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이야기 - 진달래꽃
한은혜 2018-03-03 18:33:32

신경호

 

해마다 어김없이 봄은 삼월부터 시작한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산모퉁이에 수줍은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피는 진달래꽃이 대표적인 봄의 전령이 아닌가 싶다. 봄에는 많은 꽃이 피지만 그중에서도 진달래꽃은 유난히 봄과 어울린다. 화사한 듯하면서도 소박하고, 방긋 웃는 듯하면서도 외로워 보이는 느낌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진달래꽃은 우리 민족의 정서에도 잘 맞는 꽃인 것 같다. 마침 진달래꽃에 얽힌 전설 같이 애달픈 이야기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때는 바야흐로 일제강점기이니, 그리 오랜 옛날 일은 아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정식이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그 소년은 시오리길이나 떨어져 있는 조그만 소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정식이 살고 있는 마을은 너무 작고 외져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식은 입학을 제때에 하지 못하고 몇 년 늦게야 하게 된 터라, 다른 동급생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 당시에는 그렇게 늦게 입학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심지어는 조혼의 풍습에 따라 일찌감치 장가를 들어, 명색이 가장인 학생도 있었다. 그러니 나이 들어 학교 다니는 것이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끼리 어울리는 재미가 있었다.

 

순애도 그들 중의 한 명이었다. 순애는 정식보다는 두어 살 아래였지만 몇 안 되는 여학생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동급생 중 맏언니 역할을 했다. 순애는 말수가 적고 수줍은 성격이었지만 왠지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정식도 그런 순애에게 마음이 끌렸다. 더구나 정식과 순애는 한마을에 살고 있어 거의 매일 같이 등하교를 같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깝게 되었다.

 

그들은 학교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등하굣길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자연을 벗 삼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어 감성이 풍부한 그들에게는 파란 하늘도, 흰 구름도, 길가에 핀 들꽃도 모두 얘깃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남녀칠세부동석을 미덕으로 여기는 시절이라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걸을 때나 앉을 때나 어느 정도 간격을 두는 것은 기본이었다. 말하는 것도 서로 깍듯이 존대를 하니 몇 해를 넘겨도 어색하기는 매일반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하굣길에 비가 몹시 내려 개울물이 불어나 있었다. 개울가에 다다른 둘은 다소 당황했다. 돌다리가 물에 잠겨 무릎께 차오른 물속을 맨발로 건너야 할 처지였다. 순애는 고무신과 버선을 벗고 치마를 무릎 위로 걷어 올려야만 건널 수 있었다. 아니면 정식에게 업어달라고 청하는 방법이 있었다. 순애는 마음속으로는 업히기를 원했지만, 말을 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정식의 눈치를 보며 주저주저하면서 버선을 벗기 시작했다.


반면에 정식은 망설임 없이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었다. 정식 역시 머릿속으로는 순애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식은 순애를 업어주고도 싶고, 순애의 벗은 발과 다리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정식은 순애가 건널 준비를 끝내고 치마를 걷은 후 물속으로 막 들어가려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제야 말없이 그의 등을 순애 앞에 디밀었다. 순애도 기다리던 터라 망설임 없이 정식의 등에 업혔다.

 

 

그 후 둘은 더욱 가까워졌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둘의 마음은 통했다. 둘은 장래를 약속한 사이나 진배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것은 학교에도 소문이 나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둘은 졸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을 곱게 내버려 두질 않았다. 순애의 동생이 폐결핵에 걸리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당시 폐결핵은 문둥병이라 불리던 한센병과 더불어 천형으로 여겨지던 저주받은 질병이었다. 당연히 정식의 집에서는 둘의 혼인을 반대하였으며, 만나는 것조차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순애의 집은 아예 이사를 가버렸고, 정식과 순애도 둘의 마음과 상관없이 헤어지게 되었다.

 

정식은 순애가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도 알지 못한 채, 몇 년의 세월을 흘려보냈다. 정식은 그간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있는 상급학교로 진학하여 그가 좋아하는 문학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식은 하루도 순애를 잊은 적이 없었다. 정식의 눈에 다른 여자는 들어오질 않았다. 정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순애의 소식을 알기 위해 수소문을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동향의 친구로부터 순애의 가슴 아픈 소식을 접했다. 순애는 부모로부터 다른 혼처로 시집갈 것을 강요당하다 못해, 집을 떠나 절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순애 역시 정식을 잊지 못해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식은 곧바로 순애에게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순애는 이미 세속을 떠난 승려의 몸이었으며, 속세의 인연을 정리한 상태였다. 정식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호소하였으나, 이제 겨우 마음을 정리한 순애에게는 또다시 고통이 될 뿐이었다.

정식은 순애의 마음을 확인하고 어쩔 수 없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산을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봄이 시작하여 겨우내 산골짜기에 쌓였던 눈이 녹고 있었고, 잔설 사이로 진달래꽃이 군데군데 피어나고 있었다. 정식은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진달래꽃에서 순애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식은 즉흥적으로 시를 짓기 시작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 시는 떠나는 임에 대한 슬픔과 임이 편안히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을 동시에 표현한 명시로 오늘날까지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후에도 정식은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주옥같은 시들을 쓰기 시작한다. 그 모든 시는 순애와의 애달픈 사연에서 빚어진 영감이 바탕하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소월은 오래 살지는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아마도 순애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순애에 대한 그 후 행적은 아무도 알지 못하며, 남아있는 기록도 전혀 없다고 한다.

 

<월간 피그 2018년 3월 호>

디지털여기에 news@yeogie.com <저작권자 @ 여기에. 무단전재 - 재배포금지>
가장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