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단으로서 인쇄물의 성쇠 ① 생존환경이 다른 중국, 영국, 미국, 일본
박혜림 2016-12-05 16:11:00

종이 인쇄물은 대량정보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만들어져, 통치, 포교, 수익획득에 기여해 왔지만 정보이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보서비스 제공의 수단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인쇄물 이용자의 생존환경, 인쇄업 창업의 경위, 영업경영상태의 특징을 아는 것은 산업성쇠의 요인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글 |와코 히코지



인쇄 및 관련업은 생활자가 생존의 목적으로 필요로 하는 정보를 의뢰자로부터 지시된 문장, 그림(정지화면)을 종이에 인쇄하는 청부 임가공업이다.


잡지, 서적 등의 매출액은 각국 정부의 산업통계에 의하면 유럽, 미국과 같은 경제선진국의 경우 정지화상을 컴퓨터로 작성하고, 전자파매체, 정보통신 ICT 기기로 음성, 동영상을 순식간에 세계에 송수신 가능하게 된 1920~60년대부터 감쇠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감쇠는 유럽과 미국의 경제선진국보다 40~70년 늦게 표면화되었다. 일본의 종이 인쇄물의 매출액은 버블경제가 붕괴한 1997년 이후부터 연 3~7% 비율로, 중소제조업 평균 감소율보다도 2배 빠르게 줄어, 종업원 수는 2000년 30만 명에서 매년 약 1만 명 비율로 감소했다. 이 감소에 대한 대응책으로 저가격 발주, 사업의 다각화, 서비스업화를 강구했던 것이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감쇠가 멈추지 않는 요인에 대해서는 종이매체의 정보수단으로서의 기능의 한계 및 제4차 산업혁명(정보혁명)의 관점에서 다수 논술되고 있다.


본지에서는 감쇠가 산업분화의 상징, 과도기를 나타내고 있다는 시점에서 종이 인쇄물을 정보수단으로서 지지해온 선진기술, 근로생산성이 계속 질문해 오던 인쇄업의 청부 임가공 경영형태의 역사, 경영과제를 정리한다. 토지, 민족, 통치방법 및 문자, 종이, 인쇄기술의 발달사가 다른 세계를 대상으로 지리, 민족, 통치와 서적최대 이용자의 생존환경, 이용목적, 인쇄업의 지속, 산업구조변화와의 관련성을 비교, 부감하고자 한다.


중국


아프리카, 중동, 중국은 문자, 서사물의 발상지이다. 인쇄업은 6세기 중국에서 글을 베끼는 작업의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중앙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는 기원전 134년에 창설되었지만 공모제는 아니었다. 수나라 왕조의 건국자인 문제(양견의 시호, 재위 581~604년)는 공모제를 단행했다. 공모제 발족 당시에는 종이 원재료 및 식자, 특수기능자가 적고 글을 베끼는 작업의 수임료가 고액이며 글을 베끼는데 수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고전서 1권의 가격이 가옥 1채와 맞먹었다. 수험자는 귀족, 조정관료, 부호의 자제가 대부분이었다. 고전을 읽을 기회가 없는 수험자는 고성인의 유훈, 문언이 새겨진 석비 탁본으로 자습했다. 고전서는 당왕조(618년~907년, 선조가 선비계 유목민) 중기 이후부터 목판으로 인쇄가 되었다.


목판본은 지금까지 읽기와 인연이 없던 가난한 자가 관료가 되어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고, 과거제도의 수험자수를 증가시켰으며, 서적이용 범위를 서민에게까지 넓혀 사회환경을 변화시켰다.


목판본은 글 베끼기 및 베낀 책을 원본으로 식자, 각인, 인쇄라는 특수기능을 가진 지식인이 있는 장소에서 만들어졌다. 한서는 무역상인 및 고증, 학생, 사절단에 의해 장안에서 천산산맥을 따라 중앙아시아, 육로와 해로가 교차하는 투르크반도, 해로를 통해 베트남, 일본으로 옮겨졌고, 한자, 왕조제도, 율령법령, 도시계획, 건축기술, 의복, 도기, 차, 농의약, 화폐를 유포시켰다. 지폐(교자)는 808년경 당나라 중기에 목판으로 인쇄되어 동서교역에 이용되었다.


종이는 전한시대(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 수도 장안)인 기원전 150년 경에 신관인 채륜이 화제에게 헌상하고 있었다.(후한서 105년) 하지만 20세기에 간쑤성 팡마난에서 발견된 종이의 섬유원료는 수피 및 채륜이 헌상했다고 추측되는 옛날 어망과는 다른 마찌꺼기라고 추정된다. 즉 제지기법은 채륜이 태어나기 60년 전, 기원전 200년경의 전국시대(전 403~221년)에 발명되어 있었다. 한시대의 종이 가격은 고마, 고어망의 절대량이 부족하고 분쇄와 종이뜨기 수작업 숙련기능자가 적어서 고가였다. 발명 당시의 종이 용도는 포장, 장식이었고, 비단과 대등한 공납품이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목판본이 팔린 이유는 베껴 쓰는 책이 모두 수작업으로 복사되기에 식자능력을 가진 숙련기술자가 부족해 고가였기 때문이다. 목판본은 손으로 쓴 문자를 뒤집어서 붙인 얇은 종이에 따라 자형을 손으로 조각하고 그 목판에 먹을 발라 인쇄, 교정 및 제본하는 각 공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목판은 각지에서 도입되었고, 목질의 경도, 마모, 흡수성이 비교되어 결과적으로는 가래나무가 선택되었다. 인쇄가능 부수는 목판이 마모되기 때문에 수십~수백부가 한도였다. 여명기의 목판본은 서체가 베껴 쓰는 원본과 유사하고, 인쇄문과 손으로 쓴 문자가 혼재되어 있어 작성연대 및 작성지의 식별이 용이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먹과 적, 2매 목판을 각각 겹쳐서 인쇄하는 2색 인쇄방법이 1341년에 고안되었다. 다색인쇄의 삽화는 문자와 그림 목판을 겹쳐서 인쇄한 뒤에 그림붓으로 색을 입히는 방법으로 작성되었다. 목판인쇄기술은 1403년에 한국, 유라시아 대륙에 전파되었다. 동활자는 1040년대에 필승(畢昇)에 의해 발명되어 나무 활자에 비해 마모, 자형의 변경, 틀이 잘 뭉개지지 않아 대량 부수 인쇄에 적합했지만 보급되지는 않았다.


중국공산당은 신문발행을 1949년부터 1970년대 문화혁명 때까지 공산당의 기관지와 공산당 지배하에 있는 군 기관지로 제한되어 있었다. 신문발행 기관은 인민일보 발행부수가 피크일 때의 2%로 감소, 80년대에 독립채 산성이 필요해졌고, 90년대 시민용 상업신문 발행이 허가되었다. 공산당은 95년대부터 대만 등의 국외기업에 수탁생산하고 있는 ICT 기기가 자국 내에 보급되자 인터넷 등을 언론통제 대상으로 지정했다. 외상산업지도목록은 2011년에 외자계 기업의 참여를 원칙금지류(군사, 교육, 위성, 네트워크 서비스), 제한류(뉴스제작, 도서,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인터넷, 전자 출판), 허가류(인쇄, 기록미디어 복제) 및 장려류(종이류, 종이제품, 프린터)의 4가지 분류로 구분해 규제했다. 정보전달매체는 2012년 인터넷,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잡지 및 도서출판의 연간 성장률은 38%, 21, 24, 19, 2 및 5.5로 인쇄물부터 ICT기기로 이동 중이다.


유럽


나일강 유역에서 발생한 문명의 고대유적에서 문양이 있는 구운 점토기와 (추정연대 : 기원전 5000~4000년)가 발굴되었다. 이 문양은 고대국가의 지배자와 연결됨을 상징하고, 앞선 뾰족한 봉 또는 목형을 점토판에 눌러 붙여 각인하고, 굽는 방식으로 양산되었다고 상상되고 있다. 이 기와와 유사한 점토판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국의 고대유적(기원전 4000년경)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목형의 압인은 다수 같은 형태의 문양을 손으로 만드는 작업의 효율화시킨다는 점에서 인쇄기술의 원류라고 추측되고 있다. 즉, 인쇄 원류는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양산기법이었다.


틀, 인감의 소재는 정이나 연마제가 발명된 이후에 동물뼈, 도기보다 평활한 면이 있는 돌, 금속으로 진화했다. 베껴 쓰는 재료는 처음에는 나무 조각, 후세에는 동물가죽, 천, 종이로 확대되었다. 파피루스는 기원전 3500년 경의 나일강에 자생하고 있는 풀로, 장식, 의류, 가구, 포장 소재에 이용되고 있었다. 양피지는 파피루스 입수가 곤란한 투르크반도에서 기원전 2세기경에 개발되어 종이에 비해 풍화가 잘 안되고 16세기까지 베껴 쓰는 재료로서 주류이었다. 초기의 종이는 표면이 거칠어 글을 베끼는 재료로서 부적절, 열화 되기 쉬워 현재까지 존재하는 것이 없어 글을 베끼는 재료로서 실용화 된 시기의 추정이 곤란하다.


제지기법은 문예부흥기였던 프랑스, 독일의 섬유원료는 풀에서 닥나무 셀룰로우스로 전환되고, 분쇄와 종이뜨기 수작업이 기계화되면서 가격이 떨어졌다. 종이는 시민을 구교의 도덕론으로부터 위반, 상업기회의 평등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의 정보교환 매체로 사용되어 시민운동망을 서부유럽에서 유럽 전체로 넓혔다.


14세기말에는 해상교역범위가 지중해에서 북해, 인도양으로 넓어졌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시는 투르크 반도에 접하는 아드리아해에 있고, 로마법 왕정의 압력이 거의 없었던 시기에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목판인쇄업에 우수한 직원, 경험자, 선배가 모여들었다. 목판인쇄의 해도가 많이 팔리고, 이수익이 출판사업의 적자를 메우고 있었다. 당시의 알도우스는 작아도 보기 좋은 이탤릭 서체 및 운반이 쉬운 문고판을 생각해, 오자 없고 경합기업의 1/8~1/3의 저가격으로 판매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구텐베르크는 독일 마인츠의 금속가공직이었는데 1439년 삼원합금활자를 발명, 먹물에 아교를 첨가해서 인쇄편차를 억제하고, 수동식 목제 포도착즙기를 개조해서 인쇄해 라틴어의 42행시 성서, 2권의 4행을 종이 및 양피지에 수동으로 인쇄했다. 금속활자는 목활자에 비해 잘 변형되지 않고, 수명이길며 인건비 삭감, 마모된 금속활자를 다시 녹여 주조해서 재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저가격으로 대량인쇄를 가능하게 했다. 금속활판기술은 글 베끼기에 비해 노동생산성이 높고 획기적이었다. 그의 대위업은 인쇄업의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시민계급이 인쇄책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게 했다. 대위업을 지원한 동료, 목적의식, 자기 변혁력, 실험 반복, 강인력 등이 그의 사후에 인지되었다.


16세기말부터 서적 이용자층은 특권계급에서 도시에 사는 남성 평민으로 넓어졌다. 18세기의 프랑스 상공업 장인들은 국왕에 영업허가를 신청해서 개업하고, 동업자끼리 기능수준유지 명목으로 길드를 결성해서 가격을 협정, 과당경쟁을 배제했다. 인쇄업계 내의 종사자는 개인경영자인 대장과, 제자와 같은 식자공, 인쇄공으로 3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다.


대장 역할은 활자세트를 소유하고, 제자에게 성과급 지불, 고용계약 체결, 고리대금으로 운전자금 차입, 잠재고객 발굴 및 출판기획안 경쟁자 누출에 의한 선점과 사업방해자 경계 등이었다. 대장 무리는 길드의 기득권익옹호에 참가하는 한편 잠재고객을 개척하기 위해 종교개혁자 및 진보주의자에게 출판을 부추겼다. 식자공은 고용주인 대장과의 구직면담 시에 대학이 발행하는 라틴어 성서 읽기능력 자격증명서 제시를 요구받았다. 한 글자 탈락 및 오자가 발생하면 인쇄책의 행수와 페이지수가 맞지 않아 신용실추, 출판 중지로 몰리는 계기가 되었다.


식자공과 교정공은 출판중지를 회피하기 위해 자기 판단으로 활자를 재조립 또는 오자, 탈자의 정정문을 인쇄책 속에 손으로 써넣는 직무권한 주어졌다. 식자공의 직장 내에서 직위는 인쇄판 위치 틀어짐을 왜곡 없이 조정하는 기능이 요구되어져 인쇄공보다도 비쌌다.


제자는 6~7년간 봉공을 마치면 대장으로부터 숙련자격 가부를 판정받았다. 유자격자는 공표되었고, 대다수가 계속해서 같은 직장에 남아(승격, 승급) 물려받든지 아니면 독립개업을 했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삼원합금활자는 마모되기 쉬운 목판을 잘 마모되지 않는 금속으로 전환, 소재와 제법의 혁신으로 인쇄업의 노동생산성을 높였다. 활판인쇄와 제지기술의 진보, 종이가격 저하는 시민운동의 정보망을 전 유럽으로 넓혔다. 시민운동은 많은 피를 흘리게 했지만 왕후가 자의적인 과세 및 구교의 기득권익을 억제시키는 하나의 요인, 민주주의 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18세기 프랑스의 인쇄업은 경영형태가 개인경영, 수작업 중심, 제자, 자격, 직계, 길드제였으며 대장의 주업무가 잠재시장과 저자발굴, 신용, 품질유지를 위해 뛰어난 인재확보, 자금조달이었다.


인쇄업의 대장은 당시 인쇄선진국이었던 독일, 프랑스에서 기술을 습득, 구입한 인쇄기계를 가지고 영국에 귀국, 개업, 인쇄업에 신규 참여했다. 카크 스톤은 세계에서 모국어인 영어판 성서를 1484년에 처음 발간한 사업자이다. 당시의 영어판 출판사업은 전례가 없었고 리스크가 높은 투기사업이었다. 그는 처음 출판하기 전에 프랜들과 브르고뉴에 30년간 체재하면서 모직물 수입 판매와 번역을 겸업, 구텐베르크의 아들인 세이퍼와 쾰른에서 만나 프랑스어 「트로이 역사」 영어본을 불쥬시에서 출판(1473년)했다. 영어판 성서 첫 출판시 에는 출판사업계획이 동업자에게 누설되고, 공동사업자가 활자셋트를 가지고 달아나는 일을 예방하는데 분주했고, 성서가 가장 많이 팔릴 것이라는 예상한 베네딕트계 수도회의 웨스트민스터 성당 앞에 판매점을 개설했다. 이 출판사업의 성공은 1490년대부터 영국에서 영어판으로 교과서를 발행하는 효시가 되었다.


활자신문은 독일에서 발행된 전단지를 견본으로 1609년에 부정기, 부정형으로 초판 발행되었다. 기사내용은 당초 상품선전, 정치가의 정적배제 및 매수목적이 많았는데, 동업이 난립하면 구매부수를 늘이기 위해 노동자의 가십거리인 왕족의 추문 내용이 점차 늘었다. 국왕은 위엄상실을 두려워해 출판인쇄업을 등록허가제로 바꿨고 종이, 문서에 과세, 신문에 인지를 부착하고 게재내용을 네덜란드, 독일 신문에 전재 및 번역하는 것을 제한하고, 추문집필자의 귀를 자르는 형벌, 인쇄출판 허가장을 기다리지 않고 인쇄물을 분포한 자는 교수형에 처하는 벌칙을 정했다. 이 언론통제책은 신문사의 경영자와 편집자를 부침시켰다.


더타임즈 회사의 경영자는 1814년 런던에 와있던 독일의 인쇄공 Koenig와 Bauer로부터 증기식 인쇄기를 구입해 신문 수동인쇄 인쇄속도를 올렸다.


신문 배송은 1820년대까지 인마에 의존했었는데, 속보신문의 운송을 1825년부터 Stockton과 Darlington의 도시사이에 철도가 바꾸어놓았다. 연속회전 인쇄기는 영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넬슨에 의해서 1850년에 발명되어 인쇄 속도가 빨라지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인쇄업은 이농자를 낮은 노동임금으로 대량으로 고용해 산업혁명기의 상거래 정보의 중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번성, 전자계산기가 출현한 1960년대까지 약 150년간에 걸쳐 번영을 이루었다. 번영을 지지한 것은 이농자이다.


서적은 17세기까지 국내수요가 적어 바다건너 나라로부터 수입되고 있었다. 왕가에 출입하고 있던 체프만(Chepman Walter, 1473~1538) 및 밀러(Myllar Androw)는 1507년 프랑스에서 인쇄특허권과 기재를 구입해 이듬해 한 번 접힌 종이의 목판인쇄물을 처음 출판했다. Chepman은 네덜란드와 무역상인, Myllar는 서적판매점주이면서 출판자금의 제공자였다. 왕립인쇄소는 1507~1800년에 에딘버러시를 중심으로 33개소 설립되어 1508~1788년 국왕의 법률, 의회의 의결 및 전기물을 발행했다. 왓슨은 1699년 신문「Edinburgh Gazetta」를 발행했다. 주요 기사는 무역, 상거래, 부동산광고, 왕족의 왕래였다. 민영 인쇄소의 설립은 1817년부터 허가되었다. 국왕과 교회는 미묘한 관계에 있으면서 오월동주였기에 출판을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민영인쇄업의 우두머리는 인쇄기술, 경영수법을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배워 스코틀랜드로 되돌아와 농촌출신의 여성(노동임금이 남성의 55%)을 복사 타이피리스트로 대량 고용했다. 주변, 관련업을 포함한 동업의 종업원 수는 대산업혁명기인 1840년대에 급증했다. 인쇄조합은 경합자의 난립, 매출액의 하락, 저가격 경쟁에 빠져 기계를 도입하고, 그 조작자 양성소를 개설(후세에 대학이 되었음)했다. 직장의 근로위생환경은 기계의 소음, 악취, 분진이 떠도는 열악한 환경이었고, 결핵에 걸리기 쉬웠다. 기업경영자는 노동임금을 내려 노동조합의 파업에 대항하기 위해 미숙련 여성을 낮은 근로임금으로 고용했다. 미국발 대공황(1929~33년)은 노동자의 해고, 인쇄공장 저임금화 되는 것에 기여했다.


주간신문 「The Scotsman」은 1817년에 에딘버러 시내에서 발행되었다.


그림, 마자쿠스, 피터래빗 등의 인쇄동화책은 20세기 초기 전후부터 간행되었다. 종이, 출판, 서점, 인쇄에서 성공을 거둔 경영자는 은퇴 후에 기업을 매각하고 얻은 수익금을 자기 노후 생계비 및 교회, 학교, 자선사업에 기여하고 있다. 오너 경영자에 있어 기업조직은 캐리어업의 장, 자적생활, 금융투자, 혹은 교육 및 종교단체 명예직 취임,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자금원이었다.


1960년대에 복수 컴퓨터를 연결하는 구상이 영국에서 발표되었다. 정지화면은 컴퓨터로 작성되어 제2세대(메카트로 및 매트릭스폰트), 제3세대(68년, 브라운관 및 디지털 폰트)를 경유해 인쇄판이 1970년대에 전자 포맷화 되었다. 영국의 동업 종업원 수는 2004년에 약 1만 명, 최성수기의 1/30로 떨어졌다. 스코틀랜드의 동업 종업원 수는 1960년대에 5000~7000명, 2010년에 1만 2000명이 되어 절정기의 1/30, 전산업에서 인쇄업종 관련자 수가 차지하는 비율은 2012년에 1% 이하로 하락했다.



북미


May Flower호에는 네덜란드의 인쇄출판업무 경험자인 William Brewster와 Edward Winslow가 승선해 있었다. 청교도는 인쇄기를 1638년에 미국으로 가지고 왔다. 하지만 인쇄물은 개간에 몰두하고 있는 농민의 실생활에 필수인 것은 아니었다. 종주국인 영국의 관헌은 식민지 이민자의 언론을 집요하게 통제했다. 식민지의 여론은 종주국과의 상거래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 온건파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개인, 자유경쟁, 자본주의 철학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1704년에 우체국장 John Campbell은 관헌의 암묵적인 허가를 얻어서 신문 「The Boston News-Letter」를 발행했다. 신문은 배달에 수일이 걸리고 게재내용이 지역의 정치가의 주의주장의 선전, 이익대변, 찬동을 부추기는 목적의 기사가 많았다. 18세기는 북동부에 사는 새로운 이민자 영국 왕 George 3세의 설탕, 문고, 신문, 차의 과세에 대한 항의가 독립투쟁(1775~83년)의 방아쇠가 되었다.


동서냉전시대(1945~1989년)에는 갑자기 날아올 위험이 있는 대륙간 핵탄두 병기에 대한 경계심은 조기탐지 레이더, 탄도로 전자계산기를 만들어내고 무선통신망을 연결하게 했다. 이 통신망은 인공위성과 광해저 케이블로 지구를 덮어 동서냉전이 종결된 1980년대에 자국의 경제 활성화 목적으로 국민에 개방되어 팽대한 정보 속에서 개개인, 기업, 정부가 찾는 정보를 세계규모로 폭넓게 정보수집, 선전, 자금투자, 선택, 회수, 상품 세분화 등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주요 대형 인쇄산 약 20개사는 1980년대부터 종이인쇄물의 매출액 비율이 7~40%로 수축 중이고, 사업은 전자부품, 로봇, 전자저널(문자+음성+동영상) 등으로 다각화, 또는 신흥 매스미디어 관련기업에 합병, 매수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대형 매스미디어, 화상처리업은 고속, 광역, 다기능, 저가격화를 다투고 있다. 다국적기업은 고객, 대상목표 동향을 검지, 감시해서 얻을 수 있는 빅데이터를 패턴 인식하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심층학습)의 개발, 용도확대에 노력하고 있다.



<월간 PT 201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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