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엄마, 결혼 같은 것 안 한다고 했잖아.”
한은혜 2017-10-12 18:38:25

 

“엄마, 결혼 같은 것 안 한다고 했잖아.”

 

“결혼하라는 게 아니고, 한번 만나만 보라는 거야. 사람이 정말 좋다더라.”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결혼 자체가 싫다니까. 혼자 살고 싶다고.”

 

“글쎄, 결혼이 왜 싫어? 남들 다하는 결혼을 어디가 부족해서 너만 싫다는 거야? 싫으면 싫은 이유나 속 시원히 얘기를 해 보던지.”

 

“싫은데 무슨 이유가 있어. 그냥 싫으면 싫은 거지. 난 결혼하겠다는 사람 속을 모르겠더라. 뭐가 좋다고 그렇게 결혼에 목을 매는지. 결혼이 왜 좋은지 이해가 되면 그때는 하지 말래도 할 테니 제발 이제 더 이상 얘기하지 마.”

 

벌써 몇 년째 되풀이되는 어머니와 나의 대화 내용이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젊을 때의 치기 정도로 생각하고, 늙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란 확신으로 집요하게 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으려고 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어머니라도 이미 성인이 된 내 마음속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의도적으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이상, 내 본심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난 독신주의자도 결혼혐오자도 아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결혼이 하고 싶다. 결혼해서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가정도 꾸리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거부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부모님 때문이다. 아버지 같은 사람을 만나 어머니처럼 살게 될까 봐서이다. 내 눈에 비친 두 분의 사는 모습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생각할 때 두 분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이 아니면 억지로 살아오셨다. 나 같으면 벌써 헤어졌거나 우울증에 걸려 정신병원에 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두 분은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잘 살아왔다고 아주 자랑스럽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 두 분 사는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결혼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응석받이로 자란 아버지는, 힘든 일을 싫어하셨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물론, 남에게 부탁을 하거나 사정을 하는 일, 심지어 경조사에 가서 인사치레하는 것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아주 단순한 일조차도 내 몸이나 마음에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하지 않으려 드니, 객관적으로 볼 때 그것은 무능 그 자체였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고, 종국에는 변변치 못한 일자리하고도 영영 멀어지게 되었다.


 

경제적인 무능은 바로 가족에 대한 무책임으로 이어졌다. 무책임이 만성화되자 나태와 불성실이 노골화되었다. 거의 매일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잠에서 깰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밤에 늦게 잠자리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은 아버지가 아침 일찍부터 나가 밤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얼굴 보기 힘들다고 하는데, 우린 아버지가 항상 자고 있기 때문에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갈수록 아버지는 우리를 더욱더 실망시켰다. 본인의 잘못이나 단점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변명과 궤변으로 일관하였다. 어쩌면 그 긴 시간 누워서 그런 것만 연구하는 것 같았다. 주된 내용인즉, 돈을 못 벌어서 그렇지 그것만 빼고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정말 그런가 하고 아버지의 좋은 점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찾으면 찾을수록 좋은 점은 보이지 않고 나쁜 점만 계속 나왔다.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철저하게 장점은 하나 없고 단점만 있는 사람이 있을까? 서글프게도, 오랜 관찰과 연구 끝에 아버지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오죽하면 언제부턴가 무슨 일이건 아버지 생각과 반대로만 하면 그것이 정답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를테면 여자가 무슨 운전이냐고 해서 운전면허를 땄고, 컴퓨터는 뭣 하러 하냐고 해서 컴퓨터 학원을 다녔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 틈에 명문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유명 로펌의 잘나가는 변호사가 되어 있었다.

 

로펌에서 나는 신나게 일했다. 일도 재미있었지만, 능력 있고 생각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환상적인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한 남자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대학 일년 선배라 대학 때부터 알던 사이긴 했지만, 알면 알수록 아버지와는 정반대였다. 즉 장점만 있지 단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결혼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드디어 우리는 결혼을 했고 이제 더 이상 아버지와는 한집에 살 일도 없게 되었다. 또한 아버지 같은 사람 만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다만 나는 남편이 아버지 때문에 혹시라도 상처를 입거나 불편해할까 봐 그것만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버지가 사위를 좋아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남편이 아버지를 좋아하는 것은 뜻밖이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무엇이 좋은지 시종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누가 먼저 하는지는 몰라도 전화 통화도 자주 하고, 한 번 통화를 하면 십 분 이십 분은 보통이고 한 시간 이상 될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남편의 장인 배려하는 마음이라 생각하여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였는데, 날이 갈수록 도가 심해지는 것 같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억지로 장인에게 장단을 맞추다가 뭔 일이라도 나는 것 아닌가 해서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물었다.

 

“선배는 우리 아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아빠 얘기가 나오자마자 남편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부터 지었다.

 

“좋은 분이지. 순수하고 복도 많으시고. 아버님과 얘기하다 보면 세상 근심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아.”

 

워낙 의외의 답변이라 나는 한동안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 사실 나는 선배가 아빠와는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좋았는데.”

 

그러자 남편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아버님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사신 거야. 능력도 안 되면서 뭔가 해보겠다고 가산을 탕진하는 것보다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이 훨씬 나을 수 있어. 아버님은 그걸 아시고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참고 지내신 거지. 그런 점에서 나는 아버님이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존경스러워.

 

그리고 돈 잘 번다고 주색잡기에 놀아나는 것보다 아버님처럼 사시는 게 좋지 않아? 우리 아버지만 해도 여자 문제로 평생 어머니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몰라. 어머니는 아무리 온갖 호강을 한다 해도 아버지한테서 받은 마음의 상처는 영원히 씻으실 수 없을 거야.

 

그에 비하면 아버님은 가족에게 참 잘하신 거지. 나는 아버님하고 얘기를 하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어. 정말 장가를 잘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니까.”

 

<월간 피그 2017년 10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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