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단으로서 인쇄물의 성쇠 ② 생존환경이 다른 중국, 영국, 미국, 일본
박혜림 2016-12-09 11:35:40

종이 인쇄물은 대량정보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만들어져, 통치, 포교, 수익획득에 기여해 왔지만 정보이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보서비스 제공의 수단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인쇄물 이용자의 생존환경, 인쇄업 창업의 경위, 영업경영상태의 특징을 아는 것은 산업성쇠의 요인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지난 호에는 중국, 유럽, 미국의 생존환경에 대해 살펴봤고, 이번 호에는 ‘생활수단으로서 인쇄물의 성쇠’ 2번째 편으로 일본의 생존환경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글 |와코 히코지


일본


중국대륙과의 근접성은 610년에 제지기술을 도래시켜 한문을 국내 유일의 정식문자로 채택하게 했다. 5~7세기 나라와 교토는 중국에서 전래되어 온 중앙집권통치, 도시구조, 장원, 율령제동의 모방, 다이카 개신(645년), 승려의 거주지 및 서적 최대 이용지가 됐다.


네덜란드와 중국을 제외한 쇄국령은 일본을 세계의 문명과 차단하고, 내향적인 일본문화권을 형성시켰다. 이 국책은 일본의 활판인쇄업 창업, 최성수기(1990년) 및 감쇠(1992년)를 경험하는데 영국보다도 각각 360년, 170년 및 약 70년 늦게 현재화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


한문은 문자수가 수만 자 이상이고, 조정관료가 읽고 쓸 수 있도록 자획의 일부가 카타카나체가 되고 헤이안 시대 9세기에 귀족계급의 여성에 의해 속기용 초서체를 가차한 히라가나체로 간략화됐다. 목활자는 원군이 키타큐슈에 내습해와 송이 멸망한 후 1290년경에 도래한 이후 크리스트교를 탄압해 온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기 직전까지 약 5백년간에 걸쳐 이용됐다.


활판인쇄기는 1534년에 프랑스에서 창립된 구교계 남자수도사회 예수회의 네덜란드 선교사가 일본에 1590년에 가지고 왔고, 이후에 네덜란드의 상관장이 암스테르담제 스탠호프기를 도쿠가와 막부에 상납했다. 하지만 양인쇄기와 함께 방치됐다. 프랑스에서는 1540년대까지 역사서, 시집, 소설이 금속활자로 인쇄, 시판되고 있었다. 파리에 사는 동양문학자인 Abel Re' musat(1788~1832년)은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고사기」의 소개문을 카타카나를 넣은 삼원합금활자를 이용했다. 서구에서는 이것을 기회로 일본문자가 점차 주조되어 일본문화 소개, 사전, 일본어 성서 발행에 이용됐다.



일본국내 최초의 활자신문은 도쿠가와 막부말기에 네덜란드어 통역사로서 나가사키에 주재하고 있던 모토키 쇼죠에 의해 처음으로 발행됐다. 모토키는 1848년(카에이 원년)에 네덜란드제 금속활자와 인쇄기를 구입해 1850년대 말에 활자를 처음을 주조했다. 일본국내에서 일본인에 의한 금속활자판 인쇄물의 첫 발행은 구텐베르그 발명보다 420년 늦다. 금속활자신문은 네덜란드 금속활자 신문이 처음 발행됐다.(1856년, 안세이3년) 문체는 카타카나와 수십 종의 한자가 혼합되어 있었다.


프로세인은 통상조약을 체결한 1861년(분큐원년)에 쇼군에게 인쇄용 윤전기를 선물했다. 전 글자를 합금 활자로 만드는 것은 도쿄 츠키치에 창설(1873년)된 활판제조소에서 1876년부터 14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만들어졌다. 목판인쇄작업의 노동생산성은 당시의 목판 조각자의 일급이 20전, 목수의 3배로, 낮았다. 목판에서 금속활자 인쇄로 전환된 이유는 4장 5절에서 전술한 것과 같이 노동생산성의 격차에 있다. 하지만 그 전환은 낮은 노동임금으로 경영되고 있는 인쇄업을 포함하는 기업에 있어서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무사계급은 타이세이 봉환(1867년)때 해고되어 그 일부가 유럽, 미국 국의문명, 통치제도, 군사, 조선기술의 서적을 다투어 수입, 모방, 개량했다. 요코하마항 주변에는 누에고치를 선매하는 중매인, 도매상, 은행, 복장 디자이너, 사진관,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의 무역상을 위한 교회, 병원, 상업신문 인쇄소가 설립, 철도가 건설(1872년)됐다.



인쇄업은 창업 이래 일본어문화권의 틀 내에서만 종이인쇄물을 생산했다.


국립지폐국은 1875년 창설되어 태환지폐 제조를 독일의 인쇄업에 위탁하고 있었다. 민영 인쇄업 전신 2사는 목재 용해액에서 종이를 양산하고 있는 제지공장의 인근, 더욱이 고객이 집중되어 있는 동경에 1876~1900년에 창업해 일용잡화품인 성냥라벨, 상점 전단을 양산했다. 동업의 후발조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귀환병 및 국책에 따라 만주와 몽골에서 이주해 온 개척민의 귀국자가 창업한 개인경영의 청서, 등사판업이다. 인쇄작업공정은 60년대에 타이프, 활판인쇄기, 70년대에 조판작업이 식자에서 사식으로, 80년대 편집 때 잘라 붙이는 작업에서 컴퓨터 처리, 인쇄판이 사식에서 미세가공으로 이행됐다. 국내에서 미세가공기술을 가진 인쇄업은 대기업 몇 개회사가 전부이고, 그 기술은 2000년대에 전자부품 및 산업자재 제조에 유용하게 활용됐다. 대다수의 인쇄업은 전문분야로 경영자원을 집약 및 하청으로 경영되어 종업자의 주요 작업이 (a)종이 재단, 설비보전, 편집, 인쇄, 검품, 배송, 공정관리, 비용삭감 및 (b)신규시장개척, 서비스 부가였다. 컴퓨터 소프트 인재는 (c)구입한 기계설비의 프로그램 개량, 효율화, 설비 투자비 조기 회수에 필수이지만, 영세중소규모기업에서 모집난, 정착난, 절대수 부족 상태에 있다.


감쇠의 본질적 요인은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에 있다. 고객의 입장에서 본 인쇄업은 (a)정보 및 편리성, 경제가치의 창출업종이 아니고, (b)약 2천년 이어져 온 독자성이 보이지 않고, 정지화상 복사업이며, (c)저렴한 잉크젯 프린터가 일반가정에 보급, (d)정보가 물건, 종이 매체의 이동속도보다도 고속으로 직접, 개인, 기업, 정부에 송수신 가능한 사회환경이 되었으며, (e)고객이 지시한 정지된 화상을 청부 양산하는 임가공료 형태로 경영되고 있다. 경영면에서 본 과제는 자율경영을 목표로 노동생산성의 개량이다. 그 구체책은 각사의 고객, 사업목적, 비전에 따라 다른데 ①이용자가 본 생활에 편리한 수단의 창조, ②고객이 본 신기성의 탐색, ③지역에 따른 자사 독자의 신기능, 제품, 시스템 개발, 적극적 관여, ④신시장 개척, 서비스 인재 육성, ⑤의욕, 동기부여, ⑥리스크티킹 수용, 다른 문화 도입, ⑦고객과의 공동창업, 연계, 보완, 효율화, ⑧이러한 것들의 조합이 고려된다.


종이 인쇄물은 이 이외에 유력한 정보수단이 없었던 시기, 그 지역에 있는 문자, 종이, 첨단가공기술을 조합해 정지화상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의 하나에 불과했지만 통치, 포교, 지식전달, 생업의 변혁에 크게 공헌해 왔다. 인쇄업은 노동생산성이 베끼는 작업과 비교해 높았기 때문에 분화된 복사청부 임가공업이다. 하지만 기술은 종이 매체보다도 더욱 노동생산성이 높은 디지털 신호매체, 알고리즘, AI를 창작하고 있다. 산업 성쇠의 주요인은 노동생산성의 고저에 따라 보편화 됐다. 인쇄업의 경영과제는 이용자가 보는 종이 매체의 정보수단으로서의 기능 한계, 경제가치, 정지화상 임가공업으로서 기존의 경영형태를 수정하고 대인교섭인재의 육성 등의 과제가 산처럼 쌓여있다.


참고문헌이 다수 있지만, 지면관계상 생략했습니다.(편집부)



<월간 PT 2016년 11월호>

디지털여기에 news@yeogie.com <저작권자 @ 여기에. 무단전재 - 재배포금지>