해 소개한 조현식 소장은 우연히 도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우리 사회의 온기를 나누자는 목표로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전했다.
“과거의 인물이 편지로 고민을 쓰면 미래에 있는 인물이 그에 대한 답장을 해주는 책의 내용을 보고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고민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앓고 있을 분들에게 어떤 하나의 이야기 창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온기우편함을 만들게 됐습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아무도 살지 않는 오래된 잡화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제앞가림도 못하는 삼인조 좀도둑이 고민상담을 담은 의문의 편지를 받으며 시작된다.
여러 가지 고민과 인생 이야기, 그리고 이들이 보내는 솔직한 답장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과 인생을 가져다 주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책 속의 이야기를 우리 눈앞에 펼쳐 보였다.
“처음엔 익명이라는 데에 초점을 뒀어요. 어쩔 땐 가족이나 친구보다 오히려 모르는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기가 쉽죠. 그리고 표면적인 게 아니라 저희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고 마음을 전할 방법으로 손편지를 생각했어요. 직접 쓰고 주고받는 행위 안에서 사람 냄새를 강하게 전달하고 싶었죠.”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에겐 얘기하기 힘든 고민을 낯선 이에게는 술술 털어놓을 수 있을 거 같다는 모순적인 마음을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2월 25일 처음 설치된 온기우편함 속엔 일주일간 약 150여 통의 고민 편지가 날아들었다.
“종로구에 비영리적 활동임을 알린 후 허가를 받아 삼청동 돌담길에 첫 우편함을 세웠어요. 당시 자원봉사자 열 분과 함께 시작했는데 예상외로 정말 많은 분이 편지를 써주셨죠. 그래서 이런 작은 시작이 누군가에겐 큰 위로가 된다는 걸 깨닫고 함께 해주실 분들을 더 모집해 지금은 총 60명의 봉사자분이 계세요.”
온기우체부라 불리는 자원봉사자들은 20대 대학생부터 60대 어머님들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보통은 처음 시작 때 함께 했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활동 중이지만, 개인사정으로 같이 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 가끔 새로 모집하기도 한다고.
“선발 기준이라고 한다면 손편지에 대한 익숙함이 먼저인거 같아요. 또 경청을 잘 하고 공감이 뛰어난 분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면접을 보진 않고 지원서를 써주세요. 특히, 장점을 많이 보고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 연락을 드리죠. 그럼 다 좋은 분들이시더라고요(웃음).”
귀 기울여보니
삼청동 돌담길, 덕수궁 돌담길, 연희동, 노량진에 위치한 우편함 속 약 100여 통의 편지는 매주 목요일 수거된다. 그 후 금요일과 토요일, 동묘의 작은 사무실에서 각자의 사연을 들려준다.
“우선 모든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다 같이 읽어봐요. 그리고 자신이 경험했던 사연이나 공감할 수 있는 고민의 편지를 배분해 답장을 쓰죠.”
답장을 쓸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정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편지를 쓴 이유는 정해진 답을 듣고 싶어서가 아닌, 단지 위안받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헤아렸기 때문이다.
“고민에 공감해드리고 작은 위로라도 건네 드리면 그것만 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엔 처음부터 답은 없지만, 제가 해드리는 이야기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로 시작하죠. 그리고 같은 상황에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말씀드려요.”
예를 들어 진로에 대한 고민을 가진 이에겐 꿈을 쫓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신의 이야기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주변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준다. 어떤 경우라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이다.
“가장 많이 받는 고민은 아무래도 연령대별로 조금 차이가 있어요. 20대분들은 확실히 취업과 진로에 대한 얘기가 월등하게 많죠. 30대 중후반부턴 결혼과 육아 관련 사연을 많이 써주시고, 50대 어머님들의 경우엔 육아 전선에서 물러난 후 오는 우울감에 대한 고민을 많이 토로하세요.”
65세의 어머님의 고독함부터 초등학생 친구의 수학이 어려워 힘들다는 이야기까지 폭넓은 연령층과 그에 맞는 가지각색의 사연에 온기우체부들은 웃기도 때론 울기도 하며 그들의 사연에 따뜻한 손길을 더한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가장 인상 깊었던 편지는 부산에서 서울에 잠깐 올라오신 분이 보내주신 사연이었어요. 얼마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평소 대화를 많이 못 나눠봤다며 아버지께 편지를 받아보고 싶다고 하셨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받아보고 싶다는 편지는 고민이라기보단 그들에게 위로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내 딸에게’로 시작하는 답장이 부쳐졌다.
“온기우체부 중 어머님 한 분이 답장을 써주셨어요. 편지를 다 쓰신 후 저희 모두에게 읽어주셨죠. 하늘에서 더 평안히 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 딸 정말 사랑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땐 모두가 울었어요. 이런 점이 온기제작소 활동을 하는 제일 큰 이유인 거 같아요. 저희의 답장이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고 저희 역시 답장을 쓰는 과정을 통해 한층 성장하는 거 같죠.”
또 종종 답장을 받은 사람들이 온기제작소의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주기도 한다. 잘 받았다는 말과 함께 조언을 바탕으로 해당 고민을 어떤 식으로 해결했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까지 상세히 적힌 감사의 인사는 그들에게 원동력이 된다.
식지 않는 온기를 위하여
“지금은 매일 날아오는 편지에 즐겁고 감사하지만, 사실 초반엔 조금 힘든 부분도 있었어요. 우편함을 세우려면 해당 장소 관계자와 지속적으로 연락해야 했는데 말처럼 쉽지 않았죠. 한번은 얘기를 모두 마친 후 공원 안에 우편함을 세웠었는데 갑자기 말씀을 바꾼 적도 있어요.”
뒤늦게 찾아간 공원은 이미 우편함을 철거하고 버린 상태였다. 게다가 초반 비용은 모두조 소장의 사비로 충당되었는데 우편함 하나를 제작하려면 약 30만 원이 들었다.
여기에 편지지값에 우푯값을 더하니 금전적으로도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처음에 우편함 설치를 위해 혼자 뛰어다니면서 심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어요. 버려진 우편함을 주워올 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죠. 다행히 지금은 저와 함께 뛰어주는 온기우체부와 보탬이 되어주시려고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힘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소소하게 시작했던 봉사활동이었지만, 찾는 이들이 많아지고 이로 인해 활동이 점점 활발해지자 조현식 소장은 자연스럽게 대학 졸업을 앞둔 28살 청년의 입장에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알게 된 건 누군가 돕는 일을 하는 게 저한테 잘 맞는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분명 비영리적인 분야의 일을 계속할 거 같습니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온기제작소 운영도 함께 하면서요.”
비영리 활동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고 관련 공부를 했던것도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부족함을 느낀 그는 조금 더 큰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며 동시에 온기제작소를 운영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온기제작소를 운영해나가는 것이나 내부 체계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 부족함을 느껴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도 활동하며 배워보면 어떨지 생각하고 있죠. 그런데 아직 정해진
건 없고 현재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온전히 온기제작소에만 전념하고 있다는 그는 앞으로 더 많은 곳에 우편함을 설치할 계획이다. 특히, 새로운 공간으로 병원을 가장 염두에 두고 있다.
“일단 소아암센터에 설치할 계획이에요. 그래서 어린이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죠. 또 어린 환자들의 고민도 있지만, 환자 보호자, 가족들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준비하고 있습니다.”
환자와 환자 가족들의 대나무숲이 되어줄 우편함 설치를 계획 중인 그는 더 많은 이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건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처음 마음 그대로, 진심으로 이야기를 듣고 전해주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온기제작소가 중간에 사라지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게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온기를 받았을 때 그 온기를 한 번 더 나눠줄 수 있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싶죠. 물론 저와 온기우체부들도 힘쓸 거고요.”
식지 않는 온기를 전하기 위해 멈추지 않고 활동을 이어나갈 것을 약속한 조현식 소장. 지친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며 진심을 다해 위로해주는 그와 온기우체부가 있기에 우리 사회 가득 온기가 채워질 그 날을 기대해본다.
진유정 기자 jin_yj@mcredi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