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순한글 <가뎡잡지>와 편집 발행인 단재 신채호의 애국계몽사상
박혜림 2016-09-19 16:33:22

이번 호부터 한국 잡지의 역사를 통해 잡지를 만들었던 인물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 첫 번째 주제는 <가뎡잡지>다. <가뎡잡지>는 한말인 1908년 1월 5일에 신채호가 편집하고 발행인으로 참여한 순한글 집지였다. 그러나 이 잡지는 발행된 원본 잡지를 접할 수 없었으므로 그동안 잡지연구인들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하였다. 이 잡지는 당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논설을 맡아왔던 20대 청년 신채호가 여성 계몽과 가정교육을 목적으로 새로이 창간한 월간 잡지다.
글 |전영표/SMRCI연구소 대표


전영표(문학박사)

출판문화학회 창립회장/국제미래학회원/신구대학 인쇄·출판학과 교수 역임
*주요저서, <디지털사회의 저작권>,2015. <현대일본잡지·출판산업의 발전문화사>,공역,2016. <국어표준 규정과 편집기호콘텐츠> 편저,2010. <근대 유럽의 인쇄미디어 혁명>,역서,2008. <출판문화와 잡지저널리즘>,1998. <출판정보미디어론>,2005. 등 다수.


실은 이보다 먼저 류일선 등 기독교인들이 1906년(대한제국 광무 10년) 6월 25일 창간하여 제5호까지는 매월 발행했던 잡지가 있었다. 그러나 계속 발행하지 못하고, 1907년 1월에 제7호를 간행했으나 재정난으로 휴간하였던 것을 신채호가 편집, 발행인이 되어 속간한 잡지가 이 <가뎡잡지>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잡지의 판권지에 의하면, 사장은 류일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발행소 역시 동일한 ‘경성 남대문내 상동 청년학원 내 가뎡잡지사로 되어 있어 먼저 창간된 <家庭雜誌>와 동일 제호의 후속 잡지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 <가뎡잡지>는 신채호에 의해 1908년 7월까지 발행한 제7호까지 합쳐 모두 14호까지 발행한 것으로 자료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실물이 확인된 것은 8호만으로 나머지 6호분은 아직껏 실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신채호는 가정이란 단순한 한 가족의 집합체로서가 아니라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고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라 규정하고 이 <가뎡잡지>의 발간을 단순히 가정의 계몽에만 그 목적을 국한시킨 것이 아니었다(박정규,<가뎡잡지 영인,해제>).

새로운 창간호라 할 수 있는 제7호에 나타난 편잡 내용의 목차를 보면, 새해 축사, 논설, 평론, 가정 미담, 소아 교양, 가정경제, 가정교제, 위생, 백과강화, 잡보 등으로 총 50면의 B5판의 체재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잡지의 마지막 면에 게재한 본사 사원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이를 그대로 옮겨본다.


사장/ 류일선
편집 겸 발행인/ 신채호
교보원/ 주시경
총 무/ 김상만
회 계/ 유명혁
찬성원/ 장지연, 유성준, 전덕기, 정운복, 여병현, 김병현,양기택, 안종화,
이동휘, 원영의, 이종호, 민대식, 최광옥, 이은승, 안 준. 유진태, 안창호,
민준호, 정익노, 류근.


이상의 잡지 편집진용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사회적으로 상당한 이름값을 갖는 인사임을 알 수 있다. 편집교정원인 교보원은 너무 유명한 국어학자인 주시경 선생이시고, 전덕기는 상동교회 목사이고 독립운동가이며, 이동휘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를 맡게 되는 독립운동가였고, 안창호 역시명성 높은 애국지사인 웅변가인 것이다.


신채호의 생애와 애국계몽사상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1880년 11월 7일 충남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에서 신광식 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충남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하여 소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게 된다. 젊은 시절 한문 무용론을 주장한 그이지만 일찍이 조부의 한문사숙/漢文私塾에 입학하여 자신의 자질을 발휘, 이미 10세에 행시(行詩)를 지어 스승을 놀라게 했다. 뿐만 아니라 13세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터득하여 신동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그는 전통적인 유학을 공부한 한학의 대가로서 그의 논설은 대부분 국한문으로 쓰인 글들이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가 직접 한글로 기사와 논설을 작성한 이 <가뎡잡지>는 그의 생각과 주장을 실천으로 옮긴 결과물이라 할 수가 있다. 잡지인이며, 역사가로서의 단재 신채호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여러 편이 출간되었지만 이 잡지만한 자료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가 갖고 있는 1907년의 신년호(제7호)뿐만이 아니라 그 후의 잡지가 누군가에 의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그동안 연구되어진 문헌에 의존하여 단재의 생애와 사상을 논급하고자 한다. 마침 지난 2005년 8월에 김삼웅님이 저술한 <단재 신채호평전>이 ‘시대의 창’ 출판사에서 발간되어 단재의 연보를 중심으로 신채호 선생의 생애를 간추려 보고자 한다.


단재 신채호


젊어서 나라가 합방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언론의 자유를 잃게 되자 당시 일간신문인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위원으로 일제의 부당성을 성토하는 한편, <대한협회월보>에 ‘대한의 희망’ 등 많은 논설을 기고하면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월보>에도 많은 논설을 발표하면서 배일사상/排日思想과 독립정신 앙양에 앞장섰다. 그러나 단재는 국내에서 필봉으로 일제와 맞서는 선생은 데 한계를 느끼고 1910년 한일합방
이란 식민지화의 신호가 울리자 곧바로 안창호, 이갑, 이종호 등과 중국 칭다오/靑道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dok)에 망명하게 된다. 여기서도 선생은 <해조신문/海潮新聞>을 주간하면서 독립사상 고취와 동지들의 규합에 앞장섰다. 그 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겨 활동하지만, 집행부와의 의견 충돌의 갈등 관계로 이곳을 떠나 베이징/北京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단재는 베이징 북신교(北新橋) 초두호동(炒豆胡同)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의 일환으로 <천고/天鼓(하늘의 북소리)>라는 잡지를 발행, 내용은 거의 단재 자신이 집필했다고 한다. 1921년 1월에 창간된 이 <천고>는 그 창간사에서 자신의 발간 취지를 다음과 같은 한 편의 시나 다름없는 격문을 싣고 있다.


“천고여, 천고여, 그름이 되고, 비가 되어 이 땅의 더러움과 비린내(역겨움)를 씻어다오. 혼이 되고, 귀신이 되어 적의 운명이 다하도록 저주해다오. 천고여, 칼이 되고 총이 되어 왜적의 기운을 쓸어버려다오. 폭탄이 되고 비수가 되어 적을 동요시키고 뒤흔들어 다오. 천고여, 천고여, 너를 북을 두드려라~나는 춤을 추리라,우리 동포들의 사기를 끌어 올려보자꾸나, 우리 산하를 돌려다오. 천고여, 천고여, 분투하라 노력하라, 너의 직분을 잊지 말지어다.”


단재의 이와 같은 기백과 항일 구국정신의 웅휘한 문장에서 일찍이 찾기 어려운 그의 구국 애국 사상을 압축한 투쟁 사상을 읽을 수 있다.

낯선 망명지인 중국 땅에서조차 단재의 불굴의 애국정신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단재는 1905년 <황성신문>부터 1921년 <천구> 발행 때까지 10년 이상을 언론·출판 활동에 이바지한 삶이었다. 역사학자이며, 소설가이기도 한 그의 천성은 타고난 언론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언론인 송건호는 그를 정의한 적이 있다. 또한 소설가 춘원 이광수도
단재를 가리켜 ‘칼날같은 의지와 절개로 뭉쳐진 사람으로 시인적 여유조차 허락지 않은 사람’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김삼웅, <단재 신채호 평전>, 시대의창,2005,pp.150~153).
단재는 이 밖에도 1928년 여름에 <탈환>지와 <동방/東方>지를 발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채호의 사회사상을 주로 연구한 신용하 교수는 단재의 전기의 민족주의로부터 후기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 속에 변하지 않은 여셧갸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1) 강고한 독립사상으로 그의 민족주의에서나 무정부주의에서도 강렬한 독립사상을 굳게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독립사상은 타협 없는 ‘완전독립’과 ‘절대독립’이었다.
2) 강렬한 자유사상이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을 때에는 열렬하게 자유를 추구하였고, 무정부주의자였을 때에도 나아가 ‘절대 자유’를 추구하였다.
3) 강렬한 ‘주체성’이다. 단재는 그의 민족주의에서는 물론이요, 무정부주의에서도 정치성 주체성뿐만이 아니라 ‘문화적·사상적 추체성’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추구, 강조하였다.
4) 집요한 ‘진보 사상’이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을 때나 무정부주의자였을 때에도 집요하게 ‘진보’ ‘혁신’을 추구했었다.

5) 열렬한 전투성아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을 때에도 과격하리만큼 ‘전투적’ 민족주의자였고, 무정부주의자였을 때에도 과격한 ‘전투적’ 무정부주의자였다.
6) 뜨거운 ‘민족애’이다. 그의 민족주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민중’을 강조한 무정부주의에서도 변함없는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였다.


신채호의 사회사상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변하였으나, ‘민족에 대한 사랑’은 시간도 사상도 이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신용하, <증보 신채호의 사회 사상 연구>, pp.446-447, 나남).
이상과 같이 단재의 사상은 ‘독립’ ‘자유’ ‘주체성’ ‘전투성’ ‘진보·혁신’ ‘민족애’로 더 압축할 수도 있다. 이러한 단재의 한결같은 굳건한 독립 완성의 정신은 1918년 한국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긋는 신한청년당을 창립케 했고, 이 신한청년당은 “독립을 완성하고 문화적·도덕적으로 민족을 개혁하여 신대한민족을 만들며, 학술과 산업을 일으켜 실력을 양성하여 대한민족
의 신문화가 전 인류에게 행복을 주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곧 신한청년당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사회개혁주의, 국제평화주의를 창당이념으로 제시하여 이듬해 탄생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적·이념적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이하 하선 없애고 편집요망)
이 신한청년단과는 별개로 1919년 2월 만주 동삼성에서는 대한독립의군부 중심의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서는 단재를 비롯 남북 만주와 노령,상해,미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항일지사 39명이 참여한 상당한 규모였다. 이 선언서는 1919년 고국의 기미 3·1운동보다 1개월 전에 해외에서 대규모적인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이 선언서는 조소앙이 기초한 것이나, 독립운동방법론의 무장투쟁론 내용이 단재의 일관된 주장과 일치하고 있어 그가 깊이 관여한 것으로 짐작된다.
단재가 조국을 떠나 망명 길에 오른 지 18년인 1910년, 중국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직접 혁명’을 실천하고자 신문과 잡지 등을 발간하고, 일제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한 폭탄제조소를 설치하기 위한 자금 마련에 단재는 직접 나섰으나, 그런 자금 마련의 길은 전연 없었다. 일제 당시 그들이 우리의 망명 애국지사들을 쫓는 일은 아주 치밀했다.

단재와 그의 동지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외국위체를 위조하기로 결정하고, 그 실행에 단재 자신이 나섰다가 불행하게도 왜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곧 만주 려순담옥에 이송되어 10년 언도를 받고 옥살이가 시작된다. 그후 1936년 8년의 옥고를 치르던 중 단재는 돌연 뇌일혈로 의식을 잃었던 3일 뒤인 2월 21일 하오 4시 의식을 잃고 아무 유언도 없이 이국 땅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단재 그는 늘 왜경에게 쫓기면서도 연사연구에도 열심이었다. 1923년 1월에는 의열단/義烈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도 단재 선생이 직접 작성하였다. 이러한 바쁜 중에서도 역사학자 단재는 그동안 고국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연재했던 역사 연구의 원고를 정리하여 <조선사연구초>와 <조선사>,<조선상고사> 등의 값진 저술을 남기신 구국계몽운동과 항일
민족해방운동을 몸소 실천하신 민족주의 언론인이신 애국선비 투사였다.


참고문헌
최덕교 편, <한국잡지백년 2권>, 현암사, 2004.
김심웅, <단재신채호평전>, 시대의창, 2013.
박정규, <가뎡잡지 해제/제7호>, 1907.
신용하, <신채호의 사상연구>, 한길사,1984. <증보 신채호의 사회사상연구>, 나남, 2004.
정진석,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나남, 1987. <한국언론사>, 나남, 1990.
전영표, <한국출판론>, 대광문화사, 1987.


<월간 PT 201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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