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축지법
한은혜 2017-02-14 15:49:17

“오늘도 저희 ‘마법의 세계’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지금부터 여러분께서 고대하시는 ‘마법의 세계일주’ 공연의 막을 올리겠습니다.”

 

사회자의 말과 동시에 막이 올라가면서 요란한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람객들도 일제히 환성을 지르며 화답했다.

 

“그럼 오늘의 첫 순서를 소개하겠습니다. 저희 마법의 세계가 아니면 결코 보실 수 없는 전 세계 유일의 축지법 보유자 한달음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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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환성과 함께 한달음으로 소개받은 사람이 무대에 나타났다. 거창한 소개와는 달리 런닝셔츠와 반바지에 운동화만을 신은 그는, 얼핏 보기에도 중년은 훨씬 지난 듯한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마술사의 화려한 복장, 뭔가 호기심을 잔뜩 끌게 하는 이상야릇한 장비나 도구, 분위기를 잡기 위한 현란한 제스처와 언변, 이런 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관중들도 눈에 익숙지 않은 출연자의 등장에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작지만 다부진 몸매와 깊게 패인 눈에서 뿜어 나오는 강렬한 눈빛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어쨌든 한달음씨는 관중석의 분위기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공연을 위해 무대 앞쪽으로 길게 깔린 양탄자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이윽고 양탄자 한쪽 끝에 선 그는 반대편을 향해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아니 걷기 시작했나 싶은 그 순간에 벌써 십여 미터는 되어 보이는 무대 반대편에 서 있었다. 아무리 빨리 뛰어도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당연히 뭔가 속임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술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그러나 이 공연에는 속일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어 보였다. 기껏 의심을 할 수 있는 것이 운동화와 양탄자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신고 있는 운동화는 다른 여느 사람의 운동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의심 많은 한 관중이 벗어 준 다른 운동화를 신고서도 같은 솜씨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양탄자는 어떨까? 여러 사람이 무대 위로 올라와서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했지만 별다른 단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다른 마술사들까지 동원되어 마술의 정체를 밝히려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최후의 검증을 위하여 양탄자를 걷어내고 무대 맨바닥에서 공연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그것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연은 오로지 양탄자 위에서만 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양탄자에 뭔가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잠정 결론을 냈지만, 정확한 것은 모르는 채로 넘어갔다. 그래서 소위 이 축지법 공연은 특별히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밀을 알 수 없다는 것 한 가지 때문에 장기적으로 공연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 어느 두메산골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그 소년의 어린 시절은 매우 궁핍하여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였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힘들었던 소년은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홍길동전을 계기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때부터 소년에게는 꿈과 희망과 목표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홍길동과 같이 도술을 익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의인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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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소년은 학교에 가는 것도 친구들과 노는 것도 다 잊고 오로지 도술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골몰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나 소년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년의 의지는 점점 더 불타올랐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소년은 결국 스승을 찾아 가출을 감행했다.

 

말할 수 없는 고생과 우여곡절 끝에 소년은 도사처럼 보이는 한 노인을 만나 스승으로 섬기게 된다. 이때부터 소년은 이제까지 경험했던 어떤 것보다도 혹독한 고생과 시련을 겪게 된다. 노인과 소년은 그들 이외에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에서 둘만의 평범하지 않은 생활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소년은 노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였다. 그러나 소년은 자신의 주인인 노인이 진정한 도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믿음만이 소년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그러한 생활이 이십 년에 가까워질 무렵 소년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노인의 비술을 전수받는다. 그가 전수받은 비술은 바로 축지법이었다.

 

어엿한 성인으로 장성한 소년은 꿈에 부풀어 기쁜 마음으로 하산하였다. 그러나 속세에 나와보니 세상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우마차가 다니던 길은 자동차가 다니고, 도로는 흙바닥에서 아스팔트로 바뀌어 있었다.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아스팔트와 같이 단단한 인공물에서는 축지법이 먹히질 않는 것이었다.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아니라 이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될 판이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축지법을 써먹을 데가 없었다. 단순히 빨리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포장도로에서는 제대로 되지도 않는데. 더구나 아무리 빨리 달려도 자동차나 비행기와는 견줄 바가 아니었다. 젊은 세월을 다 바쳐 그토록 어렵게 터득한 도술인데 허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세상을 위해 뭔가 큰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세상은 그의 생각을 전혀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듯했다. 세상을 위한 큰일은 고사하고 당장 자기자신의 앞가림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한달음씨가 마법의 세계에 몸담은 지도 벌써 십 년이 훨씬 넘었다. 갖은 고생 끝에 익힌 비술을 가지고도 써먹을 데가 없고 알아주는 사람조차 없어 방황과 좌절을 거듭하다가 우연히 눈에 띈 것이 마법의 세계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눈속임하는 여타의 소위 마술사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에 마음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신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준 마술의 세계에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는 한달음씨는 이제 완전히 마술사의 일원이 되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이나 의혹, 그리고 호기심 등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저 단원으로서 열심히 공연하는 것만이 자신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흘러흘러 한달음씨의 머리도 백발이 다 되었다. 그는 나름대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음 한편에는 일말의 아쉬움이 자리 잡고 있긴 했지만, 세상에 어디 나만 그런 아쉬움이 있으랴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면서 차차 아쉬운 마음도 사라져 갔다. 그리고 아예 스스로도 자신의 공연은 도술이 아닌 마술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온전한 마음의 평정까지 갖게 되면서 현역 생활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은퇴가 큰 뉴스가 되었다. 그때까지도 그의 마술은 비밀이 벗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그런 사례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동안 신비로 여겨졌던 마술들도 시간이 지나면 예외 없이 그 비밀이 밝혀져 왔던 것이다. 은퇴까지도 벗겨내지 못한 마술의 비밀, 과연 마술일까 도술일까 등의 제목으로 인터넷도 시끌시끌했다. 그리고 수많은 언론들이 논란 끝에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유일한 속임수 없는 진정한 마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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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란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몸을 숨긴 그도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담담하게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월간 피그 2017년 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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