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꿈
한은혜 2017-04-13 15:15:16

신경호

 

나는 돼지이다. 그리고 지금 분만 중이다. 새끼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고, 무려 열네 마리나 된다. 벌써 세 번째다. 지난 두 번도 열 마리 이상은 낳았지만 이번이 가장 많다. 그만큼 힘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보람도 있다. 내가 맡은 일이 새끼를 많이 낳아 잘 키우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나 말고도 많은 동료들이 있다. 모두들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고 있다. 먹을 것은 일정한 시간에 정확한 양이 공급된다. 전에는 주인님이 직접 주셨기 때문에 뒤에 있는 친구들은 애타게 자기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동으로 동시에 나오기 때문에 기다리는 지루함도 없다.

주인님은 우리가 잘 먹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남기는 녀석이 있으면 혹시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지 세밀하게 보살펴주신다. 아픈 곳이 발견되면 약을 주기도 하고 주사를 놓기도 하여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신다. 그뿐 아니라 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놈들에게는 양을 늘려 주시기도 한다.

잠자리도 한 마리씩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칸막이를 해 놓아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울 일도 없다. 더구나 새끼들과도 방이 분리되어 있다. 물론 새끼들은 자유롭게 내 방에 들어올 수 있지만, 나는 새끼들 방에 갈 수가 없다. 새끼들은 배고플 때마다 나를 찾아 젖을 빨고 젖이 다 나오면 돌아간다. 내가 새끼들에게 다가갈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새끼들이 혹시라도 잘못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몸이 비대하고 둔하다 보니 가끔 새끼를 깔고 앉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 어리고 작은 새끼가 깔리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런 것까지 헤아려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주인님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지내는 집 또한 그렇게 쾌적할 수가 없다. 우리 집은 계절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일 년 내내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수백 마리가 한집에 있다 보니 냄새가 심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한테서 나오는 냄새이니 우리가 감수해야지 별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님은 그 냄새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대형 환기 장치를 설치하여 계속 안에 있는 공기를 빼내고 밖의 신선한 공기를 들여보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신다. 이런 주인님의 자상한 배려에는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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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새끼들과의 이별이다. 새끼들이 어느 정도 자라 밥을 먹기 시작하면 나는 새끼들을 두고 다른 방으로 가야 한다. 아직은 좀 더 같이 있고 싶지만 모든 결정은 주인님의 몫이다. 나의 모든 의견은 별 의미가 없다. 주인님 의견에 따르면 만사형통이기 때문이다. 내가 새끼를 두고 가도 주인님이 알아서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 나도 새끼 때 그런 보살핌으로 자랐던 기억이 있다. 엄마의 존재보다도 주인님의 손길이 훨씬 더 포근했던 것 같다. 그래서 불만은 그 순간일 뿐이다.

그리고 새끼들과 헤어져 다른 방으로 가면 또 다른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그 기쁨은 새끼들과 헤어지는 서운함을 보상하고도 충분히 남을 만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컷을 만나는 일이다. 묘하게도 나는 새끼들과 헤어지면 며칠 지나지 않아 수컷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러면 주인님은 어떻게 아셨는지 내 방에 수컷을 데려오신다. 하긴 주인님은 모르는 것이 없을 테니 내 마음속도 꿰뚫어 보고 계실 것이 뻔하다. 아무튼 나는 주인님의 은혜 속에 환희와 쾌락의 시간을 만끽한다.

한 차례 황홀한 시간을 겪고 난 다음 나는 다시 다른 방으로 가게 된다. 이곳은 내가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곳으로 가장 비좁고 지루한 곳이다. 물론 이곳에도 많은 동료들이 같이 있긴 하지만 거의 대부분 나와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그저 조용히 먹고 싸고 잘 뿐이다. 달리 생각하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분만 때가 되면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 새끼를 낳고 키우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을 때조차도 편안히 먹여주고 재워주는 주인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주인님은 참으로 전지전능하고 자애로우시다. 주인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주신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것,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까지도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좋은 것이라면 모두 다 해주신다. 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바로 주인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나는 주인님이 틀림없이 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만약 주인님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나는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 산과 들을 헤매고 다니며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를 처절하게 배웠을 것이다. 또한 한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와 한겨울의 살을 에는 추위와도 싸워야 하고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 허허벌판에서 잠을 청하기도 할 것이다. 먹을 것을 구하려다가 사나운 개에게 쫓기기도 하고 함정이나 덫에 걸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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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을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그지없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지금 내가 있는 현실로 다시 돌아오면 내가 지금 할 일이 없으니 호강에 겨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면서 빙긋이 웃게 된다.

이제 내 생각은 확고하다. 오로지 주인님을 믿고 주인님의 뜻에 따라 하라는 대로만 하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다. 평생을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 것이다. 걱정도 근심도 할 것이 없다. 무슨 일이 생기지도 않지만 혹시 생긴다 해도 주인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시는데 굳이 내가 사서 걱정할 이유가 없다. 나는 도저히 할 수도 없고 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일을 주인님은 척척 처리해 주시니 나는 오직 주인님이 시키는 것만 하면 된다.

나는 주인님이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새끼를 많이 낳아 잘 키우는 것이다. 그것만 잘하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보장되고 내 새끼들도 나와 같이 키워 나와 같은 길을 가도록 보살펴주실 것이다. 사실 주인님의 뜻이 아니더라도 새끼를 낳아 키우는 일은 나 자신이 원하는 일이고 또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내 할 일을 할 뿐인데 주인님이 그렇게 알뜰히 챙겨주시는 이유를 난 모르겠다.

정말 그것은 가끔씩 궁금해진다. 주인님의 선의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고마워서 생각하게 된다. 왜 주인님은 그 고생을 해가면서 이렇게 많은 우리들을 밤낮없이 돌봐주시는 걸까? 평생 먹고 싸기만 하는 우리에게 뭘 바라고 기대하기에 그토록 헌신을 하실까? 아마도 이 의문은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알아봤자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주인님은 절대적으로 고마운 분이고 따라서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님은 결코 그런 희생을 원치 않으시겠지만, 목숨이라도 바치라면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주인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현재 주인님 덕분에 호강하며 살고 있다. 주인님과 함께 있는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나의 유일한 꿈은 이곳에서 계속 이렇게 주인님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같은 생각일 것이다. 간혹 다른 생각을 하거나 쓸데없이 주인님을 의심하는 친구들이 있긴 한 것 같은데,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런 친구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다.

“천국에 살면서 천국인지도 모르는구나. 보고도 모르는 답답한 친구들아, 제발 정신 좀 차리자.”

 

<월간 피그 2017년 4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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