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첫사랑
한은혜 2017-11-08 18:29:04

 

여기였나? 아니 저기쯤이었나? 나는 벌써 몇 시간째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씩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한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내 기억 속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지나간 세월이 얼마인가? 수십 년도 훨씬 지난 지금 무엇 하나 남아 있을 턱이 없겠지.

 

애당초 이곳에 올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가 왜 오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까? 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그럼 왜 왔지?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지나던 길에 들렀을 뿐이야. 그럼 이렇게 머무를 필요 없잖아? 그렇긴 한데 기왕에 왔으니 기억에 남는 뭐라도 있는지 한번 봤으면 해서. 이렇게 자문자답하며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의 어린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나이에 명색만 서울특별시였던 이곳으로 우리 가족은 이사를 했다. 지방에서 사업을 하다 실패한 아버지가 재기의 꿈을 안고 과감히 식구들을 이끌고 무작정 상경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서울 생활이 아버지 뜻대로 만은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것은 벌지 못하는 날은 끼니도 거른다는 뜻이었다. 그때처럼 한 끼 한 끼가 소중하게 생각되었던 적이 없다. 그리고 그때처럼 밥을 먹을 때마다 진심으로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를 한 적이 없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디 끊임없이 계속 주시옵소서 라고.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유일하게 믿는 구석은 오로지 아버지였다. 그렇게 어려운 지경에서도 아버지는 우리에게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고 항상 큰소리를 쳤다. 조금만 기다려라. 고생 끝날 날 얼마 안 남았다.

 

그러나 그날이 언제인지는 도무지 알 길 없이 세월만 무심히 지나갔고 그만큼 우리는 가난에 익숙해질 뿐이었다. 그래도 몇 년째 티브이 영화처럼 되풀이되는 그 말이 나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고 희망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고생 끝날 날 얼마 안 남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나는 항상 주눅이 들어 있었다. 한창 뛰어놀 나이임에도 나는 쉬는 시간에 주로 교실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체육 시간에도 선생님 눈을 피해가며 나무 그늘을 찾곤 했다. 성격 탓도 있었지만, 뛰는 만큼 배가 쉬 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래서 등하굣길도 한 걸음이라도 덜 걷기 위해 지름길로만 다녔다.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다니던 학교생활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삼학년이 되면서였다. 새 학년 첫날, 자리를 정하는데 정화라는 아이와 짝이 되었다. 나는 속으로 와우 하는 함성을 질렀다. 그만큼 정화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정화는 예쁘고 착하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었다. 조용하고 차분하면서도 못하는 것이 없는 애였다. 한 마디로 나의 이상형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나의 열등감 때문이었다. 먼저 다가온 것은 정화였다. 정화는 나에게 호감을 보이며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 당연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바로 짝 이상의 친한 사이가 되었다.

 

정화는 가끔 떡이며 과일이며 약식과 약과 같은 명절에나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가져와 같이 나눠 먹곤 했다. 처음에는 정화가 그런 음식들을 가져오는 이유를 몰랐다. 그저 정화네가 굉장한 부자인가보다 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가 밝혀졌다. 그것은 사뭇 충격적이었다. 정화 어머니가 무당이었던 것이다. 다른 아이들 대부분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화가 다른 애들과 다소 소원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곧 냉정을 되찾았다. 친구로 지내는데 부모의 직업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정화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잘 헤아렸다. 내가 기분이 좋을 때는 같이 즐거워하고 마음이 울적할 땐 위로해 주었으며 슬플 때는 같이 울기도 했다. 나는 그런 정화가 내 곁에 있는 것이 내 인생에서 최고의 행운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이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동안 단칸방에서 지내다가 방 두 개짜리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우리 형제들이 계속 자라다 보니 단칸방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사를 하고 보니 하필 그곳은 정화네 집이었다. 정화네 본집 뒤에 이어 지은 작은 집이 우리가 이사를 한 곳이었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부모님도 적잖이 당황해하셨다. 특히 교회에 열심히 다니시는 어머니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정화네와 우리집의 불편한 동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가장 큰 갈등은 역시 어머니들 사이에서였다. 정화 어머니가 굿을 할 때마다 어머니 안색은 하루 종일 불쾌함이 역력했다. 또한 교인들이 우리집을 찾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어머니와 정화 어머니 사이에는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정화와 나 사이도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서먹서먹해지다가, 2학기가 되어서는 짝도 바뀌게 되어 둘만 만나는 일은 아예 없어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사를 가야지 지옥이 따로 없다고 매일 같이 노래를 불렀지만 그만큼 싼 집을 찾을 수가 없으니 달리 도리가 없었다. 오히려 정화네 어머니가 이사 비용은 줄 테니 웬만하면 이사를 가달라고 해도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내가 오학년이 되던 해에 아버지의 큰 소리가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 부자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의 기반이 닦인 것이다. 우리는 미련 없이 그 동네를 떠나 비교적 윤택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새로 이사한 집은 깨끗한 양옥으로, 우리는 언제 저런 집에서 살아보나 부러워했던 그런 집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암울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잊고 행복한 현재에 만족하면서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은 까맣게 잊혀져 갔다.

그렇게 그 시절이 완전히 잊혀져 가던 어느 날, 티브이에서 드라마를 보다가 어딘가 낯이 익은 듯한 탤런트가 눈에 띄었다. 이름을 확인해 보니 김정화라고 했다. 김정화? 아, 그래 정화로구나. 내가 알던 그 정화. 그때도 재능이 있었지.

 

그러나 그 이상의 감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때 이상형으로까지 생각했던 그 애가 연예인이 되었는데도 그냥 그렇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뿐이었다. 그리고는 세월은 또 흘러 흘러 정화라는 이름조차 뇌리에서 아스라이 사라져갔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이곳을 찾은 이유는 정녕 무엇일까? 아무리 잊혀졌다고 우겨도, 잊혀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가슴 한구석에 꽁꽁 숨겨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 그런 것 같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나 자신을 속일 순 없지.

 

나를 처음으로 가슴 설레고 했고 같이 있는 행복을 느끼게 했던 정화. 그리고 지금도 가슴 깊숙이 나 자신도 모르는 곳에 남아있는 그 설렘과 행복. 이제야 알겠네. 그것이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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