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 이름 모를 여인
한은혜 2018-05-01 19:31:06

 

민철은 오늘도 한잔 술에 취기를 느끼며 몽롱한 기분으로 귀가를 한다. 민철이 사는 집은 반지하의 투룸이다. 최근 모처럼 취업이 되면서 크게 마음먹고 원룸에서 넓혀왔기에 남들이 보기에는 초라해 보일지라도 민철에게는 뿌듯한 보금자리다.

 

남들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문을 열려고 하다가 옆을 보니 누군가가 어두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냥 들어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혹시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그러자 그 사람은 서서히 일어나더니 조용하게 말했다.

 

“먼 곳에서 왔는데 잘 곳이 마땅치 않아서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생김새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여자 목소리였다. 뜻밖의 얘기에 일순간 당황했지만 방이 두 개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럼 오늘 밤은 제집에서 주무시겠어요? 마침 방이 하나 여유가 있네요.”

“그래도 되나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살았다는 듯 전혀 주저하지 않고 민철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왔다. 민철은 혼자 살면서 방 두 개가 꼭 필요할까, 사치는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참 잘 한 결정이었다고 살며시 미소지었다. 민철은 집안 구조와 잠잘 곳만을 안내한 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이면 떠날 사람인데 가급적 편하게 지내도록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자신은 아침 일찍 출근을 해야 하니 푹 쉬고 편하게 있다가 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그 여인이 먼저 일어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아침상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냉장고도 거의 비어 있었는데 어떻게 상을 차렸는지 궁금했지만 역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하룻밤 묵은 데 대한 보답이려니, 그렇다고 이럴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고맙게 먹자는 등의 생각으로 수저를 들었다.

 

밥은 기대 이상으로 맛이 있었다. 오랫동안 집밥을 먹지 못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태어나 이렇게 맛있는 밥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날마다 이런 밥을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푸시시 웃고 말았다.

 

그럼 잘 가라는 인사를 남기고 민철은 집을 나섰다. 그녀는 미소만 지을 뿐 별말 없이 민철을 배웅했다. 민철은 어쩌면 이 여인이 가지 않고 오늘도 머물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출근을 해서 일을 하면서도 내내 그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민철은 퇴근하기가 무섭게 바로 집으로 향했다. 저녁을 같이하자는 동료들의 말도 들리지 않고 늘 버릇처럼 들르던 집 근처 골목 어귀의 선술집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 오니 예감대로 그 여인이 수줍게 웃으면서 맞는다. 집안을 둘러보니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다. 같은 집인데 느낌은 전혀 달랐다. 마치 내 집이 아닌 그녀의 집에 와 있는 것 같다고 민철은 생각했다. 저녁도 이미 차려져 있었다. 아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진수성찬이었다.

 

“왜 아직 가지 않으시고……”

“제게 사정이 있어서요. 조금 더 머물러도 되겠는지요?”

 

민철이 말끝을 흐리자, 그 여인이 대답했다. 민철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집이 워낙 누추해서 불편하실까 봐 걱정입니다.”

 

이렇게 해서 민철과 이름 모를 여인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민철은 퇴근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왔고 집에는 어김없이 그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잘 차려진 밥상과 함께. 그리고 집안은 날이 갈수록 깔끔하면서도 아늑해져 갔다. 혼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민철은 왠지 이 여인이 쉽사리 떠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부부가 되면 어떨까요?”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돌아왔다.

 

“예, 저는 좋습니다. 그리고 오갈 데 없는 저를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둘은 졸지에 결혼을 하고 달콤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결혼식도 없고 신혼여행도 없이 시작했지만 남부러울 것 없는 완벽한 신혼이었다. 민철은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집에만 오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우선 음식이 너무나도 맛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인가 했는데, 갈수록 더욱 맛이 좋아졌다. 종류도 다양해져 생전 처음 보는 음식도 부지기수였다. 언제부턴가 밖에서는 음식이 맛이 없어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집도 완전히 변했다. 겉에서 보면 여전히 초라한 반지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고대광실이 따로 없었다. 화려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크기 자체가 몇 배 커 보이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민철은 굳이 그것을 묻지 않았다. 언젠가는 알게 될 날이 오겠지, 굳이 알려고 서둘 필요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달라진 것은 아내의 모습이었다. 아내는 보면 볼수록 예뻤다. 너무 예뻐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실제로 아내에게서는 광채가 나는 듯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어두워서 그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이 정도의 절세미인은 아니었다. 아무튼 민철은 그지없이 행복했다. 너무 과분한 행복에 이대로만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세월은 꿈 같이 흘러 몇 년이 지났다. 어느새 둘 사이에는 아이들이 셋이나 생겼다. 하나 같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어느 날 저녁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을 재운 뒤, 아내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묻지 않아요?”

 

“당신이 얘기할 때가 되면 얘기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굳이 알 필요를 느끼지 않고요. 살아 보니 모르고 살 수 있으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렇지만 이제는 알려드릴 때가 되었네요. 저는 아주 먼 곳에 있는 다른 별에서 왔어요. 제가 살고 있는 별은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가진 몇 안 되는 별 중의 하나입니다. 굳이 지구와 비교하자면 과학은 많이 발전되어 있지요.

 

저는 선행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일종의 자원봉사 같은 것이죠. 그렇지만 어떤 것이 진정한 선행인지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행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당신과 지내다 보니 제가 선행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내 자신을 위한 것이었나 봐요. 여기 생활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계획했던 것보다 몇 배를 더 있게 되었고요.

 

그러나 아쉽지만 이제 더 이상은 여기에 머무를 수가 없네요. 돌아오라는 최후통첩을 받아 며칠 내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원하면 같이 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저와 함께 갈 것인지 남을 것인지.”

 

아내는 여기까지 말을 하고 민철을 바라보았다. 민철은 아내의 말에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간의 궁금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풀리는 시원한 느낌이었다. 민철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나는 평생을 당신과 함께할 겁니다.”

 

<월간 피그 2018년 5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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